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책낭독] 의식마음의 탄생과 소멸은 무의식이 만든다 | 깨달음, 순일스님

Buddhastudy 2024. 3. 4. 19:28

 

 

가끔 꿈을 꾸면

깨어있을 때의 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냥 꿈이려니 넘어가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해요.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얼굴도, 성별도, 국가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듯 꿈속에서 활동을 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오늘은 이와 관련된

의식, 무의식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깨달음 순일스님

출판사는 도서출판 여래

 

--

1부 의식, 무의식, 본래 마음의 성격

<의식, 무의식, 참마음의 역할>

 

다음 페이지의 그림을 보자.

칼 융의 빙산을 그린 그림이다.

맨 윗부분이 의식이다.

바닷물 위에서처럼 서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아래에 더 크게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무의식이다.

의식보다는 더 큰 부분이지만 여전히 경계가 있다.

나와 너를 가르는 경계이다.

 

그 아래는 전체가 열려 있다.

참나(참마음)이다.

그곳에는 너와 나를 가르는 어떠한 경계도 없다.

즉 한마음이다.

 

의식도 마음이며, 무의식도 마음이며, 참나도 마음이다.

즉 셋은 모두 하나의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의식만을 마음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의식과 무의식을 마음이라 정의하고

참나는 참마음이라고 정의하여 글을 써나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식마음으로 영생을 하고자 한다.

의식은 기억의 연결성을 갖기 때문이다.

즉 기억하는 마음으로 영원히 살고 싶어한다.

 

허나 거꾸로 기억할 수 없는 마음으로

즉 연결성이 없는 마음으로 영생하라고 하면

대부분이 싫다고 할 것이다.

연속적으로 연결성이 있는 의식마음으로 영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마음의 기저에는 무의식마음이 있다.

이 무의식 마음을 흔히 저장식 또는 함장식이라고 한다.

경향성을 저장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무엇이든 저장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컴퓨터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우선 칩이 있어야 한다.

즉 무슨 정보든 저장할 수 있는 칩

무의식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후에 소프트웨어 의식마음, 응용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칩이 우선이다.

마찬가지로 무의식마음이 우선이며

그 다음에 생긴 응용프로그램이 바로 의식마음이다.

 

따라서 굳이 주종을 나누라면

무의식이 주인이고 의식이 종이다.

그러면 무의식마음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칩이라는 것이 그냥 생길 수 없듯이 무의식마음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롯된 애초가

일단 참나마음, 참마음이라고 가정하고 이야기해 나가 보자.

 

그림1이 맞다는 가정 아래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즉 참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의식마음에서 무의식마음으로 일단 뚫고 또는 녹이고 들어가야 하며

그러고는 더 뚫고 녹이고 들어가

종래에 참마음에 도달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여정이 사실이라면

의식마음은 가 아니고, 무의식마음도 가 아니며

참마음이 참나라는 추론이 성립된다.

 

몸과 마음 중에서

어느 것이 인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더 본질적인 것을 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둘 중 더 사라지지 않을 듯한 것,

즉 불멸일 듯한 것을 라고 한다는 뜻이다.

 

참마음이 왜 불멸인지는 더 나아가면서 이야기하겠다.

 

 

<무의식이 꿈을 만드는 구조>

무의식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찌 유추해 볼 수 있을까?

프로이트나 칼 융은 무의식을 연구하였다고 들었다.

하지만 의식마음으로는 무의식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사람의 꿈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꿈과 그 사람의 일상의 마음을 대비하여 꿈을 해석한 것이다.

 

핵심은 이다.

즉 무의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을 연구하였다는 것은

무의식마음이 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꿈이란 무의식의 표현이다.

의식마음이 잠들면 즉 스위치가 꺼지면 무의식마음이 드러난다.

이 무의식마음에 하루 동안, 또는 살아오면서 저장되었던 생각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꿈이다.

