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제목을
‘각성의 체득’ 이렇게 했네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죠?
첫 번째가 색성향미촉법
소위 말하는 육경이라고 해서
색성향미촉법
모양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각과 생각 감정을 통해
순수 의식을 자각한다.
이제 들어옵니까?
자각하는 방법은
회광반조
뭘 보면 돌려서
돌리면 의식이, 저걸 보고 있는 의식이
내 머릿속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전체가 확, 전체가 다 의식이라고 할
그때까지 넓어지지요? 실제로.
두 번째 열린의식
이게 확 넓어지기 때문에
열린의식 속에서 일체 현상이 지각된다.
이것도 들어옵니까?
보고 돌리면 의식이 깨어나서 확 넓어진다.
그럼 넓어진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지각된다.
3번은 이거를 경험하고 있는, 지각하고 있는 것은
진여, 변하지 않는 의식이 본질인 깸이고
이거는 깨어 있는 거고
그리고 펼쳐지는 것은 꿈같이
생멸하기 때문에 꿈이라고 하는 거예요.
생멸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서
꿈 같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진여인 깸이 생멸인 꿈을 경험하고 있다.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예요.
이 순간에도 여러분 자신은 진여고
저는 여러분의 꿈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죠.
여러분이 지금 저의 말을 경험하고 계세요.
네 번째 의식은 에고의 욕망 없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의식이 현상을 경험하면서
“아, 나는 불생불멸의 진여인 깸인 의식인데
현상은 생멸하는 이게 꿈이기 때문에
여기에 집착이 자동적으로 사그러든다.
그냥 없어진다고 하는데 좀 가혹하네.
점점 집착이 줄어든다.”
자, 의식은 ‘에고의 욕망 없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이때 제가 ‘에고의 욕망 없이’라는 말을 넣었어요.
그전에는 의식이 깨어 있지 못할 때는
에고의 욕망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못 보고
에고의 선글라스의 컬러로 물드는 현상을 본다.
돼지 눈에는 돼지 세계로 보이고
이거 벗어 던지면
의식은 에고의 욕망이라고 하는 선글라스를 벗어버리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다섯 번째, 이건 첫 시간에 말 안 했던 거네요.
보세요.
이 경계 현상이
의식이 각성되기 전에는
이게 번뇌의 대상이에요.
나로 하여금 좋다 싫다 해서 지지고 볶는 그런 경계 대상이었는데
의식이 깨어나서 보니까
이 경계 현상은
경계 현상을 돌려서
그것으로 인해서
돌려서 의식이 자각해서 보면
이 세계가 깨어 있는 의식 공간 속에
꿈 같은 현상이 생멸하고 있어서
2개를 함께 보게 하는 중도 정견의 지혜를 눈뜨게 한다.
그러면 중도 정견의 지혜를 우리가 가지려면
현상 없이는 시작이 안 되지요.
현상 없이 텅 빈 공만 있으면
그 텅 빈 공은 지각되지 않아요.
그래서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동안에는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할 때는
번뇌망상으로
나로 하여금 괴로움에 빠뜨리게 하는 경계 현상이
이제는 변해서
그 경계 현상으로 인하여
의식이 자각되고, 넓어지고
그리고 모든 것이 의식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이 바탕인 의식 공간과
거기서 나타나는 삼라만상을 같이 보게 하는
중도라고 하는 지혜가 발현된다.
큰 전환이죠.
번뇌의 대상이 지혜의 대상으로 변한다.
중요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게 변하지 않는 사람은
고해에서 허덕이다가 가는 거고
그리고 이 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여기서 중도 지혜를 발현해서
부처의 눈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니까
이 세계는 극락정토로 바뀐다 이거예요.
이 세계가 극락정토로 바뀐다.
놀라운 변화가 이거 하나로 일어납니다.
다음에 제가 중도하고 은현동시라고 했네요.
중도를 나타내는 말이 ‘쌍차쌍조’니 말이 많은데
‘은현동시’도 굉장히 좋은 말이에요.
은_ 숨어 있을 은
현_ 드러날 현
숨어 있다는 것은
의식 자체는 눈에 안 보여서 숨어 있어.
그 의식 속에
인연 따라 삼라만상이 드러나서 이거는 드러나 있어요.
은과 현이
숨어 있는 것과 드러나 있는 것이
동시에 지각이 되기 때문에
중도 분리로서 동시에 지각이 되어서
이게 지혜의 점수다.
