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는 어떤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문헌을 토대로 하면
싯다르타 역시 호흡에 꽤 많은 비중을 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초기 불교를 따르는 승려들은
아나파나사티라는 호흡명상을 수행의 대간으로 감고 있습니다.
아나는 들숨
파나는 날숨
사티는 알아차림을 각각 뜻합니다.
쉽게 말해 들숨과 날숨에 의식을 모으면서 하는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이것이 뜻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식법이란 편법을 쓰기도 합니다.
이것은 호흡의 수를 셈으로써
의식이 호흡에 좀 더 머물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를 위시해서
왜 불교 수행에서 호흡이 중시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호흡과 잡념이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긴장하거나 몹시 흥분했을 때
그것을 가라앉히는 방법으로 심호흡을 합니다.
호흡이 정상이 되면 마음도 안정을 찾게 되니까요.
이렇듯 호흡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면
그만큼 잡생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점에 착안해서 호흡을 명상의 도구로 쓰게 된 것이
일명 호흡명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나 힌두교를 비롯해
모든 수행에 공통적으로 쓰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나파나사티처럼
호흡에 의식을 두는 것이 과연 효과적일까요?
사실 아나파나사티만 해서는 깊은 명상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운동을 하는 것처럼
아나파나사티는 딱 그 정도의 도움을 줍니다.
그러다 보니 대승불교에 오면서
아나파나사티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호흡은 수행의 보조 수단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요?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 보니
전문 분야가 따로 있게 됩니다.
박사들도 수백 갈래로 나뉘어 있지 않던가요?
그렇듯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호흡 하나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체계를 세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선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호흡을 단전호흡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단전호흡이 불교의 깨달음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단전호흡은
중국의 도교에서 넘어온 것들입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단전의 위치를 배꼽 세 치 밑이라고 합니다.
기경팔맥의 하나인 임맥에 보면
기해라는 혈자리가 있는데
이 부위를 단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곳에 축기를 하여 운기하면서 호흡을 한다고 하여
단전호흡이라 부르고요.
그런데 사실상 이런 도교의 단전은
위치와 구조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단전을 이해하려면 쉽게 발전소를 연상하면 됩니다.
전기를 일으켜 불을 켜기 위해서는 음전기와 양전기로 나뉘어야 합니다.
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를 돌려 정신에 불을 켜기 위해서는 음기와 양기로 나뉘어야 합니다.
그러니 단전은 필히 음단전과 양단전으로 구분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아진 기운을 돌려 운기하고 주천하는 것이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단군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겨례의 단전은
중국의 도교처럼 배꼽 세 치 밑의 기해나 그 주변의 혈자리를 거부합니다.
그 대신 어리띠를 차고 있는 대맥이란 부위에 기운을 저장합니다.
좌측은 양기를 우측은 음기를 각각 모아놓는데
이때 놀라운 사실은
외관상으로도 기운의 축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맥이 마치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태국문양으로 돌출되는데
이것이 단군조선에서 말하는 태극단전입니다.
이렇게 대맥에 축기를 하여 단전을 만들고
이것을 발전기처럼 돌려서 운기하고 주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기운을 돌려서 뭐에 쓰겠다는 건가요?
설마 초능력이라도 발휘하겠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운을 돌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 보는 우주는 하나의 호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5차원 實存(제1원인)에서 어느 순간 숨이 터져 나오면 천지가 창조됩니다.
그 숨은 精이라는 有力과 氣라는 無力을 말합니다.
기운을 내뱉어 흩어 놓으려는 無力과 기운을 응축해 묶어 놓으려는 有力은
일종의 호흡인 것이지요.
기운이 들락날락하면서 원운동을 하자
어떤 형체가 생겨나면서 삼라만상이 창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4차원 세계는
온전히 기운이 숨 쉬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율려(律呂)라고 합니다.
그런데 3차원 세계로 옮겨간다고 해서 이런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3차원의 우주 역시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통해 숨을 쉬게 됩니다.
아직은 이론 물리학에 머물고 있지만
이런 숨 쉬는 구조가 없이는 사실상 존재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미시세계의 원자만 봐도 그렇습니다.
묶어 놓으려는 양성자와 탈출하려는 전자의 공존으로 이루어지지 않던가요.
원자 역시 일종의 호흡을 하면서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호흡은 생명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점에 호흡의 비밀이 있습니다.
파장을 예로 들어 보죠.
파장의 크기가 작더라도 규칙이 같으면 큰 파장과 하나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먼지처럼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호흡의 파장을 우주와 맞추면
그것이 일체가 되면서 인간의 범위가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개체의 범위가 지워져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호흡에 맞추기 위해서는
공기를 빨아들여 내뱉는 생물학적 호흡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기운을 숨에 실어 호흡하는 발상을 하게 됩니다.
이 발상이 바로 仙道의 단전호흡입니다.
이렇게 기운으로 호흡하면
4차원의 율려(律呂)를 닮아가게 됩니다.
단전호흡이 절정으로 무르익으면
4차원의 율려(律呂)와 파장이 같아지면서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개체는 사라지고 삼라만상 그 자체가 됩니다.
이것이 仙道에서 말하는 無爲自然의 궁극이고 깨달음입니다.
나가 있으면서도 없는 상태
다시 말해 무아의 상태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왜 수행자들이 호흡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초기불교의 사티호흡이나
힌두교의 탄트라를 비롯한 각종 요가의 호흡
그리고 중국 도교에서 유래한 기공이나 단전호흡 같은 것은
정곡에서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그만큼 효용이 떨어지고
그래서 대승불교가 나오면서 점점 그 위치를 잃게 된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수행자들은
그런 것들을 두루 체험해 보고 그 한계를 절감한 것이지요.
그래서 호흡은 참고서 정도로만 두고
사마타나 간화선, 참선 등의 방법으로 깨달음의 길을 모색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민족의 국조이신
단군왕검이 창시했다는 선도의 호흡법은
결이 다릅니다.
이것은 인체에 태극을 만들고
그것을 호흡에 끌어옴으로써
4차원의 율려에 파장을 맞춘 놀라운 수련법입니다.
이로써 소우주에서 대우주로 승화하는 확실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수한 호흡법이 나와줌으로써
위대한 불교의 옆에 선도가 병렬로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일 선도의 태극 숨결이 없었다면
수행에는 오로지 불교 하나만 있게 되었을 테지요.
아무튼 선도가 당당히 불교의 옆자리에 설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율려에 파장을 맞추는
태극 호흡법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그 호흡을 조금만 다듬어
우주의 호흡과 연결한다면
당신의 존재는 한량없는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의 호흡에 만족하시나요?
당신의 호흡에
우주의 주파수를 실어 보는 건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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