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역사가들은 어쩌면 2020년대가 시작되는 지금을
새로운 우주탐사 시대의 출발점으로 기술할지 모르겠습니다.
2020년은 사상 최초로
민간 기업의 유인우주선이 공식적인 임무를 시작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페이스X를 비롯한 민간 기업들이
향후 10년 동안 우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낸다면
우주산업은 비약적인 도약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항공산업이
민간으로 넘어가면서 급성장을 한 것처럼
우주산업도 상업자본의 힘으로 폭발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막 태동하는 우주탐사의 새역사를 목격하고 있는 셈입니다.
영광스러운 목격자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라면
팝콘과 휴대폰, 거기에다 약간의 역사적 배경 정도?
네, 지나간 역사를 알면
새로운 역사를 목격하는 일이 더 재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우주탐사의 역사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20세기 우주탐사의 역사는
한 편으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
어떤 전쟁이든 싸움의 막바지에는 전리품 챙기기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미국과 소련은 독일의 V-2로켓 기술을 챙기기 위해 물밑작업을 펼쳤습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이 만든 V-2로켓은
나치의 공습기간 동안 런던과 앤트워프에서 약 9천 명을 살상한 무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독자적인 로켓개발 기술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련보다 먼저 폰 브라운을 생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베르너 폰 브라운 생포 작전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습니다.
독일의 비밀 진지를 빠져나온 폰 브라운이
제발로 미군에 걸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폰 브라운은 더 가까이 접근해온 소련군에 항복할 수도 있었지만
소련군이 포로들을 심하게 다룬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먼 거리를 걸어서 미군 병사에게 항복한 것입니다.
미국은 시작부터 운이 좋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로켓 기술은 미국과 소련으로 빠르게 유입되었습니다.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과 100명의 독일 과학자들로 하여금
로켓을 계속 연구하게 했고
소련은 V-2로켓을 분해해 자신들의 로켓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초기의 로켓 경쟁에서 앞서 나간 쪽은 소련이었습니다.
소련은 전쟁 전부터 자체적으로 로켓을 연구해오고 있었던 데다가
전쟁 후에는 대륙간 탄도탄 개발이라는
확실한 목표 아래 엄청난 자금을 투입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미국의 로켓개발은 공군, 해군, 육군에 분산되면서
효율이 떨어지는 면이 있었습니다.
결국 냉전 시대 최전선에서 벌어진 로켓개발 경쟁에서
소련은 확실한 선방을 날립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개발한 강력한 R-7로켓 위에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이 실려 우주로 발사된 것입니다.
스푸트니크 1호가 지구 궤도에 오르자 미국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미국은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의욕만큼 성과는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해군의 뱅가드 로켓은 발사 직후 폭발해버리는 광경이 생중계되었고
육군의 폰 브라운 팀이 만든 익스플로러 1호는
궤도에 오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겨우 벽돌 한 장 무게였습니다.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자
미국 내부에서는 군사적 목적의 강력한 우주 전담 기구 설립을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군인 출신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군대의 관료체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 목적의 대규모 국립 연구소에서 더 나은 기술혁신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미국의 벽돌 무게 위성이 발사된 지 4개월 만에
자그마치 1톤짜리 스푸트니크 3호가 발사되었습니다.
미국행정부는 큰 비판에 휩싸였습니다.
1톤짜리 위성을 실어, 지구 궤도에 올릴 수 있다는 말은
1톤짜리 핵탄두를 실어 미국에 쏘아 보낼 수 있다는 의미와 같았습니다.
그래도 아이젠하워는 단호했습니다.
결국, 아이젠하워의 뜻대로 1958년 10월 1일에 미국항공우주국 NASA가 출범했습니다.
NASA는 8200명의 직원과 3억40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NASA의 출범으로 미국도
대규모 자금 동원이 가능한 우주개발 전담 기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소 양국은 본격적인 우주경쟁 체제에 들어갔습니다.
--1960년대
우주경쟁 초기에는 소련이 거의 모든 '최초’ 타이틀을 휩쓸었습니다.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최초의 지구 중력을 벗어난 우주선
달에 충돌시킨 최초의 탐사선
금성에 간 최초의 탐사선
화성에 간 최초의 탐사선
최초의 우주인
최초의 여성 우주인
그리고 최초의 우주 개까지
모든 최초 중에서 미국에게 유난히 뼈아픈 최초는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이었습니다.
인간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우주를 정복하려는 목표에 한발 다가간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젠하워 다음으로 취임한 미국의 젊은 대통령은 빠르게 대응했습니다.
가가린의 우주여행이 있고 두 달이 채 안 된 시점에서
존 F 케네디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1960년대가 가기 전에
미국은 인간을 달에 보낼 겁니다.”
케네디의 달선언 뒤 4개월 만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지고
두 강대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하였습니다.
아폴로 프로그램은 이처럼 냉전의 일촉즉발 위기 상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달 탐험 경쟁에 상호 협조를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강대국은 상대방을 과대평가했고
그래서 자신들의 기술적 한계가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협조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두 나라에서 비슷한 사고가 반복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1961년에 소련의 우주비행사가 고압의 산소 채임버 화재로 목숨을 잃었는데
1967년에는 비슷한 사고로 아폴로 1호 우주인들이 죽었습니다.
만약 소련의 사고가 기밀에 부쳐지지 않았다면
미국은 캡슐의 설계를 바꾸어 사고를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케네디가 약속한 1960년대가 다 가기 5개월 전
미국 휴스턴의 관제센터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닐 암스트롱이 여러 차례의 기술적 결함을 겪고 난 후,
착륙 모듈을 수동을 조작해
1분 비행하기에도 아슬아슬한 연료가 남은 시점에서
달착륙에 성공한 것입니다.