중도불이 혹은 일심
한 개의 마음인데 이것이 본질과 현상으로
지금 동시에 같이 드러나 있다.
여섯 번째는 이렇게 되면 은현동시를 보는 나
나만 집으로 온 게 아니라
이때 집은 의식 공간이죠.
그러면 내 의식이 열려서 나는 지금 의식 공간에 지금 와 있어.
근데 이때 중요한 게
나만 의식 공간인 극락정토에, 우리 존재의 집에, 에덴동산에
온 게 아니라
내가 열리니까,
나의 열린 의식 속에 삼라만상이 같이 있죠.
삼라만상이 집으로 돌아와 있습니까? 아닙니까?
한 인간이 의식이 열리면
산천초목도 동시에 모두 극락정토로 오게 된다.
아이고 무섭네.
한 인간이 각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거예요.
한 인간이 각성하면
각성 된 의식 속에
전체가 함께 같이 와 있다.
그러니까 나만 온 게 아니라
모든 존재가 함께 와서...
여기 이 대목에서 여러분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이 끝이 없는데 모두 다 건지기를 서원합니다.
어떻게?
내가 의식이 열리면
일체중생이 함께 이 의식 속으로 들어오니까
다 도_ 건졌다.
도를 기독교 용어로 쓰면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한 인간이 각성하면
일체가 같이 구원받는다.
좋은 말 아닌가요?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끝이 없는데 모두 다 끊기를 바란다.
어떻게 끊는가?
번뇌가 전부 다 이 속의 일이죠.
번뇌도 법이 된다.
이때 법은
본질이 인연 따라 현상으로 일어난 것.
다시
법이란 말은
본질이 인연 따라 현상으로 일어난 것.
번뇌도 본질이 인연 따라 현상으로 일어난 것이 된다.
번뇌무진_ 번뇌가 끝이 없는데
모두 다 끊는다, 이 말은
누루, 샘이 없게 한다, 번뇌가 없어진다.
이 말은
의식 공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번뇌도 함께 구원받는다.
따라오시죠?
사홍서원四弘誓願이
의식 하나가 열리면서 이루어진다 이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지금 이 의식이 이렇게 열려 있어서
이게 천상천하를 다 이렇게 덮고 있어.
천상천하를 의식 하나가 지금 다 덮고 있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속에 있는 것은 모두 다 구원받았다.
아, 신나네.
사홍선원이 깡인 줄, 거짓말인 줄, 허풍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야.
내 하나가 눈이 딱 떠지면, 의식이 딱 각성되면
전체가 의식이에요. 그냥.
그러니까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는데
물만 의식이 아니라
전체가 다, 물고기 자체도 의식이다 이거예요.
예외가 없다.
7번은 그렇게 되면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항상 우리는 분별해요.
분별 중에서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안과 밖이 있어요.
안팎
안_ 대개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 감정이 안이에요.
그리고 밖_ 이 지금 삼라만상의 현상이에요.
요 안팎이 있어.
일반인들은 분별심에 의해서 선악과의 원죄에 의해서
대개 안팎이 있어요, 안팎이.
그런데 의식이 확 열려버리면 안팎이 없어진다.
이 말도 따라오십니까?
안팎이 없어지는 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 세계가 한 덩어리가 돼.
여러분
인류가, 적어도 인류의 반이
의식이 깨어나서 안팎이 없어지면
전쟁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불가능하죠.
지금 전쟁이 없어진다.
그리고 나와 남이라고 하는 이 안팎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주객이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평화가 온다, 평안이 온다.
중요하지 않나요? 인류에게?
인류에게 이 분별심을 극복하는 게 참 과제예요.
분별심이 언제 극복되는가?
의식이 깨어나서
이 전체가 1개 의식이라는 것
그리고 삼라만상은 1개의 의식이
인연따라 이렇게 드러난 것이라서
나무가
모양은 나무지만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그 이름이 나무고, 실제로 나무는 뭐예요?
의식이다, 이거예요.
약견제상_ 만약에 모든 모양을 보는데
그 본질이 의식이라는 것을
약견제상비상
모양 없는 거, 의식.
나무를 보는데
그 모양은 현상은 나무지만
그 본질은 의식이라는 걸 보게 되면
즉견여래_ 중도를 본다.
모든 것이 본질과 현상이 만나서 성립하고 있는
이 세계의 이 오묘한 실상
불가사의한 이 실상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안팎이 없어져서 무루가 성립한다.
