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11편 당신이 옳습니다.

Buddhastudy 2011. 8. 8. 17:41

  방송 보기: 정토TV

스님 저의 집에 있는 보살의 선배가 있는데요. 그 분 남편의 성격이 상당히 괴팍하고 신경질 적이거든요. 그래서 불법을 만나기 전까지는 서로 이혼까지도 생각을 했었는데 불법을 만나고부터 남편이 옳습니다. 항상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잘 해줘라 그렇게 하니까 예전에는 물 떠와라 그러면 물도 안떠다 주고 당신이 떠먹어요. 이런 식으로 했는데 지금은 물을 컵에다 담아서 쟁반까지 받쳐 가지고 드십시오. 이렇게 하거든요. 그 남편이 그런 것을 받아먹고 그러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이년이 지나도 삼년이 지나도 그사람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가 잘나서 그러려니 이 여자가 진짜 이제 남편 모실 줄 아는구만 그런 마음을 품어서 그런지 그런걸 전혀 고치지도 않고 오히려 밖에 나와서도 오만방자한 그런 행위를 하기때문에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고, 그런 경우인데요.

저희 부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지금 원리 원칙이나 모범적인 기질이 있어서 계율같은 것을 잘 지키는 편인데 사물을 깊이 보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 같은 것이 부족해 가지고 여러 가지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것도 있고 그런 것을 저의 보살이 불법하면서 자기가 깨우친 바를 가지고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제일 처음에는 저도 ...

* * *

어떤 방법이 좋다. 이런 게 없어요. 자기 선택이에요. 지가 주먹으로 때리면 칼로 쳐버리면 되지. 뭐 겁날게 있어. 요즘 같은 좋은 세상에. 옛날에 힘만 갖고 할 때는 모지라지만 요즘은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여러 가지 무기도 있잖아. 전기도 있고. 뭐 전기 요새 전기 갖다 대면 탁하는 그런 거 갖고 있다가 남편이라도 덤비면 콱 찔러버리면 되지. 그렇게 세게 나가봐 아무문제가 없지.

그거나 그거나 다 똑같애. 그렇게 살아서 남편을 제압하는 게 행복하겠어? 비록 물 떠오란 소리도 안하고 슬슬기면서 지가 가가지고 적당하게 사는 게 행복하겠어. 이게 이웃 나라면 몰라도 부부가 같이 사랑을 나누고 사는데. 그런 식으로 제압을 해서 같이 살면 행복하겠느냐? 이게 중요하지. 행복하다면 그리 하면 되지 뭐. 뭘 못하겠어?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못하고 살겠어? 칼 갖고 남의 여자 몸도 뺏고 칼 갖고 남의 물건도 뺏는 놈도 있는데. 그 뭐 큰일이라고. 전두환이 같이 사람 죽이고도 살고. 그러는데.

뭐 저기 빌딩 큰 거 두 개씩 무너뜨리고 진짜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러고도 영웅되는 사람도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무슨 짓 하고도 못살겠어? 문제는 그렇게 해서 자기가 행복하냐 이거야. 그렇게 해서 행복안하다. 그래서 안하는 거요. 그러면 지금 말씀하신 데로 남편한테 맨 날 그래 물 떠오라는 거 갖고 싸우다가 남편을 딱 받들어서 물떠오라 그러면 부처님한테 청수물 올리듯이 쟁반에 받혀 ‘여기 있습니다’ 하고 갖다 주면 누가 좋아? 부인이 좋지. 부인이 그렇다니 부인이 좋잖아. 그러면 됐지. 뭘 더 얘기해.

남편이 뭐 특별이 못해졌어? 남편은 잘하고 있는데 왜? 옆에서 보고 괜히 왜 시비야. 부인은 아무 불만이 없고 남편도 잘하고 사는데 옆에서 왜 그래? 그렇게 했는데 부인한테 손해가 났다면 이건 인과법으로 안맞지 않느냐 이런 말이 있는데. 지금 수행이라는 건 뭐냐? 내가 그렇게 하는 것으로 끝나야 되. 그렇게 해서 남편이 바뀌는 사람도 있고 안 바뀌는 사람도 있고 나빠지는 사람도 있고 좋아지는 사람도 있고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좋아져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고. 나빠져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수행은 남을 바꾸는 게 수행이 아니라니까. 그래서 자기가 좋은 거라니까.

