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대략 방하착, 응무소주, 무소유, 탈아상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의 의미나 용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은 집착을 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집착을 버리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요?
하루일과를 떠올려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하루를 빽빽이 채우고 있는 것이 무얼까요?
그건 다름 아닌 집착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집착에서 나오고
더욱이 무언가에 몰두하면 집착의 강도가 세집니다.
일이 아니어도 음식을 먹거나
취미활동을 할 때도 집착은 작용합니다.
이렇게 생활 자체가 집착으로 꽉 채워져 있기에
이것을 끊어내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집착 없이 살려면
사회부적응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출가라는 비상 수단이 등장합니다.
가족을 비롯해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서
집착할 일이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체의 일부인 머리마저 깎아 버립니다.
머리가 길면 이것을 어떤 모양으로 다듬을지 신경 쓰이게 되는데
이 또한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집착을 최소화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 출가입니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집착인 권욕과 물욕, 그리고 색욕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권욕이란
남보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마음인데
이는 불교 조직 내에서 큰스님이 되고
나아가 교단의 권력을 잡아 영향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표출됩니다.
물욕은
사찰 운영을 통해 들어오는 수익에 대한 소소한 욕심에서 발동합니다.
물론 대다수의 승려들이 권욕과 물욕을 물리치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세 번째 등장하는 색욕에 있어서 만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본능에 의해 무서울 정도로 색욕이 치고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3대 집착인 권욕과 물욕 그리고 색욕을 고려하면
출가한다고 결코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고려 말의 신돈처럼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 선도에서는 무위자연을 이야기합니다.
무위자연이란
순리에 따를 줄 아는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순리가 무얼까요?
자연이 흘러가는 이치이며 도리입니다.
자연이 자연의 법칙대로 흘러가듯
인간은 인간답게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답다는 것이 무얼까요?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지능이 높은 영물이니
서로 다투지 말고 상생하며 조화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경쟁해서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런 것도 선도에서는 무위자연으로 봅니다.
경쟁하는 것 자체가 자연의 이법이니까요.
다만 경쟁하는 것은 좋은데
그 과정에 타인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때부터는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회활동의 범위 내에서는
모두 무위자연입니다.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도 당연한 것이니
무위자연이고요
그렇다면 수행에 있어서는 어떨까요?
선도의 무위자연은 불교의 방차착과는 다릅니다.
방차착은 집착을 버리라는 뜻인데
이런 마음을 갖는 것 역시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버려서 열반과 해탈에 이르려는 일체의 행위도 집착의 소산이 됩니다.
깨달으려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집착을 적으로 돌리는 순간
집착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선도의 일관된 견해입니다.
그래서 선도는 서청을 주장합니다.
집착이라는 흙탕물을 없애려고 휘휘 저으면
오히려 오염이 심해집니다.
하지만 흙탕물을 그냥 놔두면 저절로 가라앉아 정화가 됩니다.
선도는 이런 서청의 이치를 가지고 집착을 받아들입니다.
집착 역시 무위자연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집착을 일으키는 아상도 자연의 일부인 것이고요.
그래서 선도에서는 아상이나 집착 같은 것을
일부러 줄이거나 없애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선도의 무위자연은 어떤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그 대신 수련을 통해 기운을 축적하고 그것을 운기하는 것에 치중합니다.
이렇게 기운이 자신의 몸에서 돌아 외계와의 공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
자연의 맛을 물씬 느끼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가치이고 기쁨인 것이지요.
그리고 기운을 통해 우주가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됐다는 사실을 단계별로 체득해 나갑니다.
이것이 선도에서 말하는 소우주입니다.
이렇게 자연의 일부이면서
자연 그 자체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무위자연입니다.
사실 자신을 소우주라고 칭했지만
공명의 영역이 넓어지면
소우주니 대우주니하는 구별도 필요없게 됩니다.
그냥 천지자연 그 자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니까요.
이 모든 것은
기운을 축적하고 운기하고 주천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천지와 같은 호흡을 하면서 동질감을 느끼면 깨달음에 대한 생각도 달라집니다.
깨닫고 깨닫지 않고 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깨달으려는 수행 자체도 작위이고 집착이 되니까요.
이처럼 무위자연에 따라 사는 사람을 일러 신선이라 합니다.
더 나아가 무위자연 자체가 되면 기화선이라 합니다.
기화선이란
기로 존재하는 신선이란 뜻인데
달리 말하면 우주의 호흡인 율려와 일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그냥 있는 상태가 됩니다.
싯다르타의 무상정등각에 꼭 부합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선도의 깨달음입니다.
仙道에서 제시하는 수행의 길, 그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정교합니다.
축기하고 운기하여 자연의 호흡을 터득하고
그 호흡으로 살아감으로써 자연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無爲自然의 섭리대로 사는 삶은
존재 자체의 감각을 열어
‘그냥 있는 상태’를 조성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냥 있게 됨으로써
둘이 아닌 하나가 됩니다.
깨달음이 열린 줄도 모르면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점검을 통해 깨달음을 타진해도 별로 흥취도 없게 됩니다.
깨달음이란 것도
인간들이 작위적으로 만든 개념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을 보면
불교와 선도를 굳이 나눌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선택하면 되니까요.
다만 불교가 단숨에 정상을 공략한다면
선도는 한 계단씩 차근차근 올라간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뛰어난 근기를 타고난 분들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10계단 100계단씩 날아오르면 되고
그렇지 않고 평범하다면 선도의 수련을 병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출생이 원효대사와 비슷한 급이라면
불교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렇지 않다변 선동의 호흡법과 무위자연의 공명을 익힐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은 산의 방향에 따라 다양합니다.
그래서 한가지 길만 있지는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한 가지 길만 옳다고 주장하면
오히려 벼랑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편협하게 왜곡하고 축소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라면 자신의 근기를 살펴
여러 가지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적합한 길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집착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나요?
그렇다면 불교 수행이 적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집착을 무위자연으로 승화는
선도의 길을 타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수행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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