샘이 없다는 것이 성립한다.
샌다는 건 번뇌잖아요.
경계가 없어지면, 안팎이 없어지면
번뇌가 없어진다.
생각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그 생각이 더 이상 분별 생각이 아니라서.
생각이 분별 생각이 아니라서
모든 것을 하나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월인천강
월_ 다리 천강에 비친다 할 때
달_ 본질인 의식
천강_ 천 개의 사물, 사물들
천 개는 많다는 말이에요.
하늘에 달이 뜨니까
땅에 있는 강물마다 달 도장이 다 찍힌다.
이 말은
한계의 본질이 이 많은 현상으로 나투고 있는 것.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한 개의 본질이 성령이니까
삼라만상은 성령의 역사가 되고
기독교에서는 본질이 아미타불이니까
삼라만상은 아미타불의 나툼이 되고, 나툼은 나타나.
그러니까 내 눈이
이 양쪽을 같이 상과 상, 모양과 성, 성품, 현상과 본질
상과 성,
상성, 성상을 함께 보는 눈이
중도의 눈이 갖춰지면
모든 것이 본질에서는 평등하고
현상에서는 대자유
다 개성 있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희한하잖아요.
모양은 모든 것이 다 개성 만점인데
본질에서는 완전 평등한 세계야.
광주 가면 무등산이 있죠.
등수가 없는
본질에서는 무등
등수가 없어.
1등 꼴등이 없어.
근데 현상에서는 있어요, 엄연히.
그래야 재미있지.
근데 이 둘을 같이 소화한다면
중도를 같이 볼 수 있다면
이 모든 게 자유와 평등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이 극락정토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보리가 되는 이 영적인 연금술이
번뇌가 깨달음이 되는
번뇌를 통해서 우리가 이 지혜를 깨닫는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하는.
그러니까 인생의 의미는 이거예요.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하는 것
이게 인생의 묘미예요.
/우리가 왜 태어났는가?
고통을 통해서 성숙하기 위해서/
그럼, 이 고통의 상징이
불교에서는 고해고
고해를 건너고
기독교에서는 고통의 상징이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
십자가를 통해서 에고는 한 번 죽고
그리고 우리가 이 중도로서 부활하는
죽음과 부활
그러니까 이게 지금 우리한테서 일어나는 게
인생의 목적이에요.
왜 태어났는가?
죽었다가 부활하려고
깨닫고 마음 치유하기 위해.
지금 우리들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8번은
그렇게 되면 의식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의식이기 때문에
일체가 법이 되는, 법.
다시 복습
법의 두 가지 뜻 법
첫 번째는 다르마, 진리
두 번째는 본질이 인연 따라 현상으로 일어난 것, 이게 법.
그러면 일체가 법이 되는 법안이 열려.
그러니까 ‘법안이 열린다’이 말은
중도의 눈이 떠진다.
따라옵니까?
모양과 본질을 함께 보기
현상과 본질을 함께 보기
모양 상자와 성품 성자를 바탕 성
모양, 상과 성을 함께 보기
드러난 모양과 숨어 있는 성을
상성相性
따라옵니까?
상과 성을
모양 상자와 성품 성자를 같이 보기.
항상 우리의 눈은 법안은
입체적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이 전체가 은현동시
상성 등...
즉자가 좋네, 즉.
상과 성이 즉하고 있는 것
지금 딱 붙어 있는 것.
동시에 상이면서 성인
죽비가 모양으로서는 상인데
이게 본질로서는 성품이다.
이거 의식 하나가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걸 보게 되면
일체가 법이 되는 법안이 열린다.
법을 보는 눈,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할 때 여래가 법이다.
법을 보는 눈.
그래서 이 중도, 정견이 열려서
그 말이 일진법계
이 세계는 한 개의 진실된 법의 세계
음미해 보세요. 따라 하세요.
일진법계一眞法界
이 세계가 온통 딱 하나, 한 개인 진실 된 법의 세계
이 세계가.
그러면 보세요.
이걸 아는 사람은 천국에서 사는 거고
모르는 사람은 지옥에서 사는 거고.
똑같은 장소인데
눈이 열리고 눈이 닫히는지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나뉜다.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일진법계에서는
정말로 이 세계가 일진법계가 된다면
여기에 자기가 있어요? 없어요?
자기라는 것이
기존의 개체로서의 자기는 없어지고
열려 있는 의식 자체가, 전체가 자기죠.
그 자기가 삼라만상으로 지금 이렇게 놔두고 있죠.
