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밤에 몰래 스님을 찾아 가가지고 스님한테 좋은 가르침을 한마디 듣고 싶어 왔습니다. 이랬더니 이 나잔스님이 척~ 보더니 “말만 조심하고 사시오. 말조심. 말만 조심하고 사시오. 십 년만 말조심하고 잘 지내면은 제상이 될 것이오.” 이러더라는 거요. 예언이죠. 10년 후에 이입이라는 분이 나잔스님이 예언한 대로 재상이 되었대요. 그런 설화도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 스님을 서양의 디오게네스라는 사람이 알렉산더 왕 만났을 때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 유명한 말 전해지거든요. 이 사자보고 비켜서서 햇빛 가리지 말게 해 달라. 한 말이 똑같잖아요. 이래서 동양의 디오게네스다. 이렇게도 알려져 있는 스님이에요.
그래서 이 스님의 얘기. 그래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잔다. 아무 근심걱정이 없는 마음이에요. 이 마음이. 근심 걱정이 많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걱정을 하고, 잠을 자면서도 근심걱정 때문에 잠을 잘 못자고 뒤척이고. 이러잖아요. 그래서 번뇌가 많고 망상이 많은 사람하고, 번뇌가 없고 망상이 없는 사람하고 잠자는 거 밥 먹는 게 달라요. 그럴 거 아니에요. 청산녹수에 마음대로 소유하고 어천주막에 거리낌 없이 드나드네. 오늘이 며칠인지 내 알바 아니로되. 그런데 묘한 게요, 사람 마음에 생각이 안 일어나면 시간을 의식 못 해요.
잠잘 때 우리가 시간 의식 못 하지 않습니까. 잠 깨고 났을 때 시계를 봤을 때 내가 몇 시간을 잤구나. 선정 속에서도 시간이 의식이 안 되는 거거든요. 사람의 의식이 보통 우리가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이걸 육근이 육진 상대한다. 그러지 않습니까? 108번뇌 나올 때 육근이 육근을 상대해서 전부 보고 듣는 경계를 무심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으면은 객관경계를 대하면은 생각이 일어나요. 생각이. 우선 사물을 인식하는 그런 생각도 일어나지마는 그 생각이 일어날 때 감정도 따라 일어납니다. 느낌. 그래서 좋다, 싫다, 판단을 하게 되요. 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이걸 판단을 합니다. 중간게 또 있어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상태. 그저 그렇다. 세 가지로 판단을 해요.
생각을 일으켜 이 분별을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무심이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꼭 좋다, 싫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고 그저 그렇다. 세 가지로 그 감정의 갈래가 나눠집니다. 좋은 게 오래 계속 마음에 와 닿아 느껴지면은 즐거워져 버려요. 싫은 것이 오래 마음에 와 닿으면은 괴로워져 버립니다. 이럴 때는 즐겁다. 괴롭다가 되는 거에요. 그다음에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중간상태를 (버릴 사)자를 써서 사라 그래요. 사서라 그러는데. 그래서 누구나 경계를 대했을 때 좋다 싫다 중간. 그저 그렇다. 이렇게 판단을 하고 나서 좋은 것을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고 싫은 것을 통해서 괴로움을 느끼고. 중간,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사. 이걸 삼수라 하는데. 고락사. 세 가지로 받아들인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눈이 볼 때나 귀가 들을 때 딱 여섯 가지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6 x 6하면 36이 되요. 이36이 서른여섯 가지란 말 아닙니까? 다시 한 생각 일어날 때 과거 현재 미래 삼세가 나눠져요. 일념 속에서도 한 생각 속에서도 과거 현재 미래가 나눠집니다. 이래서 36 x 3하면 108이 되요. 이걸 108 번뇌라 하는 겁니다. 염주가 108 염주잖아요. 그래서 한알 한알 굴리면서 번뇌 하나 없애자. 이래서 108 염주 돌리는 거에요. 그런데 이 번뇌가 다 가라앉아 버린 상태에서는 그냥 해도 함이 없는 거, 이걸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무이심이라 합니다. 불교는 무이심이 돼야 된다. 이래요. 이래야 도인이에요. 이래야. 무이심. 무이심내기비심 천수경에 나오는 구절이 있죠.
