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arnation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En_ 화(化), 된다는 뜻이고
carna_ 고기, 고기 육(肉)
tion_ 명사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Encarnation은 육화라는 뜻인데
육화라는 말은 고기화되었다 이 말이죠.
여러분
인간을 육이라고 불러요.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다.
그럼 몸뚱이화되었다 이 말이에요.
무엇이?
의식이.
그러니까 이 세계는 Encarnation이다.
육화된 세계다.
무엇이 육화되었는가?
의식이.
기독교적인 용어로는 성령이.
그러니까 어떤 의식인가?
깨달음의 급소
의식을
어떤 부분을 잡으려고 해요
의식이라는 말을 가지고.
그러니까 깨달음의 급소는
의식을 깨닫는 건데
이 의식을 어떤 부분을 가지고 의식이라고 하고 싶어 해.
왜냐하면 그래야만이 에고가 만족하니까
에고가 자신이 있으면서
대상으로 어떤 한 부분을 의식이라고 잡고 싶어 해요.
일반인들의 무의식적인 사고 패턴이
이분법적인 사고 패턴이 그래요.
그래서 못 깨닫는 거예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으려고 하는 자기가 바로 의식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우리는 에고가 아닙니다.
그냥 제가 단언 할게요.
우리는 에고가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한 생각하지 말아보세요.
여러분 누구예요?
누구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한 생각만 없으면
에고 아니에요.
한 생각이 에고를 만들어내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김 아무개인데” 하면
‘나는 김 아무개인데’ 하는 그게 생각이라니까.
그 생각이 없으면
이 세계가 나누어지지 않아요.
딱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이 없으면
이 세계가 나누어지지 않아요.
여러분, 생각하지 말고 이게 뭐예요?
‘생각하지 말고 뭐예요?’ 할 때
여러분이 답을 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생각을 안 하면
이 세계가 나누어지지 않아서
이거를 뭐라고 할 수가 없게 되니까.
지금 깨달음의 가장 포인트는
내가 있고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
이 구조 자체가 틀렸다는 사실.
그게 아니라
깨달음은 그냥 통으로 전체가 다 깨달음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깨닫고 나면
따로 깨달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전체가 깨달음이기 때문에.
깨달음이란 말은
의식이란 말이잖아요.
전체가 의식이기 때문에
따로 이것이 의식이라고 할 것이 없어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요, 지금 기존의
무의식적인, 이분법적인 사고 패턴으로
깨달으려고 하기 때문에
못 깨닫는다.
그러니까 이것이 한번 딱 돌아봐줘야 된다.
나도 모르게 내가 있고
그 내가 대상을 깨달으려고 하기 때문에
못 깨닫는다 이거예요.
그러면 대상도 의식이고
깨달으려고 하는 자기도 의식이라서
이 세계는 그냥 통으로 의식 하나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을 이제 듣다가, 듣다가
한 번 딱 이렇게 가슴을 치면서
탁 이렇게 들어와야 돼요.
그냥 통으로 하나다.
그러니까 타성일편, 이 세계는 한 덩어리다.
그것이 지금 깨달음의 조건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질인 자성을 이미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내가 욕을 하거나 내가 번뇌 망상을 피워도
그것들이 모조리 다 예외 없이
의식의 Encarnation
의식의 육화다.
현현이란 말도 쓰죠.
현현_ 드러났다.
불교적인 용어는 나툼, 아미타불의 나툼, 또 성령의 육화
이런 말이 다 같은 말인데
무엇이 그런가?
그냥 모든 것이.
그래서 이거를 나누어서 내가 취하려고 하는 요 습관 때문에
못 깨닫는다 이거예요.
내가 있고
이걸 대상으로 나와 대상으로 나누어서
이거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못 깨닫는다.
그래서 그 노력을 내려놓아 버리면
가만히 있으면 멀쩡하게 이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좀 참 이게 진짜 너무 허망, 너무 허무
개그 같아, 개그 콘서트 같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이거다 이거예요.
근데 이거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못 깨닫는다.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못 잡는다.
왜냐하면 잡으려고 하는 거기 때문에.
다시
절대로 잡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잡으려고 하는 이거기 때문에.
그럼 잡으려고 하는 이것이
지금 가만히 있으면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또 안다.
그냥 저절로 알고 있다.
이거다 이거예요. 그냥 이거다.
/그리고 그 자성의 상징이 옷과 밥그릇이다./
옷과 밥그릇은
사실은 이게 달마 스님으로부터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이어져 왔는데
옷과 밥그릇은
달마 스님의 전 재산이었어요.
스님들의, 출가 사문의 전 재산
옷과 밥그릇.
그걸 줬다, 이거예요.
근데 그것이 법의 상징이었다.
