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의식이 비추고 보여주는 일체 현상들은
다 그냥 그러할 뿐//
사실 깨달음의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이 삶이란 현상에서
나와 나의 것을 모두 다 지우거나 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이 눈앞의 존재 현상은
그대로 있게 하되
몸을 나라고 여긴다던가
생각, 감각 등에 의해 체험된 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의식이
비추고 보여주는 일체 현상들은
다 그냥 그러할 뿐
더 이상 아무런 의미나 이름들도 없게 되면서
일체는 그냥 스스로 빛나면서
존재하는 하나의 상태가 됩니다.
그 어떤 개체도
더 이상 특별하게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은 채
평등하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공의 자리가 나타납니다.
공이란
전체가 있는 그대로
살아 있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평등하게 세상을 두루 인식할 때
거기엔 더 이상 나나 너
그들도 따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과 분별 느낌이
다 멈추고 일어나기 이전에 갓난아기 의식 같은
본래적 상태만 홀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태어나서
온갖 분별과 개념들을 배우면서
이 진리의 공의 상태를
스스로 생각과 느낌이란 분별로
갈기갈기 찢고 색칠해 나눠 놓았습니다.
자라오면서 특정한 현상과 느낌에
나란 이름을 붙여 애지중지하거나
너라고 부르며 미워하거나 사랑했습니다.
이 분별이 바로 고통과 무명의 뿌리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도화지에
자기 마음대로 실컷 색칠하고, 경계를 나눠 놓고, 찢기까지 하고선
이제 와서 원래대로의 깨끗한 도화지 상태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려다
마음에 안 드니까
다시 새 도화지를 달라고 투정하며 그리워하는 상태가
바로 우리들의 현재 심리 상태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이 색칠과 경계들은
진짜가 아니므로 한 번에 지울 수가 있습니다.
이 본성의 도화지는 신기하게도
언제든지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가 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자기가 그린 분별의 그림들이
다 환영이며 가짜임을 정견하기만 한다면
그 색칠과 경계들은
단번에 꿈처럼 사라지고 회복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피 같은 죄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든 ‘죄’란 분별은
다만 실수였고, 몰라서 생긴 일이었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한 것은 없었습니다.
단지 우리는 뭐가 참이고 환영인지를 몰랐던 것뿐입니다.
이제 그를 알아보는
내면의 눈만 뜨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견입니다.
이것은 꿈에서 깨어나듯이 정신만 차리면 되었지
무슨 수행을 하거나
기도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가 참으로 이러하기에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깨달아 있으며
본래 신(의 자녀)이고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깨달음은
일상속에 있는 것이지
어디 특정한 곳에서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당신이
그런 능력을 태초부터 지닌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신봉하거나 매달리거나 하지 말고
타고난 특권을 회복하십시오.
말뿐인 종교에 의지하지 말고
죽은 종교가 산 당신을 의지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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