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무아사상, 내가 없음이 아니라 내가 환영이다

Buddhastudy 2024. 2. 20. 19:54

 

 

오늘의 테마, 정말 재밌는 테마예요.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이라는 것이 가지는 힘에 대해서

또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대로 전달이 되고 있지 못하는

그런 영성 용어들의 개념들에 대해서도

또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무아 사상에 대해서

 

오늘의 주제

무아라는 것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무아많이 이야기 들어보셨죠?

불교 쪽 영성에 관심 있으셨던 분들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무아사상

산스크리트어로는 안 아트만이라고 표현되는

무아사상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무아에 대해서 한문으로 보면

없을 '' 자에다가 나 아 자예요.

, 현재

우리 흔히 이 ''자 있잖아요.

''자를 없다없음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많이 합니다.

있다 없다로 해석하죠.

 

 

--있다와 없다- <없음>에 대한 고찰

 

있을 유없을 무’, 유무

이렇게 해서 있다 없다.

 

그런데 적어도 마음공부를 할 때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이 부분이 시크릿하고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반응태라는 것하고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

여러분들 빠뜨리지 말고 들으셔야 돼요.

 

있다없다라는 개념

이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언어로 전달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하나의 상에 빠져버리게 만드는

대표적인 용어입니다.

 

그래서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때

''는 진짜 ''가 아니에요.

짝퉁입니다.

진짜 ''가 아니에요.

 

마음공부를 할 때

경전 등에서 사용되는 없을 무자는

없다라는 상대적인 개념 안에서의 있다 없다라는 그런 의미 중에

없다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상대성 안에서의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있다와 없다로 자를 받아들이게 되면은

'없음'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문제가 어떻게 생기냐면

없다라고 할 때 그 '없음'

'없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없다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있다 없다를 고찰 할 때

있다라는 거는 우리가 쉽게 알아챌 수가 있죠.

근데 이 있음에도 함정이 또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있음없음에 대해 잘 살펴보셔야 돼요.

그래야지 여러분들이 현 실태와 가능태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중에.

 

있다라고 했을 때는 뭡니까?

무언가가 우리의 감각, 감각적 대상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죠.

우리가 오감과 현재 의식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범위로 들어온 것이

있음이 된 거예요.

 

예를 들어볼게요.

물컵이 있다, 물컵이 없다

물컵이 있다, 물컵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해볼게요.

있다라는 개념 자체는 받아들이기는 편한데

없다라는 개념보다 받아들이기 편한데

물론 있다라는 개념도 잘못 왜곡돼 있긴 합니다.

 

없다라는 개념 쪽으로 고찰이 가면

하나의 오류에 빠져버립니다.

왜냐면은 여기서 제가 질문을 드릴게요.

 

진짜로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을까요?

있다’ ‘없다로 이야기를 하는데

진짜로 없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거예요.

있다라는 것은 대충 알겠어요.

그런데 없다가 되면

그것은 진짜로 없는 게 아니라

'없음'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하나의 상이라는 얘기입니다.

 

'없음'이라는 의미 자체는 뭐란 얘기예요?

하나의 있음(없다라는 상으로 있음)’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있다와 없다라는 상대적인 개념 안에서 쓰는 '없음'

진짜로 없는 게 아니라

하나의 기준을 통해서 이해되어진 '없음'에 불과하다라는 얘기예요.

 

왜냐하면 뭡니까?

진짜로 없는 것은 우리는

인식의 대상으로 인지할 수조차 없습니다.

있다와 없다로 이야기할 수조차 없습니다.

 

있다와 없다로 이야기 하려면은

있다와 없다로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무언가가

항상 동반된다라는 얘기예요.

 

심지어는 '없음'이라는 그 개념마저도

'없음'이라는 의미로서 있는 것이거든요.

 

이해를 통해서 이해된 '없음'이라는 것은

진짜로 '없음'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레몬은 신맛이 난다라는 글귀를 봤어요.

