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수다원이 되면 달라지는 세 가지 중 첫 번째가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긴다는 거죠. 여러분들 같으면 내가 한 천억 줄 테니까 불법 포기하라 하면 하겠어요? 진짜입니까? 막상 주면 마음이 달라지는 거 아니에요? 허허. 그래서 이건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진다는 게 있고요. 또 하나는 계를 지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자가 된 존재는 의도적으로 계를 파하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고의적으로.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내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인다거나. 고의적으로 내가 도둑질을 한다거나,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한다거나. 또 고의적으로 삿된 음행을 한다거나. 재가자들 같으면 간통을 하는 거겠죠.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이게 수다원이 되면 달라지는 거죠. 이거에 대한 좋은 예가 있는데요. 부처님 당시에 쿠주따라라는 재가여신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래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왕의 심부름으로 왕비한테 꽃을 매일 사다 주는 그런 일을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매일 왕이 돈을 얼마 주면 그걸 꽃가게 가서 꽃을 사서 왕비에게 갖다 바치는 그런 일을 했는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삥당하는게 있는 거죠. 이 사람이 원래 왕이 여덟 냥을 주고 그걸 꽃을 사라 그랬는데, 여덟 냥을 다 산 게 아니라 네 냥은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네 냥만 사서 맨날 꽃을 사다 바친 거예요.
그러다가 이 여신도가 마침 그 꽃장수집에 부처님이 대중공양을 오신 거예요. 공양초청을 받아서 거기 공양을 하시고. 거기서 법문하는 걸 듣고. 그 법문 들으면서 수다원이 됩니다. 깨달음을 얻게 되죠. 수다원이 되요. 그 깨달음을 얻고 나니까, 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절대 거짓말을 못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걸 위해서. 그래서 이 왕비한테 가서 여덟 냥을 받았으니까 여덟 냥 어치를 사갔겠죠. 그죠? 평소에 오던 거보다 꽃이 두 배가 많은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예전 같으면 왕의 돈에 손을 댄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잖아요.
바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자기가 법을 알고 나서, 그러니까 수다원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설사 죽음이 오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왕비한테 가서 꽃을 두 배로 사가면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동안 제가 좀 슬쩍했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 보통 지혜가 없는 왕비 같으면 오히려 혼을 내고 죽이거나 그랬을 텐데, 그러면은 네가 얻은 법이 뭐냐? 나에게도 가르쳐달라. 그렇게 해서 구쭈따라라는 사람이 부처님한테 법문을 듣고 오면 왕비한테 계속 전해 주는 거에요. 이래가지고 왕비의 어머니, 법으로서의 어머니다 이래가지고, 아주 유명한 구쭈따라라는 이야기가 법구경에 아주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수다원이 된 존재는 자기 목숨이 위협을 받더라도 절대 계를 어기지 않는다는 거죠. 이게 다른 점입니다. 보통 사람들하고. 그래서 이 네 가지가 확고하다면 절대로 이 사람은 부처님께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 사람은 수다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그런데 이거를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면 수다원이 되면 번뇌가 놓아질 아니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번뇌들 중에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어간다는 것은 번뇌가 점점점점 버려지고 놓아진다는 건데, 수다원이 되면 놓아지는 게 일단 삿된 견해가 없어집니다. 그때부터 내가 있다는, 나가 있다.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견해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법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리고 열반을 얻었는데 뭐가 질투가 나겠어요? 그죠? 뭐에 대해서 인색하겠어요? 그러니까 수다원이 된 존재가 사라지는게 질투심과 인색함. 이런 것이 영원히 사라집니다. 이게 수다원이라는 존재가 되면서 달라지는 거다. 이게. 아까 말했듯이 보통 보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막행막식하고 이런 경우는 그걸 좀 착각할 수도 있는데, 적어도 부처님 경전에 따르면 성자가 된 존재가 계를 함부로 어기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거에요. 절대로. 성자가 될수록 오히려 계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게 여러분들이 꼭 명심해야 될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정말 자기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안 얻었다는, 이런 번뇌가 얼마나 소멸했느냐? 정말 내 마음에 있는 오염원들이 얼마나 녹아내렸느냐? 이런 걸 갖고 생각해야지, 내가 뭐 날아다니면 뭐할 겁니까? 그런 신통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죠. 신통 얻은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지금 비행기 타고 다니는 사람은 다 깨달았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번뇌, 우리를 괴롭게 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번뇌소멸이 불교에서는 상상 깨달음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부처님은 항상 열반이란 뭐냐?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이라고 그랬거든요. 그거를 좀 이해하는 게 좋구요.
