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분들이
예를 들어서
관념이 진짜로 변했다는 걸 어떻게 알죠?
아니면 정화가 됐다라는 걸 어떻게 알죠?
이런 부분에 대해서 궁금해하십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조금 심도 깊게 살펴볼게요.
딴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알아요, 사실.
그냥 본인이 아는데 어떤 형태로 아냐면은
예를 들어서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되게 당연하게 압니다.
그래서 이거는 무언가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이
아는 그런 앎이 있어요.
반대로 내가 정화가 됐다
아니면 이런 상태에 있다라는 사실을
어떤 근거를 가져다가 대면서
이거를 확인을 해야 된다면은 아직 조금 먼 것이겠죠.
그런데 중요한 거는
이러한 어떤 당연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좀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깊어지는 시간이.
그런데 ‘정화의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정화의 정도
그래서 정화가 진행되면 되어 갈수록
일단 주의의 초점, 즉 관심의 측면에서는
내 삶의 외부로 외면으로 향하던 시선이 안쪽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래서 어떤 시기에는
그러니까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조금 없어지는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계발하고 연결을 시키게 되면은
세속하고 너무 관심이 없어지면 어떻게 돼요?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힘들겠죠.
그러면 다른 형태로
결국에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의 차원하고
그다음에 세속의 차원이 둘이 아니다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정화가 깊어지게 되면은
일단 이전까지 내가 죽고 못 살던 어떤 그 문제들 어려움들이 있죠.
요거에 끄달리는 마음이 사라져 가요.
그리고 그걸 넘어서면은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은 상태로 변해가요.
내가 소망 그런 것들 있잖아요.
여기에서 더 깊어져 가면은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라는
그것을 기반을 깔고 있으면서도
“이 세속적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무런 문제가 없구나”라는 상태로 또 변해가요.
그래서 이게 정화의 정도입니다.
처음에 정화가 시작될 때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이제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세속의 문제점들이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게 된다.
이게 첫 번째 표징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리고 관심의 측면에서는 뭐다?
외부로 향하던 관심이 내면세계로 향하게 됩니다.
이때 “아, 내가 구도자 캐릭터였구나” 이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면서 결국에는
우리가 아무리 마음공부를 하고 깨달음을 추구를 하고 막 해도
뭐라고 말씀드려요?
다음 달 카드값을 내야죠.
그다음 뭡니까?
쌀을 사야 될 거 아니에요?
살아야 된다라는 이야기예요.
살아야 되는 거.
그래서 삶을 사는데
이 삶 안에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공부들, 마음공부들
이거를 삶하고 분리시켜 놓는 어떤 그 시선 하에서는 뭡니까?
‘속세의 것을 추구하면 안 된다’라는 어떤 고정관념이 있단 말입니다.
이거에 대한 꺼림직함이 없어지게 돼요.
‘추구를 해도 상관이 없다’가 됩니다.
그런데 예전처럼 추구하잖아요.
예전처럼 추구하는 건 뭐예요?
에고의 집착, 에고의 슬픔으로 추구하면서 살던
이런 내 마음 상태가 달라지게 돼요.
이게 척도예요.
이게 척도.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공통적인 어떤 그 부분은
마음이 깊어지면은
내가 이제까지 원하던 어떤 미래의 모습이나 삶이나 그런 것들이
내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그게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인 상태가 돼요.
근데 여기 뉘앙스 차이가 있어요.
돼도 좋고 안 돼도 좋고 하고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은 또 달라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돼도 좋고 안 돼도 좋고라는 상태에 대해서
상상 자체가 힘듭니다.
이유는 뭐냐?
이원적인 의식으로 사니까 항상 뭐예요?
둘 중에 하나예요.
되던가, 안 되던가.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내 표면의식이 원하는 건 뭐예요?
무조건 이게 되어야 내가 살 수 있다라는 이 마음이잖아요.
여기서부터 변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정화라는 것이 제대로 일어나게 되면은
360도를 돌아서
세속의 어떤 문제점에 끄달리지는 않지만
그 세속을 이분해서
나는 깨달음을 추구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이 ‘세속을 멀리한다’라는 이 마음마저도 떠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어디로 돌아와요?
세속의 현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끄달리지 않으면서 집착하지 않으면서
물을 흐르는 것처럼 즐겁게 살아요.
이게 표식이에요.