신맛이 뭔지를 맛본 적이 없는 사람이

레몬 맛이 신맛이 난데

이 이야기를 듣고 이런저런 이제 이해를 하는 겁니다.

이건 저럴 것이고 저건 저럴 것이고

레몬 맛은 이럴 것이고.

근데 문제가 있단 말이에요.

 

아무리 이해를 훌륭하게 하더라도

결국 이해 되어진 신맛인 거예요, 가짜란 얘기예요.

진짜 경험적인 신맛이 아니라, 맛본 것이 아니라 뭡니까?

이해되어진 신맛이라는 거죠.

 

이처럼 ''라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해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다 보니까

무아라는 것에 대해서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합니다.

 

 

--<무아>에 대한 여러 해석들

 

정말 많이 쓰이는 표현인데 이 표현 자체도 조금 이제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지금 거론하는 거지만, 말씀드리는 거지만

무아내가 없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게 될 경우

 

보통 수행하시는 분들이 많이 빠지게 되는 착각이 뭐냐면

내가 없다고 그러니까

나의 의식 상태가

깊은 잠이나 혹은 무의식의 상태?

아니면 뭐 기절해 있는 경우?

코마 상태

뭐 그런 거 많잖아요.

마취, 수술할 때 전신 마취..

한 경우 등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를 해버립니다.

정신이 없는 상태

무의식의 상태를 무아라고 이제 착각을 하기도 하죠.

그런 게 아니에요.

 

재밌는 게 뭐냐 하면 잘 살펴보세요. 여러분

우리는 결코 꿈조차 없는 깊은 잠이나

기절해 있는 상태

아니면 무의식의 상태를 경험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무의식의 순간에 뭡니까?

경험의 대상으로서

무의식의 상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뭐예요?

무의식의 상태라고 인식하고, 분석하고, 받아들이는 인식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 깊은 잠에서 돌아올 때

깊은 잠에서 생시로 돌아오는 그 순간을 이용하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죠.

나는 깊은 잠을 경험했다라고 주장을 하고자 한다면 뭡니까?

반드시, 도대체 무엇이 그 깊은 잠을 경험했는지?

누가 이 깊은 잠을 경험을 한 거지? 어떻게 하는 거지?

깊은 잠을 잤다는 사실을?

하고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거죠.

 

내가 깊은 잠을 경험했다고 하실 거예요?

나는 그때 깊은 잠을 자고 있어서

어떤 의식 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럼 도대체 누가 그 깊은 잠을 경험했다는 걸까요?

 

그건 뭐예요?

깊은 잠의 상태라는 것은 경험한 자가 없습니다.

경험한 자가 없는 상태는

경험 자체가 있을 수가 없는 상태인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경험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자가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이것도 재미있죠.

 

예를 들어볼게요.

기절했던 상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상태

수술하려고 전신 마취돼서 수술한 다음에 깨어날 때

전신 마취 안에 들어가 있었던 상태

코마 상태 이런 것도 마찬가지죠.

이건 경험하는 주체 입장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상태인 거예요.

주체 입장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상태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뭡니까?

무아를 일종의 무의식의 상태처럼 이해를 해버리시면

무의식의 상태라는 건 역설적으로는

경험하는 주체도

그리고 그 주체에 의해서 경험되어지는 대상도

있을 수가 없는 상태라는 얘기입니다.

즉 하나의 관념,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태예요.

개념이라는 얘기예요.

 

한편 아까 말씀드렸던 그 깊은 잠의 상태를

어떤 무아의 상태라고 설정을 합니다, 상정을 하고.

깊은 잠을 자는 것이 바로 무아의 상태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책에도 인간의 세 가지 의식상태

기본적인 트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깊은 잠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책에서 말을 하고자 했던 그 깊은 잠의 상태라는 것은 뭐냐면요

일원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관념적인 상태예요.

 

그래서 이 깊은 잠의 상태 그대로를

어떤 하나의 실체로 삼아버리시면 안 되는 겁니다.

일원성이라는 것을 표상하는 하나의 관념적인 상태가

이 깊은 잠의 상태라는 거예요.