그리고 두 번째 수다원이 되고 나서 다음에 깨달음이 만약에 또 한 번 더 일어나게 되면, 일래(一來)과라 그럽니다. 사다함. 수다원이 된 존재는 놀아도 일곱 생 내에는 아라한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윤회를 해도 최대 일곱 생만 윤회를 해도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일래과란 딱 한번, 그러니까 한번 윤회를 한다는 뜻은 아니고요, 한번만 욕계나 인간 세상엔 딱 한 번만 돌아온다는 거죠. 그 다음부터는 색계나 높은 세상에 태어나서 거기서 열반에 드는 존재를 일래과라 그러고요. 일래과가 되면 두 번째 한번 돌아온 존재에게는 달라지는 게 뭐냐 하면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아주 엷어집니다.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과 성냄은 없어지고 아주 미세한 것만 남고.
세 번째 불환과. 불환이라는 거는 어디에 안돌아온다는 뜻이겠어요? 욕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계나 욕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존재가 되구요, 욕계로 안 돌아오면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아라한이 되는 존재가 불환과입니다. 이 불환과가 되면은 더 이상 감각적 욕망이나 성냄이 없어집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가 와서 옆에서 꾀어도 절대 안 넘어간다 이거죠. 왜냐하면, 그거는 감각적 욕망에 해당하잖아요. 그죠? 이 감각적 욕망이 완전히 없어지는 존재가 아나함입니다. 불환과. 그리고 절대 성을 안냅니다. 성을 안낸다는 거는 이 사람에게 목에다 칼을 대로 칼을 대서 두려움이 얼어나면 그게 뭐에요? 두려움도 일종의 성냄이거든요. 그런 게 없다는 거에요. 아나함만 되도 절대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다는 거죠.
그리고 아무리 아름다운, 또는 아무리 뭔가 좋은 거로 유혹을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는 것이 감각적 욕망. 감각적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죠, 그죠? 욕계라는 곳이 감각적 욕망이 주된 세상이기 때문에 이거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다시는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래서 불환과가 되면은 보통 사람하고 확실하게 달라집니다. 수다원과 사다함은 좀 저 사람이 깨달았나? 안 깨달았나? 약간 의심을, 헷갈릴 수도 있지만. 불환과에 도달한 존재는 감각적 욕망, 우리가 보통 가지고 있는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성을 안낸단 말이에요. 절대로 이 사람은. 그러니까 크게 달라지죠. 그 나머지 번뇌는 아라한이 되면서 다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아라한이 돼야만 사라지는 번뇌가 뭐냐 하면 어리석음. 어리석음이 그 만큼 질기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까 감각적 욕망은 사라졌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존재에 대한 욕망이라고 하거든요. 이 존재에 대한 욕망은 아라한이 안 되면 안 사라집니다. 이것도 끝까지 가요. 우리가 아라한이 돼야만이 사라지는 번뇌라고 할 수 있고요. 그리고 해태 혼침 게으름. 뭔가 좀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이 게으름도 아라한이 돼야 완전히 사라진다는 거죠. 그 만큼 이것도 아주 고질적인 번뇌라는 뜻이죠. 그래서 이 아라한이 되면 아까 말했듯이 예류과, 수다원이 되면은 일곱 생 내로 아라한이 된다. 그랬고요, 일래과. 사다함이 된 존재는 딱 한 번만 욕계로 돌아왔다가 아라한이 되는 존재가 일래과고, 불안과는 다시는 욕계로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서 아라한이 되는 존재가 불안과고. 아라한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죠.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경전내용을 죽~ 보다가 아라한에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항상 공통적으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이 구절입니다.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여기 보면 뭐라고 돼 있어요? 태어남은 다했다. 그리고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그래서 우리가 아라한을 다른 말로 뭐라 그래요? 무학이라 그러죠. 무학. 배울게 없단 말이에요. 더 이상. 그래서 무학이라 그러고.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게 경전에서 아라한의 얘기할 때 항상 똑같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마치 노래 같은데 보면 후렴구 있잖아요. 노래 부르다가 후렴은 계속 반복되는 거 있죠? 그런 것처럼 경전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구절을 정형구라고 그럽니다. 정형구. 그러니까 아라한에 대해서 설명할 땐 똑같은 언어로 똑같이 언급이 돼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이 말은 더 이상은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고. 청정범행이 완성되었다. 이거는 모든 번뇌를 다 놓았다 이 말이죠. 더 이상 오염된 마음형태가 없어졌다는 뜻이고 할 일을 다 했다. 수행으로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할 일은 없어요. 이 분에게 남은 것은 남을 도와주는 거라든가, 이런 거 밖에 있을게 없어요. 그리고 다시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요. 그리고 아라한이 된 존재는 아라한의 뜻이 뭐에요? 은공이라고 들어보셨죠? 그죠? 이 아라한이라는 뜻 자체는 번역을 하면 응공이라는 뜻인데요, 공양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공짜로 밥을 얻어먹고 살아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아라한이 되기 전에 왜 밥을 얻어먹는 거는 우리같이 빚지고 사는 거죠. 계속 공짜 밥을 얻어먹으면 빚을 지고 산다고 하는데. 이 아라한이 되면 빚지는 게 아니고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거죠. 그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또 그 공양을 한 사람에게 굉장히 큰 복을 돌려줍니다. 성자가 된 존재들은.