다음 장에서는 선과 교를 또 다르게 말합니다. 앞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정의 내리듯이 해 놓은 말이 있었는데. 이 대목에서는 다시 교는 일심법을 전하고. 선은 견성법을 전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일심법.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 중심으로 얘기합니다. 이 세상의 근본 주제가 마음이에요. 인생사의 근본 주제는 마음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에요. 불교는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있다. 내 마음에. 마음에 있는 거에요.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마음이 어떠 하느냐? 이게 중요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일심법이라 그래요. 일심법. 마음을 모든 것을 다 좌지우지하는 이 세상의 주인이다. 이렇게도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에서는 이 마음에 대해서 말하는 걸 일심법이라 그래요. 일심법. 부처님 경전에서는 전부 일심법을 전한다, 이 말이에요. 불교를 공부하시는 분들은 이건 다 아시고 있는 내용이겠습니다마는 불교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불교를 계정혜 삼학으로 설명하는데. 계는 계율, 말하자면 윤리정신이에요. 윤리도덕정신. 그다음에 정, 선가구감의 선. 선정. 그다음에 혜. 그래서 계학, 정학, 혜학. 이걸 삼학이라 그래요. 사실은 이 삼학의 학력이 높아져야 되요. 요즘 학교 교육 많이 받은 분들을 학력이 높다. 이러잖아요. 보통 대학교도 가고 대학원도 가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고 학부까지 나오고. 이러면은 저 사람 학력이 높다. 이렇게 말하는데.
지식이 그만큼 좀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볼 수 있겠죠. 학력이 높은 분들을 두고 말할 때, 그런데 진짜 이 수행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계정혜 삼학의 학력이 높아야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불교를 처음 공부할 때는 계학에 대해서 배워야 되요. 계학. 윤리도덕정신이 재고돼야 된다 이 말인데. 여기에서 교리적으로 설명돼 나오는 법이 하나 있는데, 이걸 인과법이라 이럽니다. 원인과 결과. 세상 모든 일은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나타나고 결과가 있으면 그 원인이 반드시 있게 되고. 그래서 첫째는 인과법이라 그래요. 인과법.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인연법이라는 말이 있어요. 인연법. 인연이란 말이 아주 많이 쓰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게 인연소치다. 인간만사 세상만사가 전부 인연 소치다. 원인이 있고 직접적인 원인이. 그다음에 간접적인 조건 이게 수반된다. 씨앗이 있으면은 이 씨앗을 땅에 심어서 발아가 되도록 해야 싹이 나고 자라서 잎도 생기고 꽃도 피고 또 열매도 맺어지죠. 그러면 씨앗은 인이에요. 이 씨앗이 발아할 수 있도록 땅에 심어질 때는 땅속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땅속에 들어가도 수분도 공급이 돼야죠. 또 산소 같은 공기 햇빛도 필요해요. 그러면 그 씨앗이 싹이 트도록 조건이 따라야 된다 이거에요. 이걸 연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일이 전부 인과 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연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요. 때를 놓고 말할 때는 시절인연 이런 말도 있고요. 꽃이 봄에 피는 것은 봄에 피는데 또 어떤 꽃은 다른 철에 피거든요. 여름에 피는 꽃도 있고, 가을에 피는 꽃도 있고. 또 겨울에 피는 꽃도 있어요. 그러면 꽃이 왜 저마다 꽃마다 피는 때가 다른가? 이런 걸 시절인연이라 하는 거에요. 그래서 불교는 교리적으로 설명할 때 주축이 되는 말은 인연법입니다. 연이란 말이 결국 인연이란 말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인과법이 있고 인연법이 있고. 여기 나온 일심법이 있어요. 그래서 불교를 이 세 가지 말만 기억하고 있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과법, 인연법, 일심법. 이 세 가지 말만 기억해도 불교를 이해할 수 있어요.
사실은 부처님께서 설해 놓으신 전체 법문. 팔만대장경에 있는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바로 인과법, 인연법, 일심법인 것인 것입니다. 이게 교, 경전을 공부하는 쪽에서 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에서는 일심법이 제일 위에 있는 거니까 교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다 묶여서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선은 견성법을 잘한다. 선은 성품자리를 보는 거. 자기 마음이 성품으로 말할 때 자성이라 이럽니다. 자기 성품. 그래서 견성성불이라는 사자성어도 많이 쓰여 진다. 말씀드렸죠. 그래서 교문에서는 오직 일심법을 전하고, 선문에서는 오직 견성법을 전한다. 이게 선교의 차이에요. 이 장에 와서.
앞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한 말을 이 장에 와서 다른 말로 다시 한 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일심법과 견성은 일심법할 때 일심과 견성법할 때 견성은 만법의 근원이 마음이라 설명하는 불교의 대의다. 흔히 삼계가 오직 마음이다. 삼계유심이라는 말을 자주 써요. 또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 일체 유심조. 화엄경에 나오는 얘깁니다. 또 화엄경에 보면은 마음을 화가에 비유해서 설해 놓은 말이 나옵니다. 경 구절이.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心如工畵師심려공화사 能畵諸世間능화제세간이라는 경전 구절이 있어요.