나타나고 있죠.
그러면 보세요.
나의 에고이즘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 보여.
제가 지금 말하는 ‘있는 그대로’는 참 아름다운 말이네요.
‘있는 그대로’ 보이는데
이걸 모르는 사람은 갈애에 시달리고 있어요.
갈애에 시달리고 있어.
상대방의 갈래가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내가 없으면, 에고이즘이 없으면, 내가 무아가 되면
눈이 밝아져서 전부 다 나의 분신인데
근데 이걸 모르고 상대방은
갈애에 시달리고 있어.
무명이 갈애를 일으키고 있어.
그러면 자비심이 생기겠죠? 자동적으로.
멀쩡하게 저분도 의식인데
자기가 의식인 줄 모르고 에고이즘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요.
에고이즘이 무명이고
에고이즘은 틀림없이 탐과 진,
탐은 탐욕, 진은 진에瞋恚, 미워하는 것.
탐진에 휩쓸리지 않는다.
왜냐?
탐진은 치에 의해서 나오니까.
근데 이 치가 무명이 명으로 밝아지면
이 모든 경제 현상에 대해서도
자동적으로 같이 지혜가 열린다 이거죠.
우리의 공부가
속세로부터 떠나자는 게 아니에요.
그 본질의 힘으로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이 세간에서
이 세간을 본래 천국인 것을 본래 천국인 것으로 돌리자는 거예요.
그러려면 눈이 떠져야 돼.
눈 중에서도 법안
법을 보는 안목
이게 지금 우리 공부의 목표예요.
그래서 한번 지금 자초지종을
오늘 다시 한 번 자초지종을 한번
여러분한테 쭉 설명을 드려봤어요, 그거 한번 써봤어.
그러니까 이거 여러분 음미하세요.
음미해서...
옛날 저는 그랬어요.
이걸 친절하게 또 사진 찍어서 지금 우리 밴드에 지금 또 다 올려놨어요.
그러면 한번 적어보는 거야.
조용한 공간에서 한번 쭉 한번
이렇게 한번 이렇게 듣는 거 하고
내가 적으면서 음미하는 거하고는 달라요.
나는 지금 몇 번까지 따라가는가?
여러분, 나는 지금 몇 번까지 따라가는가?
1번이 되는가?
소리가 났을 때, 소리를 통해서
소리가 일어나고 있는 바탕인 이 의식 공간이 자각되는가?
이것부터.
안 되면 자꾸 해야지.
그래서 모든 것이 공부예요. 그죠?
모든 것이 공부다.
여러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1번부터 8번까지 경계를 당할 때마다
1번에서 8번까지 쭉 가면 그 과정이 진짜 재밌어요.
이해돼요?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게 없어.
이게 나한테서 이루어지면
지혜가 증장되고, 사홍서원이 소화가 되고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보이면
이 세계가 한 개의 진실된 법계로 보이면
되게 재미있어요.
그러면 그 옛날
예수님, 부처님, 또 그 뒤에 대승불교 경전들
특히 화엄경 같은 것들
그런 걸 보면 소화가 된다 이거야.
그러니까 그런 것이 소화가 될 때 기쁨
이거는 시공을 넘어서
진짜 염화미소
법성게를 보고 내가 미소를 지을 수 있으면
나도 그런데
“내 심정을 먼저 사람이 이렇게 적어놨네” 하고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그 기쁨이 있어요.
--
/5조는 육조가 된 혜능에게 당부한다.
본심을 알지 못하면
진리를 배워도 이익이 없다고 간곡하게 일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선불교는
본심부터 알아라 이 말이에요.
본심부터 알아라. 이 말은 뭐예요?
소리 들리면
소리로 인하여
소리가 일어나고 있는 이 공간 자체가 의식이라는 것을
먼저 이게 본심이라는 걸 먼저 빨리 깨달아라.
말귀 알아듣고
그다음에 “아, 이거구나” 하고 확인하는 그것부터 먼저 해라.
그 이전에는 헛수고다.
아무리 공부해 봤자
본심을 알기 전에 공부는 이익이 없다.
본심을 알아야
그때부터 비로소 수행이 시작된다.
수행을 할 줄 알아야
이익이 된다,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 이 말은
눈이 떠진다. 이 말이에요.
/진리를 배운다는 말은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다./
이게 수행이라는 거예요.
/수행이 뭐냐?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다./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색성향미촉법에 회광반조하기.