그래서 우리가 보시를 했을 때 한 밥 한 그릇을 누구에게 만약에 보시를 했잖아요? 그러면 보통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했을 때 짐승에게 보시를 하면 그게 100배의 과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시를 했다면 보통사람한테 해도 천 배의 과보가 있다 그래요. 그런데 성자들, 지금 말한 성자들에게 보시하는 공덕은 셀 수가 없다 그랬어요. 무량한 공덕이 있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성인류에 들어간, 성인이 된 존재들은 비록 남들이 주는 공양을 받아먹고 살지만, 그 공양을 한 사람에게 굉장히 큰 복을 돌려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거죠. 특히 아라한 같은 경우는 충분히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거죠. 충분히.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겁니다. 이 아라한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그래서 이 아라한이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수행은 내려놓는 과정이라 그랬는데, 아라한이 되는 순간에 모든 번뇌를 다 내려놓습니다. 이때부터는 더 이상 업을 짓는게 없어요. 우리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선업이나 불선업이라는게 있잖아요. 선과 악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는 순간부터는 선악이라는 개념이 사라집니다. 이때부터는 뭐라고 하냐하면 작용만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선과 악의 이런 개념이 아니라 업이 없어지고 우리가 선사어록 같은데 보면 허공을 나는 새처럼 흔적 없이 간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라한은 무슨 행위를 해도 업이 안 되는 거에요. 업이 안 되고, 그냥 이거는 작용만 하는, 그냥 그 상황상황 맞게 행동하는 거 밖에 없다.
그래서 업이 되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되면서 모든 번뇌가 놓아진 상태죠. 그죠? 그런데 이렇게 아라한이 됐다 하더라도 아라한이 어디 누가 칼로 찌르면 들어가겠어요? 안 들어가겠어요? 들어가요. 우리가 몸으로 오는 고통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성도 하시고 나서 등에 고통이 오셔가지고 대게 고생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라한이 되는 순간에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오는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정신적인 것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냄이 사라지기 때문에, 성냄이 곧 정신적인 고통이거든요. 그래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받고 이런 거는 100% 없어지지만, 몸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가 몸이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래서 아라한이 되는 그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기간까지를 뭐라고 그러냐 하면 무여열반 아라한이라고 그럽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느냐 하면, 아직까지 우리 몸이 남아 있잖아요. 그죠? 몸이 남아있으면 그 몸이 있는 동안에는 오온이, 우리 몸과 마음이 있는 동안에는 아직은 남아 있다 이거죠. 육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아직 완전한 해탈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아라한이 만약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로부터는 모든 것이 다 놔지거든요. 그때는 그걸 뭐라고 그래요? 빠리리빠나라 그러죠. 반열반. 들어보셨어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완전한 열반의 상태에 들게 된다.
그래서 이 아라한이 되면은 그런 아까 말씀드렸듯이 모든 오염원이 다 놓아지고 아라한이 죽게 되면 더 이상 태어남이라는 게 없는, 윤회를 벗어나는 거죠. 완전히. 윤회를 벗어나게 되고, 또 아까 말했듯이 수다원에서도 계를 잘 지키지만, 이 아라한이 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아홉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앙굿따라니까야라는 경전에도 나오고, 정신경이라고 디가니까야라고 하는 경전에도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아라한이 절대로 할 수 없는게 아까 말했던 살생, 의도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다는 거죠.
