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289회 기도는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요

Buddhastudy 2013. 2. 20. 05:01

출처 YouTube

 

기도라는 말은 우리들에게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수대중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나보다 힘 있는 자에게 어떤 신이나 부처님이나 용왕이나 산신이나 어떤 존재에게 간절하게 빌어서 그들의 힘을 빌어서 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기도다. 즉 소원 성취하는 게 기도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다가 어려우면 기도를 해야 되겠다. 전에는 기도를 하니 잘되더니 요새 기도를 안 했더니 나태해지는구나. 이런 의미로 많이 쓰죠.

 

그래서 오늘도 불교적으로 말하면 팔공산 갓 바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성취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고, 또 오대 적멸보궁이라 해서 거기에 가면 소원성취가 잘된다. 즉 영험이 있는 도량이다. 이렇게 불리죠. 영험이 있는 도량이라는 게 뭐요? 원하는 바가 빨리 성취된다. 이런 얘기죠. 그래서 동해낙산사 옥련암이라든지. 남해 보리암이라든지. 서해는 뭐죠? 강화 보문사. 그죠? 보문사라든지 이것이 삼대 관음도량이다. 또는 아라한도량도 있고 지장도량도 있고. 이런 기도도량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험 하다고 알려진 것이고. 영험 하다는 뜻은 내가 바라는 바를 거기 가서 간절히 빌게 되면 소원성취가 이루어진다. 이런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기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이 세상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고,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행해지고 있고. 또 그렇게 기도를 해서 소원성취를 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험록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불교에도 영험을 받은, 그렇게 해서 병을 고쳤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았다. 또는 사업이 잘됐다. 이런 많은 것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종교. 기독교 같은 데서는 그런 경험들을 간증이다. 이래서 이런 예배가 있을 때마다 한 사람씩 나와서 간증을 하죠.

 

그런 얘기를 들으면 우리가 다 나도 저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을 깊이 우리가 관찰해보면 이 소원을 성취한다.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원하는 바기는 하지마는 그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뜻 아닙니까? 이 바라는 바가 바로 욕심이라고 할 수 있고, 욕구라고도 할 수 있고. 얻으려고 하는 거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죠. 그럼 바라는 바라는 것은 다 이루어지느냐?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면 좋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롭고 그러죠.

 

모든 사람은 다 그런데 바라는 바를 이루어서 기쁘려고 해요. 행복 하려고 해요. 이것이 천상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고통을 겪고 있는 세계. 이것이 지옥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이것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는 이 사이에서 고락을 행불행을 지옥과 천당을 돌고 돈다. 이걸 우리가 윤회다. 이렇게 부른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 천상에 나고자 하는 것은 즉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불교도 종교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불교의 다수는 바로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떠냐? 바로 이 고락은 고다. 이거야. 고락을 돌고 도는 데서는 고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 비록 그것이 락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곧 고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고락의 사슬. 윤회의 고리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이러한 괴로움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나야 된다. 이것을 해탈이라고 열반이라고 부른다. 이 고락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고락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바로 고락의 근원이 되는 욕구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즉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면 행복하다고 하는 이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바라는 바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바라는 바는 누구나 다 있다. 그 바라는 바를 따라 행하게 된다. 그러나 현상은 어떠냐?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의 좋은 일이고 이루어져도 하나의 좋은 일이다. 만약에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을 높여주는 그런 이치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실천을 해라. 이게 인과법의 원리다.

 

그런데 다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치도 필요 없고 이루기 위한 노력도 필요 없고, 그저 열심히 빌기만 하면 주어진다. 누군가로부터 주어지게 된다. 이것은 어리석은 행위고 이치에 맞지도 않고 또 실제로 다될 수도 없는 거다.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법, 담마라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하면 누구다 다 깨달음을 얻고 해탈한다 하는 법칙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그런 데서 이것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마는 해탈 열반의 길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고뇌로 벗어나는 길은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걸 내려놓고 여기 지금 발원이라고 했지만 이 발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이 정토가 되기를 내가 성불하기를 이런 게 아니잖아. 내가 바라는 어떤 욕구를 말하는 거다. 내가 바라는 어떤 욕구를 내버려놓고, 매진을 하면 그걸 우리가 발원이다. 이렇게 말한다. 발원은 그런 게 아니다. 바라는 욕심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고 그런 마음에서 원을 낼 때 그걸 발원이라고 한다. 발원이라는 말은 발보리심이다. 보리심을 발하는 걸 발원이라고 한다. 욕심내는 거를 발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거야.

 

그런 데서 우리가 오늘 보통 말하는 기도는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다수가 긍정하는 일이지마는 그러나 부처님의 법의 입장, 담마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은 그냥 중생 살이, 중생놀음에 불과하다. 그러면 해탈열반의 길인 이 기도는 어떤 것인가? 이건 기도라고 부르기보다는 수행이라고 부른다. 수행이라고. 그러나 기도라는 말에 수행이라는 의미가 없는 건가? 기도라는 말속에 수행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꼭 불교가 아니더라도 기도한다. 기도하는 마음할 때 그것은 경건한 마음이라는 뜻이에요.