 

일원성 자체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라는 이론성의 속성이

인간의 세 가지 의식 상태 중에서는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태인

깊은 잠의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죠.

하나의 개념으로서 말이죠.

 

인식될 수 없는 상태를 우리가 많이 착각들 하고 있는 게 그거예요.

마치 그 순간을 경험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깊은 잠 자체는 결코 인식이 될 수 없다고 말씀드렸죠.

인식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예요.

그러므로 그 상태 자체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단지 뭡니까?

잠을 깬 이후에 그 상태를 깊은 잠을 경험했다라고 주장을 할 수 있을 뿐이에요.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무아라는 말을내가 없음’'이라고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내가 없다라고 말 해버리니까

그럼, 이 몸은 뭐지?

그건 뭐예요? 무슨 유기체? 잘 만들어진 스마트한 유기체? 유기물 로봇?

뭐 그런 것쯤으로 영혼 뭐 그런 것도 없고

말 그대로 스마트한 로봇이 되는

영혼 없는 로봇이 되는 수행을 또 하기도 해요.

명상 등을 통해

저도 그랬었고요.

많은 기간 이곳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의 육체는 일종의 스마트한 유기물, 유기체로 보시고

나의 생각이라는 건 뭡니까?

이 로봇이 저절로 만들어 내는 하나의 심상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항상 자유의지라는 것을 거론 하죠, 자유의지.

그래서 나라는 것은 어떤 하나의 유기체, 로봇일 뿐이므로

나의 행동 생각 감정 등은

로봇과 환경의 메커니즘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 뿐이지

자유의지 자체라는 건 뭐 없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정리를 하자면

라는 거는 자유의지가 없는

말 그대로 저절로 생명의 작용을 하는

아주 깔끔한 걸어다니는 로봇이 되겠죠.

걸어다니는 뭐 좀비?라고 말을 해도 무방을 하죠.

 

근데 이건 뭐냐 하면 어떤 패러다임이냐면요.

라는 것을

영혼을 가지고 있는 육체라는 패러다임에서

영혼이 없는 유기물, 자동 로봇, 유기물 스마트한 유기체 로봇으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에 변하는 건 없어요.

 

이것을 나로 삼다가

이번에는 저것을 나로 삼는 것일 뿐이죠.

볼펜 색깔만 바꾼 경우예요.

 

아니면 또 명상을 깊이 수련하시는 분들은

내가 없다라고 말을 하기 때문에

의식이 텅텅 비어 있는 어떤 텅 빈 경험이 있어요.

의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허공과 같은 그런 경험을 무아로서 이해를 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또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

내가 사라진 체험, 마음자리, 텅 빈 충만

아니면 지복의 껍질, 순수한 의식의 상태

이러한 것들을 무아로 이해하죠.

그래서 그러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을 또 하죠.

 

그러면 여러분 이게 무아인 게 아니죠.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의식의 상태라는 것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로 삼았을 뿐이지 내가 없는 건아니잖아요. 그렇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텅 빈 어떤 의식의 상태, 배경 의식의 상태, 합일 의식의 상태

얘네들은 여전히 어떤 나로서 존재를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이와 같이 ''라는 것을 '없음'이라고 이해하시고 받아들이면

본래 뜻 자체가 왜곡이 되게 돼요.

 

 

--무아- 나타난 내가 환영이다

 

그러면 ''라는 단어를 '없음'이라고 이해하지 말고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어떻게 이해해야 가장 좋을까요?

여러분 마음공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라는 단어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경전에서 말을 하는 거예요.

 

''라는 단어 자체를

'환영'이나 거울에 비친 상아니면

꿈속에 나타난 상’ ‘심상

그러니까 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권해드리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무아라는 말 자체는

내가 없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나타난 내가 환영이다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나타난 내가 환영이다.

 

일체의 대상, 그냥 나타난 라는 것은 세상 전체이기 때문에

나타난 세상 전체가

육체의 감정, 생각, 세상 전체, 이것 자체가

거울에 비친 하나의 삶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꿈속에 나타난 돌맹이와 같은 것

꿈속에 나타난 공룡과 같은 것입니다.

