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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베다와 우파니샤드

Buddhastudy 2024. 10. 22. 19:07

 

 

이것이 영원한 아슈밧타 나무다.

나무는 뿌리를 위로

가지를 아래로 향해 뻗고 있다

-카타 우파니샤드

 

 

우리는 앞서 깨달음 전통의 세계관에 대해 훑어봤습니다.

때로는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때로는 선입견을 부수기 위해서이며

때로는 거꾸로 된 시각을 뒤집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부수고 뒤집는 작업은

그 자체가 정견을 바로 세우는 수행입니다.

 

바로 세우기 위해

이해하고, 부수고, 뒤집은 이 작업은

물론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제를 놓고 세계관의 이야기를 해본 것은

산을 오르는 동안

계속되는 이 작업의 큰 범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약이 없지 않아

종횡무진으로 많은 것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얼추 꼭 필요한 깨달음 전통을 훑었고

또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범위를 더 확대해 볼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 지도를 그리기 위한

여러 세계관의 이해이자 수행의 초점이죠.

 

철학사를 정리하거나

문헌의 체계를 파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베다나 우파니샤드도

그런 초점으로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베다는

신들에 대한 찬가와 기도를 실은 종교경전이죠.

종교의례를 위해 정리된 것들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베다의 부속 문서 중 [우파니샤드]라는

우주의 원리를 탐구한 문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는 물론

인도 정통의 철학들이 모두

이 세계관에 기반해 나왔습니다.

 

우파니샤드란 산스크리트어로

무릎을 맞대고 가까이 앉는다는 뜻입니다.

스승에게 가까이 앉아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신비한 지식을 듣는다는 뜻이죠.

 

뜻에 맞게 내용은

거의 모두 스승과 제자의 토론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베다의 마지막 부분을

베단타, 베다의 결론이라고도 합니다.

 

근본적인 내용은

우주의 본체인 브라만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이

일치라고 하는 범아일여의 사상입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들어봤을 겁니다.

서구식으로 표현하자면

관념론적 일원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파니샤드의 주요한 개념인

브라만, 아트만, 마야, , 윤회, 해탈은

그것을 직접 접한 적이 없는 경우에도

불교나 다른 종교를 통해 잘 알려진 개념들입니다.

 

우파니샤드를 간단한 줄거리로 만들어보면

정말 단순한 도식입니다.

전체인 브라만과 개체인 아트만이 같은 것임을 알면

해탈한다는 겁니다.

 

모든 생명체들과 사물들의 배후에 있는 우주적 실체 브라만이

곧 개별적 인식, 주체인 아트만과 같은 것임을 알면

마야 세상과 업의 윤회를 넘어

인간 지성의 가장 높은 목적지인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 불교는

아트만을 부정한다고 배웠습니다.

아트만은 개아이지만

그것의 속성은 유한한 몸이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 영의 개체적 버전에 해당해요.

성경에서 말하는 개인에게 임재하신 하느님의 성령 같은 개념이죠.

 

사랑하는 제자여

그것은 처음에 홀로 있었으며

이름은 브라만이었다.

그는 영원히 자유이며 변화하지 않으며 정해진 틀이 없고

진리의 본성, 지혜와 환의의 모습으로서

완전하며, 꾸준하며

둘이 아닌 지구의 존재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아는 신은

환영의 조각을 가지고

개체아 육신에 들어가

그 환영의 힘에 의해

개체아인 양 착각하게 된다.

 

몸이 셋인 그 개체아와 일치되게 됨으로써

그는 진정 행위하고, 겪는 것처럼 착각한다.

깨어있거나 잠자고, 꿈을 꾸고, 기절하는 등 돌고 돌면서

그 스스로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

도공의 회전판처럼 알 수 없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브라만과 아트만의 관계를 알고 나면

수행에 필요한 것은

단 두 가지 경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대가 그것이다.

둘째,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입니다.

 

네가 바로 신이라는 뜻 하나와

아트만은 직접 알 수 없고

거짓인 것을 부인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또한 우파니샤드 등의 많은 부분들은

모든 사물과 현상에

브라만이 임재해 있다는 묘사에 할애됩니다.

 

소금물 속에서 소금을 잡을 수는 없지만,

물의 어느 부분을 맛봐도

짠맛이 나는 것과 같은 비유로

브라만의 임재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음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자]이다라는 말로

의식 작용을 일으키는

배후의 존재를 설명합니다.

 

이렇게 온 우주가

완전한 충만, 브라만에 잠겨 있는 묘사도 계속 등장합니다.

 

오움, 저것은 완전하고 이것도 완전하도다.

완전함으로부터 완전함이 생겨나노라.

완전함에서 완전함을 빼내니 또한 완전함만이 남도다.

모든 것은 최고의 존재인 신으로 온통 덮여 있도다.

진흙 한 덩이를 앎으로써

진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파니샤드에서 주목해야 할 개념은 [아트만]입니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고,

우파니샤드에서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와 동일한 것입니다.

브라만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불교는 이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으로

힌두교에 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항구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인연, 화합의 상호의존이라고 연기를 설했던 불교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자성을 가진 아트만은

당연히 부정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아트만이라는 자성을 가진

자아 존재에 대해 부정한 것이지

결코 그런 작용 자체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트만, 자아]

오히려 [의식]이라고 풀면 이해가 쉽습니다.

 

물리적인 신체,

그보다는 덜 물리적인 현상인 마음을

모두 본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배제해도

남는 것이 바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아는 의식이죠.

 

[아는 무엇]

그것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을 의식이라고 파악하면

브라만과 아트만을 하나로 설파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일원론적 우주

하나의 생명을 이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상적 연기, 업의 연기라는 설명을 넘어선

화엄의 법계연기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을

한쪽에서는 어머니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아내라고 하며

한쪽에서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지

이 진리들이 가리키는 것이

뭔가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혹에 빠질 걱정을 하지 말고

힌두이즘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보고 아는 것이지

그 설명이 내 견해와 같냐? 아니냐?

이런 것이 아닌 겁니다.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지도를 그리며

자주 사용할 개념들을 살펴봤습니다.

 

 

--

하나의 진리를 두고

여러 현명한 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도다

-리그 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