다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터득하려면
색성향미촉법에 회광반조하기.
그래서 의식이 탁 열려버리기.
이게 이거를 수없이 반복한다.
이거예요.
한 번 의식이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수없이 반복해서 몸에 익혀야 한다.
그래서 이게 속도가 빨라져요.
속도가 빨라진다.
/그래서 일단 본심
즉 자기 본질을 알아야 한다.
본질은 의식이다.
의식은 지금 이렇게 보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6개의 감각기관 중에서
정보를, 바깥 정보를
100% 중에서 80%를 받아들이는 게 눈이에요.
그래서 지금 보는 이것에 대한 자각
그러니까 지금 색성향미촉법에서 계속 의식을 자각하면
결국에는 턱 보는 이것이 그냥 자각이 돼, 익어지면.
그래서 견이 성이다.
견성이란 무엇인가?
견성
본질을 본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보는 것이 본질이다.
다시
견성_ 성품을 본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보는 것이 성품이다.]
이 보는 것의 힘이 가장 강해요.
그래서 자각이
보는 것이 지금...
그러니까 ‘보는 것이 견성’이라는 성품이라는 걸 자각한 사람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아미타불이 내 눈을 통해서 보고 계시네.”
지금 보는 것 자체가 성령 체험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이 내 눈을 통해서 보고 계시니까.
회광반조한다, 이 말은
지금 보면서
보는 이것을
내가 자각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보는 것이 성령체험이고
듣는 것이 성령체험이고
냄새 맡는 것이 성령체험이고
맛보는 것이 성령체험이고
촉감을 느끼는 것이 성령체험이고
생각하는 것이 성령체험이고
감정 하나 떠오르는 것이 성령체험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보는 것이 아미타불의 이걸 뭐라 그러죠?
‘친견’이라는 말을 쓰네요.
다시
보는 것이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거고
아 좋다, 좋다, 시원하다, 통쾌하네요.
보는 것이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거고
듣는 것이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거고
냄새 맡는 것이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거고
맛을 보는 게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것이고
촉감을 느끼는 게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것이고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것이고
한 개의 감정이 떠오르는 것이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것이다.
이거 이상이 있을까요?
그러면 이런 경계 현상이 안 일어나는 때는 없잖아요.
그러면 언제나 매 순간순간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있다.
여기에 딱 만약에 실감이 난다면
천하무적 아닌가요?
극락정토를 왜 가요?
여기가 극락정토인데.
여기에 아미타불이 계신데.
지금 놀랍게도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이곳이
극락정토라고 하는 이 사실을 인지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첫 줄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나는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인이다.”
그게 지금 이 순간
턱
같이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 절대와 함께 있다고 하는 이것이
내가 감각적으로 느껴져요.
이 지족
만족이 채워진 거, 만족할 줄 아는 거.
이게 나의 갈애를 채워줘, 적셔줘요.
한 인간이 자기의 내면 아이의 갈애가 해결되면
다른 사람의 내면 아이가 보여요.
그럼 그 아이가 칭얼대고 있어.
자비가 나와요.
어떻게? 디테일하게.
이걸 그냥 자비가 아니고
그냥 자비, 혹은 그냥 내면 아이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자기가 치유되면
그 치유의 힘으로 남의 내면 아이가 도예요.
그리고 한결같이 칭얼대고 있어.
도와줄 수 있는 감로수가 나오게 되겠죠.
다시 한 번
자비란 곧 공감 능력이다.
나의 내면 아이가 치유되면
나의 내면 아이와 공감하면
그 공감의 힘은
나의 눈을 뜨게 해서
다른 사람의 내면 아이도 보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저절로 생긴다.
파장이 생긴다.
이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 사람이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치유의 힘이 생기겠죠.
그렇지 않나요?
요게 대승불교에서는 보살행이라고 해요.
그 보살행은 반드시
자기가 먼저 치유를 해 봐야 돼요.
이때 치유는 갈애의 해결이에요, 갈애.
갈애를 인격화시키면 내면 아이에요.
그 갈애의 습관이 인격화를 하면 내면 아이가 돼.
그 내면 아이가, 내 안에 있는 내면 아이가.
여러분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내면 아이를 누가 치유해 줄 수 있어요?
도대체 여러분의 내면 아이를 누가 치유해 줄 수 있나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 해요.
여러분이 하셔야 돼요.
근데 여러분, 보세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시다.
공감능력은 반드시 필수적인 과정이 있어요.