어쨌든 달착륙은 인류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었습니다.
달에서 바라본 지구는 국경도 없고 경쟁도 없었습니다.
미국 우주비행사들이나 소련 우주비행사들이나
한결같이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에 매료되었습니다.
푸르고 연약한 행성, 그런 지구의 모습은
1960년대 말에 환경운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군과 산업이 만든 업적이 환경운동을 촉발시켰다는 점은 무척 역설적입니다.
--1970년대
아폴로 프로그램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달착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급격히 식었습니다.
역사라는 흐릿한 렌즈를 통해 보면
아폴로 프로그램이 마치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주에 왜 그렇게 많은 예산을 쓰냐”며 욕을 먹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결국 예정되었던 마지막 세 번의 달착륙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달탐험 경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새로운 우주탐사 시대가 열렸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과거의 업적들을 바탕으로 1970년대에 본격적인 태양계 탐사 프로젝트들을 추진했습니다.
소련은 최초로 화성 연착륙에 성공했으며
특히 금성에서 눈부신 과학적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미국은 지질학과 천문학이 융합된 행성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켰습니다.
행성과학과 NASA의 엔지니어링이 결합한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바이킹1호는 화성 착륙에 성공해
최초로 다른 행성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파이오니아 10호와 11호는
인류의 탐사 영역을 목성과 토성까지 확대했습니다.
보이저2호는 그 영역을 다시 천왕성과 해왕성으로 확대했습니다.
현재 보이저1, 2호는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멀리 가 있는 물체가 되었습니다.
무인 탐사선들이 태양계 곳곳으로 날아가던 1970년대는
행성과학의 황금기였습니다.
1975년 7월 17일, 우주에서 낯선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아폴로와 소유즈가 도킹을 한 뒤 양국의 우주비행사들이 손을 맞잡은 것입니다.
아폴로-소유즈 도킹은 몇 년 전부터 준비된 것이며
데탕트, 즉 양국의 긴장 완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우주 경쟁도 한풀 꺾였습니다.
경쟁이 줄어들면 예산도 줄어들고, 돈이 없으면 우주탐험도 없습니다.
아폴로 프로그램 이후 NASA의 예산은 지속적으로 삭감되었습니다.
소련의 우주 프로그램들도 예산 축소와 혁신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주탐사는 긴 침체기에 들어갔습니다.
--1980년대
경쟁과 예산이 줄어든 대신 NASA는 태양계 탐사의 주도권을 얻었습니다.
예전처럼 활발하진 않지만 NASA는 탐사선들을 쏘아 보냈습니다.
1989년에는 갈릴레오호가 목성으로 발사되었고
1997년에는 카시니호가 토성으로 발사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오랜 노력 끝에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스 호가 발사되었습니다.
반면 소련은 행성 탐사보다 우주정거장 프로젝트에 공을 들였습니다.
소련은 살류트 우주정거장과 미르 우주정거장들을 시험하면서
‘거주가능한 우주과학실험실 건설’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에 질세라 미국도 미르 우주정거장에 대응하는 프리덤 우주정거장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우주정거장 건설을 위해 신개념의 우주선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1979년, 전세계 제임스 본드 팬들은 난생처음 보는 우주선에 매료되었습니다.
2년 뒤인 1981년에 첫 발사 예정이던 NASA의 우주왕복선이
007영화 문레이커에서 첫선을 보인 것입니다.
우주왕복선은 여덟 명의 승무원과 25t의 화물을 수송할 수 있고
대략 1주일에 한 번 정도 우주를 왕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재사용 가능한 우주선이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인 덕분에 우주왕복선은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문제는 우주왕복선이 결코 계획처럼 비용이 저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막상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발사 빈도는 원래 계획보다 10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발사 비용은 20배나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챌린저호와 컬럼비아호가 폭발하는 사고를 겪으면서
위험한 우주선으로 인식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은
30년 동안 135차례 비행과 300명의 우주비행사들만 실어 나른 뒤
2011년에 완전히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2000년대
이제 미국은 자국의 우주비행사들을 우주로 보낼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폐기된 2011년 이후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이 우주로 가려면
한때 적대국의 우주 기지였던 바이코누르에서 소유즈 우주선에 탑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는 소련 우주 개척 활동의 심장부였습니다.
스푸트니크 1호도, 유리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도 모두 이곳에서 발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는 우주개발의 추진력을 잃었고
자신들의 심장부를 개방해서라도 이득을 취해야 했습니다.
NASA가 계획했던 프리덤 우주정거장도
소련의 해체로 프로젝트가 취소되었습니다.
취소된 프로젝트는 러시아를 포함한 다국적 국가로 구성된
국제우주정거장 프로젝트로 대체되었습니다.
우주경쟁의 끝, 스타워즈는 없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주 경쟁이 어색한 우주 협력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2020년대
우주탐사 시대의 부활을 알리는 변화들이 속속 관찰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주기술을 매입한 중국은
우주굴기(우주에서 우뚝 섬)를 내세우고
유럽을 비롯한 경제 대국들은 독자적인 우주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NASA는 우주생물학과 우주자원 연구에 새로운 목표를 두었습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변화는 민간 기업들의 등장입니다.
우주시대의 부활이 과거처럼 군사적 경쟁으로 치닫게 될지
아니면 자본주의 경쟁으로 치닫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목격해야 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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