 

뭔가 욕심을 내가 뭔가 이루려는 이런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경건한 마음,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오히려 내가 욕심이 지나쳤구나. 내가 내 생각에 빠졌구나. 내가 화를 냈구나. 이렇게 자기를 돌이켜보고,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아주 조심하는, 이런 마음을 가질 때 이걸 기도라고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렇게 기도를 할 때는 몸과 마음을 청결이 했습니다. 먼저. 그래서 몸을 청결이 하기 위해서는 목욕재계하고 옷을 갈아입고 이렇게 했고. 또 음식도 삼가고 여러 가지 부부관계도 삼가고. 뭘 삼가는 게 많았다

 

또 마음을 경건히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욕심을 내지 않고, 화내지 않고. 이렇게 해서 몸과 마음을 경건히 했다. 몸과 마음을 아주 조심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도록 그렇게 나갔다. 그럼 이때 불가능한 일이 가능했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바깥세상이 내가 원하는 데로 됐다는 의미도 좀 있지마는 그거보다는 내가 바깥세상에 대한 요구가 낮아지거나 놓여지기 때문에 마음속에 있는 모든 괴로움이 없어지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세운 소원의 방향대로 일이 되기가 훨씬 쉬워진다. 이렇게 경건한 마음 돌이켜 보는 마음. 이럴 때는 반드시 뭔가를 삼간다.

 

유명한 간디 같으면 이렇게 번뇌가 많고 일이 잘 안되고 힘들면 단식을 해요. 지하실에 가서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일주일이면 일주일, 열흘이면 열흘 단식을 한다. 일체 음식을 먹지 않고 그렇게 탁~ 명상을 하게 되면 내가 욕심으로 하는 것. 어리석게 하는 것. 성질을 내서 하는 것. 이런 건 다 없어진다. 그러고 정말 해야 될 것. 그거 배고픔 속에서도 꼭 해야 될 거. 밥 먹어야 되겠다. 이게 아니라. 배가 부르니까 뭐든지 욕심을 내는데. 배가 고파서 거의 죽을 정도가 됐는데도 정말 내가 민족을 위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이런 생각이 들겠어요?

 

배가 고프면 사람이 배고픈 생각밖에 안하고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만 한다. 이런 속에서도 놓여지지 않는 간절한 원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렇게 자기를 탁~ 무장을 시키고 아주 순수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밖에 나와서 운동을 한다. 그러면 첫째 자기 내의 오락가락하는 거를 없애서 자기 결심을 단단히 하고 두 번째는 그렇게 힘 있게 밀고 나가기 때문에 대중이 금방 동의를 하게 된다. 여러분 주의에 같이 있을 때, 누가 할까? 말까? 망설일 때 하고, ~ 확신에 차서 합시다.이렇게 할 때 하고 영향 받는 게 서로 다르죠.

 

이 경건이 해야 된다. 경건이. 바로 그 경건이 한다는 것은 자기를 돌이키고 자기를 뉘우치고 자기를 돌아보고 거울에 비춰보듯이 이렇게 하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수행의 단계다. 이래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이라는 말만 안 쓰고 기도라는 말도 같이 병용해서 쓴다. 기도문이다. 수행문이라고 그래야 되는데 기도문이라고 쓰거나 백일기도 한다. 이런 말을 쓰지마는 정토회에서 쓰는 기도는 후자적 관점이에요. 즉 수행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거다.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들은 우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됩니다.

 

그리고 법칙을 발견해야 돼. 그래서 그 법칙에 따라서 실천함으로 해서 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인연 과보의 법칙에 맞게끔 그렇게 정진하는 것을 우리가 정법에 귀의한자들의 기도다. 수행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수행할 때는 뭐 해주세요? 뭐 해주세요. 우리아들 요번에 대학시험에 걸리게 해주시고. 누구는 어떻게 해주시고. 이런 거 붙이면 안 돼. 이걸 발원이라고 그러는데 이건 욕심이에요. 이런 거 붙이지 마라 이거야.

 

오히려 아들이 공부한다고 얼마나 힘들까? 농땡이 치면 농땡이 치는 거 그것도 힘든 일이에요. 그걸 이해하고 현실에 맞게끔 지도해주고, 용기를 북돋워주고, 이렇게 해나가는 게 실질적으로 돕는 일이다. 그런 걸 하는 거를 우리가 기도다. 이래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습니다. 욕심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밝은 눈으로 하게 되면 원의 성취가 더 쉽고 빠르죠. 원의 성취는 무조건 버려라 가 아니라,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되도록 실질적으로 해라. 이거야. 요행으로 하지 말고. 누구 힘을 빌려서 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꾸 누가 와서 보채고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때도 있죠. 그런데 그렇게 도와주는 것은 작게 도와줍니다. 거지가 와서 달라고 그러면 푼돈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기 스스로 꾸준히 하는데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는 걸 옆에서 보고 ~ 저 사람 좀 도와줘야 되겠다.’ 이렇게 내 스스로 마음에서 발심을 할 때는 100원주고 1000원주고 이래 안 한다. 오히려 진짜 도움이 될 만하게 지원을 하지. 인간도 이렇다. 인간도. 그러니까 이런 푼돈 갖고 자꾸 구걸하지 말고 크게 자신이 원하는 바가 성취되는 그런 길을 가야 된다. 이것이 우리가 바람직한 기도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그 다음에 해탈열반의 길은 이런 것마저도 중생을 교화하겠다. 이 땅을 정토회로 만들겠다 하는 이런 것마저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거요. 좋은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그 정도 돼야 해탈할 수가 있다. ~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정진을 해나가니까 여러분이 자기를 돌이키는 것. 뉘우치는 것. 자기문제에 대해서 자기가 깨어있는 이런 공부를 해나갈 때 여러분은 붓다의 가피를 담마의 가피를 정말 입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