 

이러한 꿈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과학이 말하길 보통 성인들의 경우

수면 중에 약 두 시간 넘게 꿈을 꾼다고 한다.

즉 꿈을 꾸었다가, 잠든 상태였다가, 다시 꿈을 꾸었다가 한다.

 

우리는 이렇게 꾸는 꿈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는 꿈은 잠에서 깨기 직전의 것뿐이다.

즉 새벽 3시에 꿈을 꾸었는데

깨지 않고 푹 잠들어 아침 8시에 일어났다면

그 꿈은 기억하지 못한다.

허나 새벽 3시에 꿈을 꾸었고 그때 잠에서 깨어났다면

그 꿈은 기억한다.

 

 

<현실의식과 꿈의식의 기억의 비연결성>

아침에 비몽사몽간에 꿈을 꾸었다면

즉 꿈의 의식과 대낮의 생시의 의식의 중간상태라면

그 꿈은 기억한다.

꿈의 의식에서 생시의 의식으로 돌아오면서

둘 사이에 교집합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둘 다 같은 의식이라는 말을 쓰긴 하였지만

사실은 다른 의식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의식, 흔히 마음이 라고 믿는 중요한 근거는

아침 8시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기억의 연결선상에 있다는 데 있다.

 

아침 8시부터 잠들기 전까지 기억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하여 기억이 뚝뚝 끊어져 하루 일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라고 믿기는 힘들다.

아마 그러한 의식마음으로는 영원히 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헌데 꿈의 의식마음과 현실의 의식마음이

서로 기억의 연결성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즉 대낮의 의식마음은

수면으로 들어가면서 완전히 잠들었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의식마음의 90퍼센트는 잠들고

나머지 10퍼센트는 잠이 안 든 상태에서 꿈을 만들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최소한 아침에 깨어나서

새벽에 꾼 꿈들의 10퍼센트는 기억해야 한다.

허나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또한 우스개로 퍼센트를 이야기하였을 뿐,

의식이 10퍼센트라도 잠들지 않아서 꿈을 창조한 것이라면

모든 꿈을 명료하게 기억하여야 한다.

 

의식이란 프로테이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끌어낼 수 있는 추론은

생시의 의식마음이 꿈을 꾼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꿈을 꾸었는가?

또는 창조했는가?

 

의식마음이 아닌 무엇이 꿈을 꾸었다는 것은 이미 알았다.

그것은 안의식마음’, ‘비의식마음등 아무 용어나 만들어도 된다.

그러나 현대용어로 엄연히 무의식이라는 단어가 있으므로

그 말을 차용하여 무의식 마음이라고 해보자.

 

앞에서 말하였듯이

모든 경향성을 저장하는 마음이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위와 같이 의식마음과는 다른 무의식마음이 존재한다.

 

만약 하나의 마음이라면

의식마음은 무의식마음과 기억의 연결성을 가져야 한다.

즉 온밤 내내 많은 꿈을 꿀 때

그것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대낮에 모든 것을 명료하게 알고 보는 것처럼.

 

허나 의식마음은

대낮에만 모든 것을 명료하게 알고, 보고, 행동할 뿐

잠이 들면 그대로 꺼져버린다.

그러므로 의식 마음과는 다른 어떤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무의식마음이라 이름붙이고 설명해나가자.

 

 

<의식마음과 재생의식마음>

의식마음이 잠들고 나면 무의식마음이 꿈을 만들었다.

헌데 잠에서 깨어나면서 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꿈에서 무의식마음이 만든 의식마음은 무엇인가?

즉 꿈속에서도 분명히 가 있고

등장인물들여러가지 배경들이 나온다.

 

이 중에 는 꿈속에서도 의식마음이 있다.

꿈에서 활동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려면 의식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헌데 이 꿈속에서의 의식마음과 생시의 의식마음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는 의문이 들 것이다.

 

이 둘은 다르다.