전 재산을 준 거니까.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데는 시간과 거리가 필요치 않다./
이런 대목에서 깨달을 수가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데는
시간과 거리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깨닫고 난 뒤 이후에
무의식적인, 이분법적인 습관을 항복 받는 데는
시간과 거리가 필요하다.
그건 현장에서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본질을 깨닫는 데는
시간과 거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나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나 거리가 필요 없다.
근데 시간과 거리가 필요한 건 뭐냐?
이 습관이 시간과 거리 때문에 생겼기 때문에
습관을 바꾸는 데는...
깨닫고 난 다음에는 습관을 바꿔야 돼요.
습관을 바꾸는 데는 시간과 거리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그걸 잘 살펴서
우리가 봐야 됩니다.
/나와 본성 사이에는 틈이 없다.
현상과 본질 사이에는 어긋남이 없다.
즉 이요, 돈이다./
즉_ 이코르죠.
돈_ 단박에, 시간이 없다는 뜻이지요.
즉은 공간적으로 즉이고
돈은 시간적으로 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나와 나 사이에
나와 나의 본성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뭘 말해요?
이 모든 것이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 복잡한 이분법적인 세계가 펼쳐지고
그 한 생각이 사라지면
시간, 공간, 모든 분별이 함께 사라진다.
생각 하나 때문에.
결국에는
생각 하나가 일어나서
이 모든 분별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각찰(覺察)
각찰하는 게 포인트죠.
각찰이 참 좋은 말입니다.
위빠사나의 사띠를 한자로 번역하면 각찰일 거예요.
대승불교에서 이 말을 썼거든요.
각_ 깨어 있다.
찰_ 살피다
깨어서 살핀다.
뭘 살피느냐?
자기 생각이
한 생각이 일어나서 이 분별 세계를
나를 만들고. 남을 만들고
좋다 나쁘다의 세계,
이거를 만들어 나가는
그 생각의 메커니즘을 깨어서 살핀다.
그게 익어지면
언젠가 스스로...
보세요.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내가 하는 행동이
에고가 하고 있다고 김 아무개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다가
각찰을 자꾸 해서 힘이 쌓이면
어느 순간
“어, 이거 모순이네.”
지금 보고, 듣고, 뭐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고, 욕하고, 또 망상 피우고 하는 이 모든 것이
김 아무개가 하는 거라면
진리는 모든 것이 한 개 진리의 나타남이라고 했는데
“이거 모순되네” 하는 자각이 온다, 이거예요.
다시
각찰하는 습관을
일상에서 각찰하는 습관을 계속 들여 나가면
그전에는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내가 한다고 하다가
어느 순간 그 각찰의 힘이 강해지면
“이상하다. 이거 모순이 아닌가?”
모순 깨달은 사람은
그런 에고는 없고
모든 것은 그 사람이 알든 모르든
한 개 의식이 인연따라 이렇게 드러나는 거라는 걸
바다가 파도 치는 것이라는 걸
예외 없이 모든 것이 물이라는 사실을
모든 분이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지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한다고 하면
이 모순을 한번 느낀다 이거예요.
그러면 한번 이렇게 핑그르 돌아
“어, 이거 뭐가 어긋났는데, 틀렸는데. 이 모순인데.
그러면 어떤 게 맞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한번
“아, 내가 지금 나라고 하는 이것이 착각이었구나.
내가 지금 나라고 하는
이걸 내가 하고 있다고 하는 이 무의식적인 이 생각의 패턴 자체가
이게 착각이었구나” 하는 딱 깨달음이
번개같이 한번 탁 오면
그때부터 사람이 안목이 그때부터 바뀐다 이거예요.
모든 것이 본질에 나타남이다.
이것을 통해서
이것조차도 본질의 나타남이다.
이렇게 되면
생각, 번뇌, 망상, 욕, 탐진치, 무엇이라도
다 이것이 나타난 것이라서
그것과 내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어지네 하는
자각이 온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누진통
누_ 새는 것이
진_ 끝나는
누_ 새는 것이
진_ 끝나는 신통
모든 것이 의식 하나가 나타나는
의식 하나의 Encarnation이라는 사실이
딱 한 번 자각이 정말로 정확하게 딱 오면
모든 것이 의식이 나타난 것이라서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라서
모든 것이 아미타불의 나툼이라서
더 이상 갈등이 없어진다 이거예요.
좋다, 나쁘다가 없어진다.
그러면 저절로 모든 것이 둥글둥글해지고
그러면 턱 앉으면
저절로 이 하나하고 이렇게 계합이 되는
화두하고 저절로 계합이 되어서 화두삼매가 저절로 떡 되는.
그러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진리 자체가 되는
더 이상 진리하고 나가 둘이 아닌
그렇게 타성일편이 이루어져서 살아가는 삶이 펼쳐진다.