만약에 이러한 어떤 징표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은
그 정도가, 정화의 정도가
사실 정화라는 말도 조금 어폐가 있죠.
정화라는 말보다 승화, 승화라는 말을 씁시다.
왜냐?
세상에는 별도로 깨끗하게 해야 할 만한 무언가가 없어요.
전부 다 있는 그대로, 존재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예요.
쓸모가 있는 거예요.
딱 이것을 이 부분을 표징으로 잡으세요.
중요도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제까지 나를 갖다가 얽어매고 있었던, 내가 집착하던 그게
반드시 해야 된다, 이루어져야 된다.
그러면 여기 중요도가 떨어지고
되어도 행복하고
되지 않아도 나의 어떤 존재적인 행복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라는 그 상태가 되고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또 이 인생을 멋지고 즐겁게 사는 데도
아무런 무리가 없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여기까지 오셔야 돼요.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당연한 어떤 형태
“아, 바뀌었구나, 내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구나”
이런 앎이 딱 자리를 잡는 그 순간이 있어요.
근데 이거는 본인이 체험을 해봐야 되는 거죠.
이때는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하늘이 열리면서, 오색 무지개가 쏟아지고, 막 꽃비가 내리고 막 그러나요?
근데 이게 일종의 어떤 그 표현인데
에너지를 통해서 수련을 하셨던 분들은
이러한 어떤 신비 체험을 하시기도 해요.
의식이 각성되는 순간에.
그냥 이런 거는 참고용으로만 아시면 돼요, 참고용으로.
다시
완벽하게 정리되셨어요?
기존에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진짜 중요하던 내가 집착하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중요도가 어떻게 된다?
낮아진다.
그런데 “더 이상 이런 거 쓸모없어”가 아니라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로 갑니다.
이건 다른 거예요.
더 이상 이거는 쓸모가 없어서
나는 이걸 더 이상 원하지 않아 이런 게 아니에요.
그리고 다시 조금 더 돌아가면 어떻게 된다?
진리의 차원하고 속세의 차원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진리의 한 모습인 이 속세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거죠, 열심히.
대신에 뭐 해요?
끄달리는 게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 감정이 일어나지 않느냐?
그런 것도 아니에요.
아무 감정이 없는 삶은 좀비예요.
모든 게 다 있습니다.
인간 존재에게 부여되어 있는 모든 특징들이 다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절대성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아는 앎이 있어요.
여기까지 가시는 거예요.
이 과정에서 체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신비 체험들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중에는 모든 신비 체험들은
이 마지막에 남는 앎 안으로 흡수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평범해져요.
그래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오히려 공부가 덜 됐을 때 뭐 한다?
하늘을 날고, 돌을 빵으로 만들고, 물 위를 걷고
공부가 완전히 완성이 되면 어떻게 된다?
평범한 소시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죠.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일이 뭐가 있어요?
날아서 피하시면 될 걸.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그 상징,
나에게 주어진 내 삶, 그걸 어떻게 하신 거예요?
받아들이시고, 그 안에서 정점을 찍으신 거예요.
말씀하시죠.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분들이 계셔서, 예수님 얘기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살자”가 아니라, 이렇게 살게 돼요.
이렇게 그걸 척도로 삼고 나아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그 외에 관념이 변할 때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느냐?
이런 거는 그때그때 달라요.
다른 데 진짜 자기가 알게 되고
더 이상 영향받지 않게 되고
그랬더니 오히려 삶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또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자 하는 마음에
요만큼의 거침이 없어요.
뭡니까? 마음껏 뭘 해요?
마음껏 새로운 어떤 삶을 그려요.
그리고 삽니다.
행동하게 되고.
되게 재미있는 게
마음이 깊어지면, 의식이 깊어지면은
물질을 멀리하고
세속적인 어떤 욕망이나 무언가가 되어야겠다라는
이런 것들이 사라질 거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게 이분법이에요.
이게 이분법입니다.
우리가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하고
진리의 차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게 같은 것이에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정확하게 같아요.
세속이 뭐가 되는 거예요?
세속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스승님들께서는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오신 분들이세요.
개중에 돌아오다가 조금 못 따라온 어떤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도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그런 존재는 아니죠.
스승으로서의 어떤 그런 역할을 또 하면서
다른 이들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그래서 전부 다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어떤 방점은
360도를 돌아온 상태라는 이 사실.
이게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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