또 전 시간에 소개했습니다마는 대승기신론이라는 책에서는 대승불교를 가장 잘 정리해 놓은 논설인데 이 책에서는 마음이 곧 법이다. 마음이. 이것 꼭 기억하고 있어야 되요. 이 말은. 마음이 법이에요. 이렇게 말하는데 선은 무엇보다도 설명 듣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선은. 설명 듣고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내 마음을 내가 확인해야 된다는 거요. 이게 참 어려운 일이죠. 내 마음을 내가 어떻게 확인해요. 내가 누구냐? 불교는 선에서는 바로 이거 질문하는 거에요. 이걸 화두로 바꾸어 말할 때는 ‘이 뭣꼬.’ ‘시삼마.’ ‘내가 누구냐?’ 자기 정체. 이걸 확인한다는 거에요. 이걸.
본다는 말은 눈으로 직접 보듯이 본다는 거거든요. 확인하는 거에요. 내가 나를 확인하는 방법은 선법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해하셔야 되요. 예를 들면은 음식 맛에 대해서 누가 설명해준다. 그 참았다. 먹어봐라. 달콤하고 시큼하고 육미를 가지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나 아무리 설명 들어봐야 그건 맛이 어떻다는 이걸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는 없는 거에요. 음식을 하나 주면서 먹어 봐. 입에 넣고 먹어 보면은 그냥 맛이 확인되잖아요. 내 입에 음식이 들어왔을 때 그때 맛이 확인이 되는 거에요. 그것이에요. 견성이란 말이. 그것. 마음이 이렇다저렇다. 설명해봐야, 맛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는 거와 같은 것이고. 마음 정체를 확인하는 거는 선의 목적인 견성을 해야 된다, 이거에요. 견성을. 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견성이라는 거는 하나의 직관적인 거에요. 직관적인 거. 그래서 이론이나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거, 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선사들의 선 법문은 바로 견성을 목표로 해서 설하는 거에요. 깨달음을 바로 직관적으로 터득하도록 방편을 써주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게 간화선인 경우엔 화두가 나오는 거에요. 다음 대목에서는 부처님 말씀과 조사의 말씀이 다른 점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설해놓은 말씀 하고 역대 선수행을 위주로 한 선사스님들 조사스님들의 말씀이 다르다는 거에요. 뒤에 가면 부처님 말씀은 활등과 같이 설했고. 이걸 설궁이라 이럽니다. 조사의 말씀은 활줄과 같이 설했다. 설인. 이런 말이 또 나오죠.
무슨 말이냐 하면은 활이 있잖아요. 활등은 이리 굽습니다. 활줄은 곧거든요. 그래서 부처님 말씀은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을 한단 얘기요.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전 시간에 말씀했듯이 때로는 있다고 가르치고, 때로는 없다고 가르치고, 때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상용법문을 설하기도 하고 공용법문을 설하기고 하고 성용법문을 설하기도 하고. 이렇게 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설해놓고 나서는 부처님 말씀도 마지막에는 공을 설해요. 여기도 보면은 뒤에는 필경 공을 설한다. 더 이상 말할 것 없는 공의 이치를 설한다, 이거에요.
그런데 조사스님들이 보이신 가르침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어. 그래서 임제스님 같은 경우에는 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 이걸 할이라가 그래요. 임제할. 또 덕산 스님 같은 경우에는 선종사에 전해져 내려옵니다마는 물으면 몽둥이를 가지고 사람을 두드려 패요. 아니 질문하는데 이 몽둥이를 가지고 사람 때리는 법이 어딨어요. 임제스님은 황백선사 밑에서 세 차례에 걸쳐 스무 방망이씩 60 방망이를 두드려 맞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걸 이제 격식을 초월해 있는 격의 도리. 그래서 선사들 가르침은 아까 맛 가지고 이야기했듯이 음식을 먹어봐라. 주는 거에요. 설명을 안 하고.
그래서 직관적으로 뭔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특별한 방편을 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조사가 가르치는 그 말은 의지의 자체가 끊어졌다.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이치가 마음 근원에서 드러난다. 마음을 얻는 것이 선이다. 앞서도 전 시간에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선을 이해해야 불교를 더 경전도 선을 이해하면서 깊이 이해를 해야 돼요. 그래서 불교를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심층종교라고 말하는데, 심층종교는 근본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오늘도 시간이 벌써 다 되가지고 여기까지 마치고. 다음 주에 또 계속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일 동안 또 잘 계시기 바랍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