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덕정스님_참수행

덕정스님 _ <특집> 정각사 참수행 특별법회 5부 (20:15)

Buddhastudy 2012. 9. 30. 22:00
방송 보기: 불교TV 

 

오늘은 참수행 특별법회 5부 시간입니다. 오늘 제목은 어느 고도의 참수행인의 체험담에 대하여 설법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법 내용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설법을 하기보다는 원고에 충실해서 설법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주제는 총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릴 것인데요. 첫 번째 1. 참수행인의 어린 시절. 그리고 두 번째는 2. 참수행자 정도를 찾아 나서는 고행을 시작하다. 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주제는 3. 수행 중 험난했던 참수행자의 체험담. 그리고 네 번째는 4. 참수행 과정 중 나타난 필름현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주제는 5. 초월적 초자연적인 위치에 도달하여 정신적 삶을 살아가다. 이렇게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설법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주제인 참수행인의 어린 시절입니다. 참수행인의 어린 시절 모습은 일반사람들이 보는 시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일반 분들이 봤을 때는 삶을 바라보지만, 참수행자는 바라보기보다는 자세히 관찰하는 모습으로 바라보면서 삶에 의구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어떠한 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바라보고 관찰함으로 인해서 의구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 모습이 모두 다른 것인가? 똑같은 환경에서 또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데, 대처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다른 것인가? 삶이 어렵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부유하지만 매일 서로 싸우면서 서로간의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조그마한 일에 서로 다투고 싸우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큰 위기인데도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사람들을 보고 많은 의구심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모습들이 보여 지는 것인가? 같은 사람인데요. 한 생은 이 생로병사의 삶을 살아가는 아주 짧은 생인데도 왜 사람들은 삶의 의미도 없고, 먹고 즐기고, 욕심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가? 라는 의구심을 갖는 것입니다. 한생이 아닌 영원하고 영구하며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라는 의구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수행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관찰한 후에 어렸을 때부터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정돈 돼요. 이 첫 번째는 삶을 살아나가는 데는 내가 할 탓이라는 것과. 행복과 불행도 나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어려운 상황이라도 내 마음을 어느 쪽으로 가져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를 물욕을 최소치로 만족하며 삶을 살아가고, 무엇보다도 가족 주위를 대할 때 불편하지 않고 적절히 편하게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적은 것에 만족하는 습관을 들이며 삶을 살아간다면 행복하게 삶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첫 번째는 삶의 모든 일은 내 탓이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가짐을 어느 쪽으로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서 행불행이 결정된다. 라는 것. 두 번째는 물욕을 최소치로 만족하고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적은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이렇게 세 가지의 철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현재 왜 삶을 살아가는지도 잘 모릅니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왜 나이를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단지 병이 찾아오고 죽음의 앞에 왔을 때 내가 이 한생을 왜 살아왔는가? 라는 생각을 찰나, 아주 순간 생각을 하고 또다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수행자는 어렸을 때부터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조금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너무 짧은 삶인데도 영원하고 영구한 삶을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삶의 참의미를 담고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이건 참 수행자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수행자는 한생을 넘어서는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정도를 찾아 여기저기 많은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번째 주제입니다. 참수행자 정도를 찾아 나서는 고행을 시작하다. 이 수행자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진 것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내 몸속 어디엔가는 존재할 것이다. 라는 강한 마음, 또는 기준을 가지고 수행을 정진한 것입니다. 정도를 찾아 산이나 사찰, 또는 여기저기 한참을 다니던 동안에도 내 몸속 깊은 곳에 행복과 불행이 있다. 라는 것이 굳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생각은 육체에서 나오는 것인데, 생각의 원천은 어디인가? 생각은 육체에서 나옵니다. 이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캐고 들어간다. 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생각을 파고들어 간다면 생각을 지배하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하며 혼란을 일으키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행자가 여러 곳을 다니다가 외도사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네 군데 정도 되는데요, 첫 번째 장소는 치성을 드리는 곳입니다. 특이한 지형이나 모양, 또는 토착신앙, 전래 쪽으로 잘못 전해 내려온 관습에 의해서 치성을 드리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고요. 두 번째로는 신이나 남한테 의지하는 곳도 방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상한 능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곳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정도를 아주 쉽게 생각하고 바로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곳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총 네 곳입니다. . 치성을 드리거나 신이나 남한테 의지하거나 능력을 보여주거나, 또는 쉽게 생각하는 곳은 참수행자가 바라봤을 때는 바른길이 아니구나. 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참수행자는 영원하고 영구한 참행복을 얻을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네 곳을 방문해보고요. 그래서 수행자는 이 대망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으로 오랜 기간 동안 혼자 수행을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산속에서 수행 중 추운 겨울이 다가와도 내려가지 않고 강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수행을 정진해 나갔습니다. 수년간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 무엇도 잡히지 않았고 올해도 그냥 넘어가나 싶은 생각을 하며 잠시 서글플 때도 있었지만 참수행자는 약한 마음을 먹는 것이 수행자로서의 수치심으로 생각하고 더욱더 강한 마음으로 수행을 정진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행 중 오랜 숙원이 다 풀어지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느 때처럼 수행을 정진 중 보이지 않는 나의 깊은 속에 있는 마음이 나에게 크게 와 닿는 듯한 아주 강렬하고 힘이 있는 어떤 기운이 온몸을 강렬하게 스며드는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때 수행자는 분명히 생각의 원천이 있을 것이다. 라는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파고들어 가는 수행을 정진해서 이 마음을 처음으로 느낀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느낀 감으로 강하게 느낀 것을 이야길 하는 것입니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으나 매서운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으며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 행복감을 몸속 깊은 곳에서 느꼈습니다.