핵심은
여러분이 자기의 모순을 인지해야 된다.
그러려면 각찰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거예요.
각찰하는 습관을 평소에 붙여서
일거수일투족에서 자기를 살피고 있어야
자기와 상대방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가
그 뿌리가 보인다 이거죠.
그래서 알아차리면 전환이 온다 이거죠.
여기서 한 번 큰 전환이 이렇게 일어난다.
그러니까 지금 그것을 한번
평소에 계속 자기를 보는 훈련
그게 수행이에요.
수행이
그 자기를 보는 훈련을
일상에서...
일상에서 자기 생각을 봐야 돼.
일상의 경계에서
자기 생각이 일어나는 걸 보셔야 돼요.
모든 것의 첫 출발은 어딘가?
각찰
일상에서 자기 생각 보기.
그러면 일상에서 각찰하면 힘이 붙으면 앉으면
생각이 고요해지면서 더욱더 성성하게 깨어 있는 것
그러니까 모든 것이 거기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그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우리의 본래면목, 본지풍광이라고도 해요.
본지_ 본래자리의
풍광_ 바람과 빛
참 좋은 말 아닌가요?
거기가 우리의 본지풍광이고
안심인명처安心立命處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이 생명을 잘 길러가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지금 익어 있는 사람이라면
선정에서 나와도 지금 이 자리가 그 자리다 이거예요.
앉아서 힘을 기르면
움직여도 그 자리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각찰은 더욱더 강해지고
각찰과 이 삼매력이 서로 도와가면서
더욱더 예리하고 강해져서
이 하나의 분명한 지금 삼위일체가
이 순간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어서
보는 것은 법신불이고
지금 보이는 것은 화신불이고
요 둘 사이에 교섭
순간순간의 교섭, 보신불이고.
그러니까 딱 법신불이 화신불을 이렇게 보고 있는
요게 찰나찰나의 에너지 교류
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신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염화미소라는 말이
이걸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공부가 딱딱딱 떨어지려면
첫 출발은 각찰_ 깨어서 살핀다.
뭘 살피느냐?
타겟은 생각
깨어서 자기 생각을 살핀다.
그러면 찰나찰나 간에 자기 생각은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어요.
그 힘이 길러지는 것
그리고 앉으면
딱 그 깨어서 보는 각찰의 힘은 강하고
생각은 사라지고
앉으면
앉아서도 처음에는 생각을 봐야지.
근데 이 힘을 기른 사람한테는
금방 생각은 고요해져요.
그러면 딱 요거 하나가
각찰하는 이거 하나만 남는다.
천하무적이 돼요.
거기에는 한 생각 일어나는 게 생(生)이고
한 생각 사라지는 게 사(死)라서
생사(生死)가 그 자리에는 없다는 것이 또 분명해지거든요.
깨닫고
깨달음의 힘으로
‘깨달음의 힘으로’는 뭐예요?
지금 말짱하게 깨어 있는 의식을 써라 이거죠.
지금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각을 가지고
찰_ 살핀다.
각을 가지고 살핀다.
살피는 대상은 문제
살피는 대상은 제가 뭐라 그랬어요?
생각
자 생각이 가끔 일어나요? 아니면 자주 일어나요?
“공부할꺼리가 없습니다.”
이 말 못 하지요.
공부할 거리는 많아요. 그죠?
그러니까 각찰을 하면 생각을 살피는
왜 각찰이 중요한가?
다시 한 번, 여러분 너무나 기본이지만
다시 한 번
기본이 중요해요. 기본이 중요하다.
왜 각찰이 중요하냐?
보세요.
의식이 생각을 각찰하죠.
맞아요?
각찰하면 할수록
생각은 약해지고, 의식은 강해져요.
맞아요?
이게 각찰의 힘이에요.
각찰을 하면 할수록
대상인 생각은 약해져, 점점점점 힘이 빠져.
그리고 각찰하는 의식은 점점점점 힘이 붙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
생력처_ 말은 힘이 빠지는 곳이
득력처_ 힘을 얻는 곳이다.
어깨 힘을 빼는 것이
운동 잘하는 비결이다.
힘을 빼는 것이 힘이 붙는 것이다.
이 포인트다 이거예요, 포인트.
그러니까 한쪽은 약해지고, 한쪽은 강해져요.
생각은 힘이 빠지고
각찰하는 의식은 힘이 붙는다.
그러니까 알아채야 돼요.
의식이 뭐라는 거를.
제가 죽비 듭니다.
이거예요.
딴 게 아니고
제가 지금 죽비 드는 이거.
그러니까 이거 못 알아들을까 봐
한 번 또 노파심에서
쳤어.
이게 다다 이거예요.
