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당신은 이래서 지금껏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Buddhastudy 2024. 3. 14. 20:05

 

 

언어가 없다면 과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언어가 없으면 구체적인 생각을 이어 나갈 방법이 없게 됩니다.

막연한 느낌만 자욱하게 의식을 메우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언어가 발전하는 만큼 인간의 의식도 자라납니다.

특히 수학의 언어는

논리적인 사유를 보강함으로써

문명의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류가 만들어 온 언어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3차원에 국한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터득한 고차원의 진리를 담을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세존이 무상정등각을 성취했을 때만 봐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깨달음을 전할 언어가 없으니

전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깨달음을 알려달라며 아우성입니다.

언어가 없기에 깨달음이 뭔지 모르면서도 그렇게 목을 매는 겁니다.

 

세존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헤아려 보니 딱 하나이더군요.

그것은 바로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언어가 없어 깨달음을 전할 수는 없지만

괴로움의 소멸 같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으리라.”

 

세존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법을 펴게 되고

이 가르침이 남아 불교를 이룹니다.

세존은 괴로움의 소멸에서 오는 열반과 해탈을 거론하면서도

그 너머에 깨달음이 있다는 가르침을 빼놓지 않습니다.

훗날 열반과 해탈에 만족하지 않는 상근기의 제자들로 하여금

참된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지요.

 

그렇게 불제자들은 열반과 해탈의 떡을 빚으면서

기나긴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상근기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나오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차원의 진리를 두드리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전하지 못한 지혜가 과연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이 하나로 모여

결국 공사상을 도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공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이것을 설명할 언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기론을 가져다가 공을 푸는 언어로 쓰게 됩니다.

 

인연의 조합에 의해

자성이 없는 특수한 상태로

정의를 내린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상 공을 연기론에 빗대게 되면

차라리 공이 없느니만 못하게 됩니다.

왜곡될 바에는 차라리 그냥 놔두는 편이 나으니까요.

 

이때 어떡하든 언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특출난 수행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용수입니다.

 

용수는 깨달음을 표현할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립문자와 언어도단을 운운하며 체험 속에 숨으면

유사 깨달음의 소가 더욱 미혹된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지 않았고요.

 

세존께서 그러하셨듯이 진의를 전할 언어는 영원히 만들어 낼 수 없구나.

지금처럼 3차원 언어를 쓰면

그 어떤 논리적 체계를 세운들 도로 3차원이요.

그렇다고 언어를 멀리하고 체험 속에 빠진다면

더욱 미혹되어 운명에 갇힐 뿐이로다.”

 

이런 번민을 하던 용수는

어느 날 기발한 생각이 돌발하여

뇌리에 전율을 일으킵니다.

 

고차원 진리를 전할 언어가 없다면

3차원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어떨까?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냄으로써

고차원 진리를 향하도록 방향을 트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리적 자각을 바라보지 못하고 체험을 운운하며

열반과 해탈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가히 구제불능일 것이다.”

 

용수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게 되고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중론]입니다.

 

3차원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

심지어 불법과 깨달음, 붓다마저 부정함으로써

고차원 진리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용수의 중론을 따른다면

어떤 말을 해도 전체의 부분이 됨으로써

일부만 성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경의 핵심 사상인

연기론, 무아론, 사성제, 팔정도, , 무주무상, 응무소주이생기심, 색즉시공공즉시색 같은

기라성 같은 명제들이

순식간에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변해버립니다.

 

진리라고 굳게 믿던 것들이

3차원 언어로 포장한 구질구질한 표현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불법을 날리고

붓다와 깨달음마저 소각시켜 버리면

언어가 사라진 뒤에 새로운 언어가 어슴푸레하게 남게 됩니다.

 

3차원의 언어를 포함하면서도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언어가 끊어진 체험을 포용하면서도

그것의 협소함을 인지하는 자유가 깃들게 됩니다.

 

물론 그 자유는 자유롭지 못함도 포함하겠지요.

그러면서 점차로 존재의 실상에 대한 명칭이

진리적 자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존재와 나에 대한 답을 찾게 되면서

깨달음이 없는 깨달음이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3차원 언어를 써서 깨달음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때의 깨달음은

수행자들이 여태껏 알고 있던 깨달음과는 너무나 다를 것입니다.

물론 그 깨달음의 아주 일부에

우리에게 친숙한 불법이 자리하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계시나요?

혹시 그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라

언어로 조합된 가상의 홀로그램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