 

그 마음에 대해서 강하게 느낌이 온 후입니다. 그리고 40일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잊은 채 정진하였으며 이 원천적인 힘이 바로 내 육신의 배고픔보다도 더 큰 목적의 비중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육신을 잡았던 것을 시간이 흐른 후에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수행자는 조금씩 느낀 것입니다. 이 육체를 지배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조금씩 느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몸이 아파도 마음으로 다지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육체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을 실지 느낀 것입니다. 만약 참수행자가 이 지식이라든가 외부의 집중을 하였다라고 하면 정도로 흘러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외도사도로 흘러갔을 것을 생각하면 조금 아찔하기도 했던 순간입니다.

 

정도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외도사도로 흘러갈 수 있는 시기는 무척이나 많습니다. 이때 이미 참된 나 속에 행복과 불행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마음이 육체를 지배하고 다스려 나간다는 사실과 마음가짐에 따라서 삶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며, 육체의 생각이 아닌 마음을 성장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을 살아나가며, 영원하고 영구한 참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수행자에게는 어려움과 고행은 기본임을 참고로 밝혀둡니다. 짧은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면 영원하고 영구한 초월적 삶을 추구하고 한생을 버려서라도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생의 행복이 아니고 윤회의 행복입니다. 영원하고 영구한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반 분들이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으로 볼 수 있으나 수행자는 현세 고행도 목적이 뚜렷함으로써 참즐거움으로 알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생에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수억겁만년동안 수행을 정진하여서 그 노력의 결과로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역시 수행을 한생에서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생에 고행을, 고행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윤회를 바라보는 삶을 사는 분들이 바로 수행자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주제입니다. 수행 중 험난했던 참수행자의 체험담. 이 내용을 설명 드리기 전에 2500년 전 부처님 시대에는 여러분 지식이 없었습니다.

 

글이나 문자라는 그 자체가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불교를 지식으로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는데 이 지식과 수행과는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없습니다. 25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행을 가르쳤습니다. .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된다. 라는 행을 가르치신 것이지, 다른 것을 논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오면서 지금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행이 아닌 지식적으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자의 네 가지 기본자세입니다. 모든 일은 내 탓이며 바른 언어, 바른 태도, 바른 행동으로 수행을 정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역시 모두 행입니다.

 

참나를 찾기 위하여 많은 고행을 한 것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에 고행이 좋은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수행을 정진한 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현세에 능력적인 면이나 짧은 현세에 비중을 두었다고 하면 외도나 사도로 흘러갔을 것이며 아주 후회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지금 생각하면 아주 아찔하기도 합니다. 정도를 찾던 중 나름대로 수많은 수행인들을 만나보았지만, 한결같이 외도나 사도를 정도로 알고 행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느 사람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이것이 사도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수없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