죽비를 들고 한 번 치는 것
저의 살아 있는 이것
그리고 이거를 보고 들으시는 여러분의 살아 있는 그것
이것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
이거는 어렵지 않다.
이거 진짜
제가 이 말 몇 번 해요?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으면
아 그러거나 말거나 뭐
결국은 알아
누가 이기는가 해보자 이거지.
지금 들고
이게 다다
정말로 이게 다다
이거 더 이상 없다.
그러니까 누가 이기는가 해보자 이거예요.
저의 의식이 이거를 들고
치고
여러분의 의식이 보고
듣고
이심전심 이것밖에 없다.
여러분 지금 공기 있어요? 없어요?
심호흡 한번 합시다, 다.
공기 있죠?
의식이 뭐냐?
공기예요. 그냥.
그냥 깨놓고만 할게요.
의식이 뭐냐?
그냥 공기예요. 공기.
공기가 의식이야.
의식이 어디 있어요?
공기가 어디 있어요?
꽉 차 있잖아요. 없는 곳이 없지요.
지금 이 공기가 의식이에요.
공기 속에 살지요?
맞아요?
무엇이 일어나도 공기 속에서 일어나죠?
이것도 공기 속에서 나타났고
소리도 공기 속에서 나타났잖아요.
공기를 우리가 다른 말로 뭐라고 하느냐?
이 공기를 각하(脚下)라 그래
각_ 다리 각
하_ 아래
다리 아래
여러분 이 공기를 이르기를
다리 아래라 그래.
사람들마다 다리 아래를 밟고 서 있다.
사람들마다 공기 속에 서 있다.
각하, 다른 말로
목전(目前)
사람마다 눈앞에서 살고 있다.
목전이 뭐예요?
지금 목전에 뭐가 있어요?
공기가 있어요.
그 눈앞이 지금 공기
그것이 자기의 성품이에요.
여기서 인간은 벗어나지를 못해.
의식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 공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제 말을 잘 소화하셔서, 착안을 하셔서
딱 자기 한 번 지금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자기.
몸을 느끼는 것
몸을 느끼는 것은
몸 안에 있지 않아요.
이 몸을 느끼는 것은
이 몸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은
몸 자체도 아니고, 몸 안에만 있지도 않다.
여기 꽉 차 있는 것, 이것이 안다 이거예요.
보통 사람들이 의식, 마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어떤 관념을 쥐고
의식 그래요
제가 의식이라는 말을 쓰면
제가 유튜브 듣는 분들은
여기 찾아올 때 대부분
“의식이 뭔지 알았습니다” 하고 오거든요.
근데 제가 보기에는
그분은 그 의식을 관념으로
의식을 관념이라고 해서 잡고 있어.
그러면 저의 답변은
비록 제가 유튜브에서 의식이라고 말은 했지만
“제 말에 속았습니다.
의식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면 질문할 수 있잖아요.
“의식이 아니면 그 무엇을 말한다는 말입니까?”
“공기가 말을 합니다”
할 때
이 사람이 생각하던 그 관념이 깨지면서
실제 공기를 봤다 이거예요.
여러분
눈앞에 있는 공기를 봤다
보여요?
지금 생생한 이것.
이걸로 꽉 차 있다, 이거예요.
우리가 “누구냐?” 할 때
몸이 아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거다 이거예요.
눈앞에 있는 이거를
원불교에서는 일원상으로 그리고
지금 각하니, 목전이니 하는 이런 말로 표현을 했다 이거죠.
지금 공기
공기를 보세요.
생명으로 꽉 차 있잖아요.
그거다 이거예요.
살아있는 이것.
의식이라는 말에 속지 마시고
의식이라는 말은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의식이라는 말에 따라가지 마시고
실제로 눈앞에 있는 이거를 보라 이거예요.
이거를 지금 보고 들이마시고 있는
지금 의식 속에서 의식을 마시면서 살고 있는
의식 자체가 생명이라는 것
공기가 생명이라는 것
제 본문을 들으면
제 본문을 말로 따라가지 마시고
제 본문에 실제 낙처를 봐야 된다.
그럼 낙처라는 것은 사실
지금 눈앞에 있는 공기가 의식이라고 하는 이 사실
그러니까 이 공기를 보는 눈을 길러내면
이 개념 따라다니는 것이 멈춰지고
분명하게 눈앞에서 이거를 보려고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이거예요.
그래야 공부의 향상이 있어요.
생각으로 공부하는 것은 힘이 없다.
그 생각이 가리키는
그 단어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낙처
이것이 자기한테서.
그러니까 의식하면
이렇게 딱 자각이 되게
하나하나가 자각이 되게 공부를 해야지
힘이 붙어서 자기 것이 된다.
이걸 강조하면서
오늘은 마치겠습니다.
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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