여기서 공감능력이 나와
이게 뭘까요?
퀘스천, 문제
여기서 공감의 능력이 자비가 생겨.
이건 뭘까요?
다시 말하면
자기 안의 내면 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지
그 내면 아이가 치유될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말로 한다면 자기 내면 아이를 경청하는 거예요.
진짜 우리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할 줄 몰라요.
왜냐?
쓸데없는 눈만 높아서
이상에 사로잡혀서
바깥에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 놓고
그거를 달성하려고 내가 노력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의 현실인 자기 안의 내면 아이를 외면하고 살아요.
이게 에고이즘이에요.
그러니까 진실된 공부는
지금 저한테 여러분이 호소하는데
“본질을 알았는데도 왜 이리 허무해요?
본질을 알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았는데.
본질을 알았는데 왜 이런 내면의 감정
이런 것이 왜 해소가 안 되죠?
오히려 더 우울해지고 왜 이래요?”할 때
문제는 바보야.
문제는 너가 본질에 취해서 너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거야.
적나라한 현실은 뭐예요?
인간의 적나라한 현실은
안에서 지금 울고 있다니까요.
오랜 습관인 갈애가 인격화되어서
아이가 되어서 내면의 아이가 되어서 칭얼거리고 있다고
그거를 안 듣는다 이거예요. 사람들이.
바깥에 큰 목표를 깨달음이니 뭐니 하는 걸 세워서
그쪽으로 달려가느라고
자기 안에 있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힘이 없다.
그러니까 공부가 본질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속에서 울고 있는
자기 안의 중생을 경청하는 힘이에요.
근데 이 힘도 어디서 나오는가?
결국에는 지금 이런 과정을 통해서
결국에는 자비가 길러질 때
그 자비라는 것이...
여러분
우리들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이 있잖아요.
자 따라 하세요.
본성= 자비
“내가 자비해야지” 한다고 자비 안 돼요.
본성이 깨어나야지 본성 자체가 자비에요.
이게 빛이에요. 빛.
빛은 밝음과 온기를 가지고 있어.
불은 밝음과 온기를 가지고 있어.
우리의 불성은 불이에요.
불은 밝음은 지혜고 온기는 자비예요.
역시 우리 안에 불성이 깨어나야
지혜와 자비가 저절로 나와.
그러면 그걸 가지고 자기를 치유해야 돼요.
그래서 깨달음 이후에 점수야.
돈오 이후의 점수는
자기 치유와 또 힘이 넘치면
그 경험을 가지고 남도 치유하기.
자타를 동시에 치유하기.
자, 그래서 오늘 재밌는 거 배웠네요.
쭉 하다 보니까 경청을 해야 돼요.
처음 경청의 1번 대상은
가장 가까운 것은
자기 안의 중생.
두 번째는 가족.
왜 웃으세요?
우리 말 안 듣죠?
경청력이 약하지요.
순서 다시
첫 번째 경청의 대상이 1번, 자기 마음
이때 마음은 생각 감정을 잘 들어야 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감정을 잘 듣기
잘 들으면 해결책이 보여요.
두 번째 자기 몸
자기 몸에서 끊임없이 몸이 이야기를 해요.
그 몸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돼.
경청하면
경청 자체가 자비이기 때문에
그 자비는 반드시 야수를 왕자로 바꿔줘요.
경청의 힘이 자비인데
자비는 뷰티, 미녀
미녀가 자기 안에 야수를 왕자로 바꾼다.
근데 이거를 실천하기
말만 듣지 말고 실천하기.
그러니까 오늘은 1번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8번 하고 9번까지 더 나가면
실천에서는 경청하기.
그래서 여러분,
경청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쪽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자꾸 보여요, 들려요.
점점 디테일이 강화돼요.
여러분 ‘모든 명품은 디테일에서 결정된다’
똑같은데
명품하고 이미테이션은
디테일에서 결정된다.
그러니까 정말로 마음공부가 제대로 되려면
큰 그림만 그리지 마시고...
큰 그림은 깨달음이에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큰 그림만 그리다가
10년, 20년 허송세월하는 거 많이 봤어요, 진짜로.
그게 아니라 정말 디테일하게
자기 마음 보고
자기 마음이 흥분하면 “왜 흥분하는가?” 보고
그래서 그것을 치유해 가는 것.
그럼, 그 힘이
사랑의 힘이 중생을 부처로 바꾼다.
그 사랑을
내가 나를 사랑 안 하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돼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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