스님께서 연기법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이 세상이 모두 연관되어 있다고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에 대해 말씀하실 때
주로 우리의 정신 작용을 중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물질적 존재입니다.
물질적 존재를 기초로 생명의 존재가 있으며,
생명의 존재를 기반으로 정신적 존재가 있습니다.
즉, 물질 작용이 있고, 생명 작용이 있으며, 정신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옥상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질 작용이고,
내가 밥을 먹는 것은 생명 작용이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고 판단하는 것은 정신 작용입니다.
우리는 물질 작용, 생명 작용, 정신 작용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돌멩이는 물질 작용만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은 물질 작용과 생명 작용, 두 가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동물은 물질 작용과 생명 작용에 더해
정신 작용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신 작용은 사람에게만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 작용은 동물에게도 있지만,
사람이 가장 발달된 형태로 가지고 있습니다.
‘괴로워 죽겠다’ 하는 것은 정신 작용에 속합니다.
누군가 침으로 찌르면 ‘아야!’ 하고 반응하는 통증은 생명 작용입니다.
그러나 찌른 사람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은 정신 작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주로 연구하신 것은 정신 작용입니다.
괴롭다고 하는 것은 정신 작용입니다.
인도의 전통 사상은
괴로움이 전생에 지은 나쁜 업의 과보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이 본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생긴 원인을 찾아 없애면 괴로움도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니르바나(열반)’라고 부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전생이 어땠는지에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앙굴리말라가 칼을 들고 부처님께 다가왔을 때도
부처님은 니르나바에 이른 상태였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 연기법, 그리고 모든 가르침은
이런 인간의 정신 작용을 분석해서 도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은 물질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의학이나 생명공학은 생명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첫째, 물질세계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연구했습니다.
물 한 방울을 쪼개면 여전히 물이고, 또 잘라도 물입니다.
그런데 계속 잘라 들어가다 보면 어떻게 될까요?
한 번만 더 잘라보면 더 이상 물이 아닌 상태가 됩니다.
그 마지막 물의 알갱이, 그것이 바로 물의 본질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물의 본질이 모여서 세상의 모든 물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물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한 것임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산소 하나와 수소 두 개가 결합하여 물 분자가 된다는 것이지요.
물은 단독의 알갱이가 아니라
산소와 수소의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산소와 수소를 분해해 버리면 더 이상 물이 아니게 되고
다시 결합하면 물이 생깁니다.
즉, 물은 물이 아닌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을 구성하는 산소와 수소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일까요?
돌턴의 원자설에서는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독적인 알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원자 역시 내부에 무언가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원자의 중심에는 핵이 있고, 그 핵을 전자가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핵을 또 들여다보니까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립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원자 역시 단독자가 아니고 소립자의 결합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단독자일까요?
소립자도 단독자가 아니라 쿼크의 결합이라는 것이 발견되었어요.
물질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단독자가 없고, 다만 결합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 무상, 연기법은
단독자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물질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자들 중에는
‘불교는 과학이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둘째, 생명세계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생명에는 종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 소, 감자, 토마토 같은 것을 종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감자를 심으면 반드시 감자가 나옵니다.
아무리 심어도 감자에서 고구마가 나올 리는 없잖아요.
그래서 과거에는 종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과학 연구에서는
‘이게 감자다’라고 하는 것은 유전자(DNA)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유전자의 배열을 바꾸면
감자가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종이라는 것도 불변하는 게 아니고 바뀌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는
정신 작용, 생명 작용, 물질 작용, 모두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셋째, 정신세계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나다’하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누구일까요?
내가 택시를 타면 사람들은 나를 승객이라고 부릅니다.
가게를 운영하면 주인이라고 부르고
학교에 가면 학부모라고 부릅니다.
아내를 만나면 남편이라고 부르고
엄마를 만나면 자식이라고 부르죠.
이처럼 연관되어서 누구라고 불리는 것이지 단독으로는 누구도 아닙니다.
관계를 맺으면 무언가가 되지만,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이름이 사라져 버립니다.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무엇도 아니지만,
인연을 따라 관계를 맺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고, 인연을 따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과학적 지식을 사용해서도 충분히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브라만 계급과 노예 계급이 있었습니다.
브라만의 아들은 브라만이고,
노예의 아들은 노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노예가 없어져 버리면
브라만이라는 게 있을까요?
반대로 브라만이 없어지면 노예라는 것도 없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브라만도 없고 노예도 없습니다.
만약 브라만과 노예가 모두 사라지면,
그 이름도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관계 맺음으로 이루어지고, 관계가 흩어지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며, 신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인연에 따라 형성되기도 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가르침을
붓다는 2600년 전 그 시대에 사람들에게 이해시켰어요.
이것이 붓다의 위대함입니다.
첫째, 아무도 모르는 것을 깨닫고 알았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도 이 사실을 깨우칠 수 있도록 가르쳤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비록 세상 전체에는 실현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상가 안에서는 이를 실현시켰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는 4개의 계급이 있다.
그러나 내 법 안에는 그런 차별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브라만 출신이고,
우빠리는 수드라 출신이고,
아난다는 크샤트리아 출신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상가 안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친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너는 그 부정한 사람들과 같이 있다며?’ 하거나
‘그 더러운 사람들과 함께 산다며?’ 하는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자면
‘너는 돼지와 함께 산다며?' 하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급의식은 허위의식입니다.
스스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버려야 하고
스스로 부정하다고 여기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나는 고귀하다’, ‘나는 높다' 하는 교만심을 버리면 겸손해집니다.
‘나는 부정하다’, ‘나는 낮다’ 하는 비굴함을 버리면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 수행자들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이 말씀은
수행자가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태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담마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담마의 핵심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을 다른 용어로 표현한 것이 무상과 무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더라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상대가 가난하고 여자라 할지라도
그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만약 모두가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좋아질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첫째, 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 법을 내가 실제로 경험해야 합니다.
하지만 법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법을 이해하더라도 실천하기는 더욱 어려워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꾸준히 정진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잘 되다가도 다시 안 되고,
다시 잘되다가 또 안 되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마치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꾸준히 정진해 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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