만약 같은 것이라면 둘은 기억의 연결선상에 있어야 한다.

즉 생시의 의식마음이 잠들었을 때에도

꿈속의 의식마음과 기억의 연결성을 가져야 하며

생시의 의식마음이 꿈속에서도 모든 것을 명료하게 알고 보아야 한다.

또는 깨어나서 한밤 동안에 있었던 모든 꿈과 잠꼬대를 기억하여야 한다.

 

허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꿈속의 의식마음과 생시의 의식마음은

서로 기억할 수 있는 연결성을 갖고 있지 않다.

즉 둘은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결론을 추출할 수 있다.

의식마음이 잠들자 무의식마음이

또 다른 하나의 의식마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생시의 의식마음이 죽자

무의식마음이 또 다른 재생의식마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의식마음과 재생의식마음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대동소이하다.

기본마음이 무의식마음이다.

즉 경향성이 저장된 무의식마음이 같으므로

그것에서 비롯한 의식마음과 재생의식마음은 동일하다.

 

비유하면 컴퓨터가 다 망가져도

칩만 있으면 다시 컴퓨터 케이스를 만들어

같은 프로그램 또는 화면을 재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꿈속의 배경과 생시의 환경이 달라도 행동 패턴은 똑같다.

즉 현실에서 어떠한 상황만 조성되면

화를 내는 사람은

꿈속에서도 비록 환경과 배경은 달라도

상황의 조건만 맞으면 똑같이 화를 낸다.

 

현실에서는 참더라도 오히려 꿈속에서는 더 참지 못하고

적나라하게 화를 낸다.

꿈속의 마음은 속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무의식마음은

의식마음보다 덜 응용적이기 때문이다.

즉 의식마음보다 더 있는 그대로적이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무의식마음은 인과적이다.

그러기에 의식마음보다 덜 교활하다.

있는 그대로의 성격을 표현한다.

 

헌데 작게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의식마음이 소멸하고 재생의식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둘은 기억을 할 수 없다.

즉 기억의 연결성이 없다.

 

이러하다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추출할 수 있다.

무의식마음이 더 근본적인 마음이며

의식마음은 무의식마음의 쓰임이라는 것이다.

 

의식마음은 소멸하기도 하며

또 그러한 의식마음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무의식마음이기 때문이다.

즉 만든 자가 늘 주인이며 만들어진 자는 늘 종인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꿈꾸는 잠이나 꿈 없는 깊은 잠에서도 깨어있지 못한 의식마음이

진짜 마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꿈만 꾸면 사라지고

새로운 재생의식이 생기는 생멸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꿈속에서의 여러 모습>

꿈을 꿀 때 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자.

즉 남자라면 여자로 꿈속에 나타난 적은 없는지?

또는 여자라면 남자로 나타난 적은 없는지?

또는 사람이라면 동물로 나타난 적은 없는지?

또는 괴물로나 그 외 이상야릇한 모습으로 꿈에 등장한 적은 없는지?

 

아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꿈을 꾼 적이 있는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무의식마음에 저장된 경향성대로

의식마음의 체, , 모양, 모습을 만든다.

체란 유체일 수도 있고 육체일 수도 있다.

어떠한 체가 되었건 그것을 만드는 것은 무의식마음이다.

 

무의식마음이 의식마음을 만들 때 동시에 체 역시 만들어진다.

즉 의식마음과 몸은 동시에 만들어진다.

이것으로 의식마음이 진짜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의식마음과 몸이 진실한 것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같은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야 한다.

허나 우리가 꿈을 꿀 때 대부분은 같은 모습으로 나오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도 등장한다.

 

DNA는 설계도이다.

껍데기는 늘 설계도대로 만들어진다.

무의식마음은 모든 것을 저장하고 있는 마음으로

설계도와 다르지 않다.

 

그 무의식 마음에 저장된 대로만 의식마음이 만들어지며

몸 또한 그와 같다.

 

 

오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