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 8. 깨달음의 6가지 함정(5)

Buddhastudy 2023. 4. 19. 20:56

 

 

 

6. 진아를 찾아 무주가 되다

 

초기불교는 철저히 진아론을 배척했다.

진아론은 철학적으로 보면

존재론적 본체를 인정하는 주장을 말한다.

싯다르타가 이런 진아 대신 본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를 들고 나옴으로서

불교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후 대승불교가 출범하면서 다시 진아론이 대두되었다.

아비달마에 보면 자성을 인정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오늘날까지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어쨌든 힌두교의 아트만과 유사한 것이 대승불교에 나타났는데

이때의 진아는 엄밀히 따져 아트만보다는 그 의미의 폭이 커졌다.

 

 

아트만은 브라만의 작용적 측면을 강조한 개념으로

생각(정보)으로 얼룩지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말한다.

이는 참된 자아로 해석되기에 참나와 비슷하다.

이에 비해 브라만은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불변하는 실존의 개념이 크다.

불변수연에서 불변에 해당한다.

 

아트만은 브라만과 일체이지만 작용에 있어서 구분된다.

그래서 범아일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런 수고를 덜어준 것이 대승불교의 진아이다.

진아는 범아일여를 포괄함으로써 나를 실존과 직결시켰다.

쉽게 말해 힌두교에서

가아-> 아트만(참나)-> 브라만으로승화되는 것을

가아-> 진아로 압축했다.

진아에 브라만(실존)을 포함시킴으로써 힌두교와의 차별을 꾀한 것이다.

 

물론 불법을 떠받치는 대들보 중 하나가 제법무아이기에

진아라는 용어를 쓰는 것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본성, 자성, 불성, 여래장, 일심 등의 용어를 쓰는데

실존의 성품을 구체화함으로써 무아와 대비시킨 건 분명하다.

그렇기에 진아론은 대승불교에 깊게 내재된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자성즉불이다.

중생들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참된 자아

즉 진아가 부처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자신의 본성인 진아를 찾게 되면 견성이고

더 나아가 온전한 진아로 존재하게 되면 성불이다.

 

 

이제 대승불교의 교리는 힌두교의 3단계 시스템보다 간략하고 분명해졌다.

자신의 본성만 보면 깨달음이 열리니 말이다.

바야흐로 견성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고나 할까.

 

견성의 유행바람은 자연히 견성이 곧 성불이라는 등식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힌두교의 3단계 각성법에서 2단계로 줄인 것도 모자라

너무 단순하게 깨달음을 재단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래서 견성과 성불의 간격을 벌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견성 이후에 숙성의 과정을 두자는 것이다.

 

하지만 견성을 함으로써 이미 자신이 붓다임을 확인했는데

구차하게 무슨 과정이 또 필요하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것이 한때 꽤 화제를 모았던 돈오점수와 점수돈오

그리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이다.

 

 

그렇다면 이제 원론으로 돌아와서 진아를 찾으면 깨달은 것인지 살펴보자.

스크린에 비춰지는 화면이 나가 아닌 대상이란 건 누구나 안다.

그러면서 생각이 일으키는 정보의 이합집산에 깜빡 속아 그것을 나로 착각하며 산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희로애락이 영사기로 쏜 빛의 장난인 것처럼

우리네 생로병사 역시 생각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 자리한

다시 말해 진아를 찾으면 된다.

 

위빠사나를 하든, 참선이나 간화선을 하든

참된 자아만 찾으면 생각이 꾸며낸 고해는 잦아들어

한낱 스크린으로 전락한다.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머무름이 없게 되어

일체무애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진아를 찾게 됨으로써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깨달음에 관한 가장 그럴싸한 묘사라 하겠지만

여기에도 미진한 점이 남는다.

우선 생각에 대한 이분법적 태도부터가 그렇다.

 

생각을 타파해야 할 적으로 두는데

그렇게 흑백으로 가르면 절대로 생각의 문제를 풀 수 없다.

상대 세계는 그 구조상 대칭으로 접근하면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생각이 대폭 줄어들어 평화가 찾아와도

그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적당히 타협을 보고 안주한 것에 불과하다.

정전협정을 체결했다고나 할까.

 

계속해서 설명하겠지만

생각을 적으로 돌리는 순간 생각과의 전쟁은 이미 패한 것이다.

물론 혹자는 생각과 거리를 두고 관찰만 하는 위빠사나는 다르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생각을 대상으로 놓는 것 자체에 이미 부정적 의미는 포함되어 있고

그렇기에 상대 세계를 구성하는 대칭의 족쇄는 어김없이 작동한다.

 

그리고 머무르는 바가 없다는 무소주에 대한 것도 문제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어느 책 제목처럼

대개 생각을 멈추면 수행의 실마리가 생기는 것으로 안다.

다시 말해 일체의 집착을 끊고 무소주에 이르면

본성이 드러나면서 깨달음이 열린다고 믿는다.

 

하지만 생각을 하든 말든, 생각 더미에 푹 파묻히든, 아니면 생각을 일으키든

그 어디에도 깨달음은 없다.

물론 생각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게 되면서

영성이 회복되는 현상은 가히 놀랄 만하다.

영성이 밝아지면서 실존에 대한 이해 역시 깊어지는데

이것은 3차원의 틀이 깨지면서 오는 4차원 의식의 발현 때문이다.