지금도 저 미얀마에 가보면 요런 틈사이가 있잖아요. 이런 나무와 나무로 보통 마루가 돼 있는데, 마루와 마루 사이에 틈이 있잖아요. 그런데 가면 빈대가 우글우글합니다. 안 잡아요. 그걸, 죽이질 않아. 그러니까 잡아서 들어내기는 하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진공청소기로 한번 빨면 싹 없어질 텐데, 안 죽여요. 그러니까 그게 살생을 하지 않는 계율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래서 절대로 아라한이 되면은 자기가 의도적으로 마음을 내서, 그러니까 아무리 미물이라도 죽이는 경우는 없다는 거에요. 내가 모르고 지나가다 밟아서 죽이거나 이런 건 있을 수 있어도.
그리고 절대 도둑질,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을 가지지 않고, 거짓말, 절대 뭘 하지 않느냐 하면 이 아라한이 되면은 계를 안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 성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수다원이 될 때는 자기 아내 외에 다른 존재. 예를 들어 재가자 같으면 수다원이 세속생활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 아라한이 된 존재는 절대 여자와 잠자리를 할 수가 없어요. 이성과. 그런데 만약에 깨달았다고 하면서 누구와 이성과 잠자리를 했다. 그러면 그건 아라한이 아니라 범부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이거구요.
또 자기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절대 악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악을 행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보통은 보면 남 앞에서는 근엄한척해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악을 행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죠?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없다는 거죠. 이게 아라한이 된다는 것. 소위 말해서 우리가 완전한, 불교에서 말하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모든 번뇌의 소멸이 첫째고요, 두 번째는 더 이상 아라한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소위 반열반이라고 하는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된다. 그게 아라한이 가지고 있는 보통 존재와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지금까지 제가 선정 수행부터 지혜수행까지 죽 과정을 말씀드렸는데, 오늘 하는 내용이 어떻게 보면 그거의 귀결점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아라한이 되거나, 또는 아라한보다 중생제도를 많이 하고 나서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 하면 붓다의 길을 갈 수도 있어요. 부처님의 길을. 그럼 붓다로서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자 하거나 그런 길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은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탐진치를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서는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개인의 고통을 소멸하는 마지막 지점은 바로 아라한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도 결국은 아라한의 한, 스스로도 당신은 아라한이라고 그러셨거든요. 우리가 부처님의 십대명호 첫 번째가 뭐에요? 여래응공, 응공이 아라한이거든요. 부처님도 아라한 중에 한 분이십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는 이런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은 이런 아라한이 되기가 금생에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분도 있겠지만, 계속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런 지혜가 자꾸 성숙해야 됩니다. 지혜가 성숙하고 성숙해서 세간의 도라는 건 팔정도를 닦는 거거든요. 이 팔정도를 닦고 닦고 하다 보면 나중에 팔정도가 충분히 무르익어서 나타나는 깨달음이 뭐냐 하면 출세간의 팔정도라고 그래요. 우리가 그냥 계정혜를 닦는 것은 세간의 팔정도라 그러고.
이걸 통해서 아까 말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는 그런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을 출세간의 팔정도라 하는 거고. 우리가 깨달음이 일어나는 게 바로 팔정도의 완성입니다. 그 이전에는 팔정도를 우리 생활 속에서 닦아나가는 거고, 이 팔정도가 완성되는 거는 성자가 되면서 완성된다 이거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그런 것을 우리가 서원을 세우고, 항상 그런 방향으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죠. 중간에 이렇게 자꾸 退屈心퇴굴심을 내고 이렇게 하면,
우리가 실제로 부처님께서 사람 몸을 받은 사람이 참 드물다 그랬거든요. 이 손톱에 대한 비유가 대게 자주 나옵니다. 인간 몸 받는 것도 이 손톱의 흙밖에 안 된데요. 그만큼 어렵다는 거죠. 그죠? 그리고 또 인간의 몸을 받고도 이런 부처님 법을 만나서 이런 팔정도나 이런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만나서 그 수행을 해서 이런 바른 견해를 세우고, 그걸 통해서 여러분들이 결국 아라한이 되는, 이런 길을 가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법을 만나고, 또 수행할 수 있을 때 많이 수행하셔가지고 꼭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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