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지혜별숲] 마음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낭독79회]

Buddhastudy 2024. 2. 29. 20:14

 

 

니르말라의 [나는 없다] 함께 하겠습니다.

니르말라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4대쯤 되는 제자로 알려져 있구요.

니르말라의 관점은

스승이자 친구인 아디야샨티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고 해요.

 

오늘 읽어드릴 내용은 마인드 게임이라는 부분인데요.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드라마를 끊임없이 재생해 내는 텔레비전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져들고 탐닉하듯

마음이 펼쳐놓은 드라마에 빠져들고 탐닉합니다.

 

또한 이 드라마의 내용을

자신이 원하는 전개와 결말로 새롭게 단장하고 바꾸기 위해 애쓰는데요.

이러한 마음의 게임속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실체인 가 있다고 믿고 있지만,

텔레비전에서 상연되고 있는 드라마가 허상이듯

마음 스크린에서 상연되고 있는 드라마 역시 실체가 아니구요.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적인 나

에고로서의 나는 없다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라고 믿고 있는

에고의 자의식일 뿐

참나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용 읽어보겠습니다.

 

 

--

고통은 우리의 생각들과 지금 여기의 진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도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것들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환상을 매만지고 단장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텔레비전에 빨려들 듯 마음에 빨려듭니다.

마음은 텔레비전과 정말 닮았습니다.

 

텔레비전처럼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나타나서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습니다.

마음은 주변을 샅샅이 훑으면서

뭔가 새롭고 다른 걸 알아내는 것이 일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텔레비전 화면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뭔가를 찾느라 여념이 없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에 반해 현실 세계에서 삶은

느리게 유기적으로 펼쳐집니다.

비디오카메라로 30분 동안 걷는 모습만 촬영한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되겠지요.

블록버스터가 판을 치는데

정상 속도의 삶을 찍은 그런 영화를 누가 빌려 보겠습니까?

 

마음은 특수 효과와 드라마, 빠른 속도의 삶에 끌리기 일쑤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환상이 고통의 근본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기에 열심히 매달리는 까닭은

그것들이 텔레비전과 영화처럼 재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른 여느 중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환상은

만족을 모르고 채워질 줄을 모릅니다.

 

여러 시간 동안 내리 텔레비전에 빠져 있으면 그렇듯이

생각과 환상은 우리에게 공허감만 안겨줄 뿐입니다.

다행히도 공허한 생각 속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됩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 됩니다.

-산책하러 간다면 산책만 하면 됩니다.

-이를 닦을 때는 이를 닦는 일에만 충실합니다.

 

삶에 충실하려면

삶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됩니다.

지금 당장의 현실에만 주목하고

그것과 관련된 기억 같은 것에는 상관하지 않으면 됩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준비도 필요 없고, 잘못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수행이란

쉴 새 없이 노래를 틀어대는 MTV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세상의 소음을 줄여주고

분산된 마음을 하나로 모아줍니다.

마음은 날뛰는 말과 같아서

혹하게 만드는 다음번 환상이나 기억을 좇아가느라 바쁩니다.

 

영적수행은

날뛰는 말에 고삐를 매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은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줍니다.

놀라운 것은 삶에 충실한 것 자체가

참으로 큰 만족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자를 많이 먹는 것과

영양식을 먹는 것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늘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 리처드 클라크께서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채워줄 수 없는 것들은

먹어도 먹어도 계속 갈증만 나게 할 뿐입니다.”

 

마음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마음은 우리에게 자양분을 줄 수 없습니다.

이 순간의 교묘히 편집된 몇 가지 판본이 아니라

이 순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마음에는 지금 이 순간과 비교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진정한 자양분과 생생한 살아있음을 찾을 수 있는 지점입니다.

 

어떤 기억이나 환상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기쁨에는 감히 미치지 못합니다.

 

마음을 악당으로 몰아붙이기는 쉬운 일입니다만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사물을 머리로 분별함으로써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잘못된 관념이 문제입니다.

 

마음을 악당으로 몰아가면

우리는 마음을 마음으로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게 됩니다!

 

이 순간을 껴안는 일,

전 존재로 이 순간 속에 뛰어들어서

거기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마음과 함께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분별하려고 애쓰면서 마음이 날뛸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조차

, 저것 좀 봐. 정말 놀라운 일이야!”라며

호기심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일 분에 천 리 길을 달려가면서

이 순간의 수백만 가지 다양한 변화 속을 통과합니다.

 

우리가 마음이라 부르는

거대한 신비의 이런 표현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은 거대한 신비의 질주 같은 것입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음을 굳이 버릴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마음은 멈추거나 없앨 필요 없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과 싸우지 않는다면

마음의 분주하고 강박적인 행위들과 더 이상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내 마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내 마음이라고 할 때의 나는 누구입니까?

누가 마음을 가진 것입니까?

마음을 가진 는 어떻게 생긴 존재입니까?

 

마음이란 한시도 쉴 줄을 모르고

온갖 일에 참견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호기심 많은 원숭이와 같습니다.

 

당신의 가장 강렬한 감정조차도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무엇이든 개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나요?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서 지금 하고 있는 경험은

라디오에 더 가까워서,

사물들을 창조하거나 발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수신할 뿐이라면 어쩌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지금 이 방에서 노래를 들으려면

라디오가 필요합니다.

그 모든 경험들은 사방에 둥둥 떠다닙니다.

그리고 당신이라 불리는 이 라디오는

욕망, 두려움, 사랑, 질투라 불리는 그 노래들을 들려줍니다.

 

심지어 나는 노래를 꺼버리고 싶다는 저항조차도

또 하나의 노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내면 경험이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해 전 어떤 음악가가 녹음했던 음악이

지금 들리고 있는 것에 더 가깝다면 어쩌겠습니까?

 

사랑의 노래조차도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드라마틱하고, 슬프고, 행복하고, 로맨틱해지는 것도

역시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단지 당신의 것이 아닐 뿐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들을 바꾸려고 하거나

더 오래 거기에 머무르려고 애쓸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노래는

결국 끝이 납니다.

연주 시간이 17분이나 되는 바이바이 미스 아메리칸 파이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끝이 없을 것처럼 계속되지만

결국엔 광고 방송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라디오는 CD플레이어와는 다릅니다.

CD플레이어는

당신이 원하는 곡을 들을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지만,

라디오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어떤 음악이 나올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행복한 노래가, 어떨 때는 슬픈 노래가, 어떨 때는 신나는 노래가 나옵니다.

거대한 신비는 너무나 지혜로워서

지금, 이 순간 무슨 노래를 틀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무슨 노래를 들려줄지는 거대한 신비가 결정합니다.

그리고 일단 노래가 나오기 시작하면

당신은 그것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나오는 동안에는 그저 들어주는 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당신이라 불리는 이 라디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당신 개인과 무관한 것이라는 인식은

일어나는 것들에 훨씬 더 쉽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줍니다.

개인적인 것들이 아니기에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의 크나큰 수수께끼는

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누가, 무엇이 인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더 기이한 의문이 제기됩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과,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을 인식하는 무엇 사이에

어떤 경계가 존재할까요?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무엇은

경험 자체와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요?

 

이 곡들을 듣고 있는 누구는

이 거대한 거대한 신비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이 노래들도

거대한 신비로부터 흘러나오고

듣는 행위 또한 똑같이 거대한 신비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신성한 존재라는 거대한 마당이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마당은 앎의 장소가 아니라,

깜짝깜짝 놀라는 발견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무슨 노래가 나올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다음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에만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채널 [지혜별숲] 이었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평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