의식에 놀라운 변화가 일기에 충분히 깨달은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

 

 

왜 진아를 찾고 무소주한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깨닫지 못하는가?

그건 새롭게 드러난 진아에 부지불식중 머무름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머무름이 없다는 무소주의 경지도 마찬가지이다.

머무름이 없어졌다고 아무리 외쳐도

이미 자신도 모르게 그 무소주의 경지에 또 머물러 있다.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상념이 작동하여 부지불식중 또 하나의 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상대 세계는 그 구조상 착을 떼면 또 다른 착에 붙게 되어 있다.

착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착이 있게 되면 실존(1원인)에 대한 진리적 자각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착을 동반한 기존의 깨달음엔 전지가 없다.

쉽게 말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이다.

 

실존의 자존성과 창조 원리를 철학 내지 수학적 논리로 풀어낼 수 없다면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로 묘사할 수 없지만

다행히 그것이 어떻게 스스로 존재하며 삼라만상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매우 정확히 기술할 수 있다.

이름하여 실존의 설계도이다.

이것의 득실에 따라 무상정등각의 성패가 나뉜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이유로 인해 지금껏 깨달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경지에 뭔가 부족함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대개 자신의 깨달음을 세존의 밑에 놓는 겸손함을 보인다.

 

앞서 말했듯 깨달음에 서열은 없다.

눈동자의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눈을 떴다는 사실은 같다.

이렇듯 깨닫는 과정과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깨달았다는 사실만은 동일하다.

 

그래서 불교는 절대 평등한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성취한 깨달음이 세존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깨닫지 못한 것이다.

너무나 가혹한 말이지만 무상정등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냉정해야 한다.

 

 

아무튼 상대세계의 패러다임에 의한 착으로 인해

수행자들이 말하는 진아를 찾았다, 무소주에 이르렀다는 오도송엔 깨달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은 것으로 믿고 싶은 마음만 교묘하게 감춰져 있을 뿐이다.

 

 

....

 

지금껏 깨달은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 6가지 유형을 언급해 봤다.

그외에 자잘한 것들도 많지만 대동소이하다.

이 정도면 아마 기존에 깨달았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이 포함되지 않았을까 싶다.

 

수행자들이 깨달음이라고 여기던 것들의 미진함을 다루다 보니

불교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하지만 불교는 의심과 논리로 대표되는 가르침이다.

'권위에 대한 모순'을 잣대로 기존의 이론을 진단할 줄 알아야 한다.

설사 세존이 직접 설하였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불교이다.

 

 

솔직히 경전에 나오는 세존의 말씀들은 대부분이 엉성하다.

'설마 세존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의심이 드는 대목도 즐비하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 보면

중생들의 수준에 맞춰서 한 것이니 거짓말이라 하지 않고 방편이라 한다.

 

보기 좋게 방편이라 부르지만

사실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초기경전]의 상당 부분이 세존의 말씀을 제대로 담고 있지 않으니

그 이후에 나온 [대승경전]들은 어떠하겠는가!

 

이런 점을 들어 불교가 사제 교리로 크게 훼손됐다는 비판도 많다.

어떤 학자는 [불경]99% 이상이 세존과 관계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고 지적한다.

 

한때 조사선에는 [불경]에 나오는 세존을 따르는 무리라는 뜻에서 여래선을 폄하하고

자신들은 세존 대신 조사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기도 했다.

심지어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을 치우기까지 했으니

이는 모두 [불경]에 대한 의심에서 기인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불경]에 세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불교의 생명력인 줄을 모른다.

 

 

세존은 불교에서 제1호 수행자이며 깨달은 자이다.

그가 만일 제2, 3..의 출현을 거부하고 숭배의 대상을 자처했다면 어땠을까?

불교는 세월의 흐름에 상관없이 늘 그대로였을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불경]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존은 깨닫는 자들이 계속해서 나오도록 가르침을 폈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은 자들이 꾸준히 나와 불법을 논하게 되고

이것이 쌓여 [불경]도 되고 조직도 바꾸고 수행 문화도 이끌게 되었다.

 

불교에 상호 모순된 것 같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함께 둥글어 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교의 커다란 자부심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나는 것처럼

불교는 대통부터 오늘날까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이처럼 세존이나 여타 불보살들만의 것이 아닌

깨달은 자들의 것이며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자들의 것이며

깨달음을 응원하는 자들의 것이다.

이들 모두의 염원이 한데 어우러져 오늘날의 불교를 이루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근세에 이르러 깨닫는 길을 잘못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 하나가 안타까워서 이렇게 냉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점이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겠다.

라마나 마하르쉬는 싯다르타와 같은 경지에 이른 수행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 그의 수행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의 수행은 깊고 한이 없어 진아와 절대, 그리고 해탈의 세 단어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금강경]의 주제인 응무소주이생기심에 딱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함게 나누고 있을까?

 

 

그 답을 이제부터 스스로 찾아보아라.

힌두교 수행의 최고 경지에 이른 라마나 마하르쉬

그가 이룬 경지와 앞으로 등장할 싯다르타의 세 스승의 경지를 비교하며

깨달음의 궁극이 어디인지 화두를 잡아 보기 바란다.

 

 

이제부터 세존이 걸어온 수행의 발자취를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한바탕 대청소하고자 한다.

깨달음에 불필요한 한설들을 걷어내고

단순명료한 불법만을 세우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