'환영'이라는 뜻이에요.

무아라는 뜻은.

무아라는 뜻은 환영, 환상

거울에 비쳐 나타나 있는 어떤 거울에 비친 그런

꿈속에 나타난 심상이런 것과 같은 뜻이에요.

 

결국 뭡니까?

라고 부르는 존재가

라고 부르는 존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환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일체의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뭐라는 뜻이에요?

'환영'이라는 뜻입니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영상과 같은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계시고 있는

제 모습, 듣고 계시는 제 목소리 뭡니까?

'환영'이죠.

실제가 아니잖아요. 진짜가 아니잖아요.

뭡니까?

컴퓨터 화면 안에 나타나 있는 어떤 하나의 모습이에요.

각인된 정보가 영상화돼서 나타난 것뿐입니다.

그 무엇이 되더라도 말이죠.

 

결국 무아라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나라는 것이 환영이다라는 말입니다.

라는 존재가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환영으로 나타나 있는 하나의 영상이라는 얘기예요.

 

무아의 자리에 라는 것은

융통성이 있어서, 유연성이 있어서

그 무엇이 되든지 간에 자기 동의시를 통해서

나는 이것이다라고 취할 수가 있습니다.

라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무아의 라는 그 자리에다가

조금 멋있는 것들을 여러 가지 갖다 놓을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마음자리, 순수의식, 성품, 진여, 불성, 알아차림, 꺼지지 않는 생명,

사랑의 산 불꽃, 의식의 빛, 무지의 구름...

그 무엇이 되더라도 마찬가지, 다 좋아요.

이런 것들을 갖다 붙여도 결국엔 뭐라는 얘기입니까?

'환영'이라는 얘기예요.

 

여러분 몸을 한번 보세요.

잘 고찰해 보신 다음에

여러분 몸을 한번 쓱~하고 들여다보시면

느껴보시는 거예요.

 

여러분의 몸 자체가 이 몸이

꿈속에 나타난 어떤 하나의 상

거울에 비친 어떤 하나의 상처럼 그렇게

'환영'으로 보이십니까? 여러분.

 

물론 여러분

시간 공간, 감정, 생각

뭐 이런 것들도 전부 다 거울에 비친 하나의 상이에요.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결론은 이렇죠.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환영이구나

무아라는 것은 이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이구나

라는 것이 있다’ ‘없다라는 뜻을 전달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라는 것이 '환영'으로

나타난 라는 것이 '환영'이구나라는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하는 용어입니다.

그 뜻이 더 가까워요.

 

여러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죠?

그게 마치 경치를 바라보는 전망대하고도 비슷한 것이 되겠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를 이렇게 막 조절을 해보세요.

여기서 바라봤다. 조금 더 위에서 바라봤다. 조금 더 뒤에서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조절을 한번 해보세요.

 

이원적 관점에서도 바라봤다.

조금 더 비의원적인 관점으로도 바라봤다.

거기서부터도 계속 또 뒤로 이렇게, 계속 한번 물러나 보세요.

여러분이 발 딛고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가

이 세상 자체에서 벗어나 버릴 때까지 한번 물러서 보세요.

 

여러분, 여러분들한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계시죠?

이 영상 보고 있죠? 듣고 있죠?

마음속에서 격렬한 또 느껴지고

머릿속에서 막 격렬한 움직임

느껴지고 막 하실 겁니다.

보고 있고, 듣고 있고, 행위하고 있고.

 

여러분들이 느끼고 있는

그 생각하고, 보고, 듣고 있는 그놈이

라고 하는 존재가 '환영'이라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무아라는 단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번 시간의 주제는 좀 어려워요.

있다없다라는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마세요.

그 언어의 함정에 빠지면

이 상대적인 개념 안에서 계속 뺑뺑이 돌게 됩니다.

 

오늘 주제가 조금 어려웠어요.

오늘의 영상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또 다음 시간에 찾아뵐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