여기 꽃이 있으면 ‘아이고~ 꽃 예쁘다’ 이러면 내가 좋지 꽃이 좋은 게 아니잖아. 그런데 내가 니 좋아하니까 니도 나 좋아해라. 왜 자꾸 이렇게 생각하냐 이거야. 그건 남의 인생에 간섭이라니까. 왜 남의 인생에 간섭 하냐니까. 내가 그렇게 쟁반에 받혀 물을 떠다주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좋은 거요. 그렇게 떠다 주면 고맙게 생각하든지. 들고 차든지.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잖아. 그걸 이래라 저래라고 간섭하지 마라는 거요. 남의 인생에 자꾸. 수행이 아니오.

지금 저 분은 어떻게 생각하냐하면 이렇게 하므로 해서 남을 빨리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숙이는 게 상대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거는 두드려 패서 바꾸는 게 효과적이다. 하는 것과 동격이라니까. 그건 중생심이란 말이오. 아직도 남이 바뀌어야 좋은 거라고 생각하나? 지금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거요. 수행은 남을 바꾸는 게 아니라니까. 자기를 바꾸는 거지. 나를 바꾸는데 남편도 바뀌더라. 나만 좋은 게 아니라 이건 남도 좋더라.

그 케이스는 나는 좋은데 아직 남이 별로 안 좋아졌다. 이런 얘긴데 그 안좋아진 남이 안좋아졌다는 기준이 뭐냐? 남편이 아내가 그렇게 니가 물을 받혀 떠주니까 나는 정말 싫다. 이럴 때는 나는 좋지만은 남편은 나쁘다가 되는데. 내가 물을 떠나 받여주니까 받혀준 나도 좋고 받혀다 주니까 남편도 좋아하고. 그러니까 나도 좋고 남편도 좋잖아. 그런데 왜 그 남편이 앞으로 뭐 어떻게 해야. ‘아이고 내가 떠 올게’ 이래야 남편도 좋아진 거요? 내가 남편을 바꾸어서 내가 좋아진 경우지. 그건 수행이 아니야.

잘못하면 수행을 우리가 중생이 상대를 지 식대로 바꾸려다가 안된단 말이오. 요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되고, 요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까 특별한 꾀를 내서 남편을 바꾸는 방법을 지는 지를 탁 숙여 탁 바꾸는 고런 방법에 특별 비법으로의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건 동격이요. 동격의 선상에 있는 거란 말이오. 그 수행을 할 때는 수행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자기를 보느냐? 상대를 보느냐? 이것만 갖고 말하는 거요. 제가 옛날에 그런 얘기 했는데. 남편이 술 먹어서 못살겠다. 그래서 내가 죽겠다고 그래서 술상을 봐 드려라. 술이 보약이라고 기도해라.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술이 보약이라는데 뭐 남편이 술 먹는게 무슨 문제가 있겠어. 자기가 편안해 졌어. 자기가 편안해 지니까 좋았지. 그러니까 조금 더 시행하니까 남편까지도 술이 줄었어. 그걸 보자. 감복을 해 버렸어. 와~ 지난 20년을 해도 안 되든 게 이게 어떻게 이렇게 기적같이 바뀌나. 그래서 기도를 108배라는데도 300배로 더 열심히 했어. 그래서 스님한테 와서 돈 봉투에 100만원을 들고 와가지고 너무너무 좋아가지고 그래.

왜 그러냐니까.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는 거요. 부처님의 가피가 남편한테 내렸다는 거요. 내 기도에 감응을 했다는 거요. 그래서 내가 ‘이보살 기도 안하네.’ 그게 무슨 소리냐? 108배 하라는데 300배 한다. 내가 ‘기도 안하네’ 하는 거는 상대가 바뀌는걸 보고 기쁨을 삼았다는 거요. 이거는 벌써 중생심이란 말이오. 결국은 상대 바꾸는데 결국은 목적이 있다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기도 안하네. 이 말은 그 거란 말이오.

그런데 이 사람은 기도안하네 내 이 말을 듣고 뭐라 그러냐? 108배를 안한다는 얘기냐? 내가 요새 얼마나 했고, 보시도 하고, 막 좋아가지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경계를 논하기 때문에 그건 수행이 아니야. 그래서 ‘이 보살 수행안하구나.’ ‘스님은 좀 칭찬해 주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안한다. 그래요?’ 또 조금 있으면 또 못산다고 온다. 왜? 그러니까 더 빨리 바뀌라고 하루에 108배하라니까 300배하고 500배도하는데. 자기 한 만큼 이게 변화 속도가 안 되잖아. 그지? 그럼 불만이 또 생기나 안 생기나? 생기지. 그럼 또 바가지 긁겠지. 그럼 또 술 먹는 분위기로 가겠지. 그럼 또 에이 기도해도 소용없더라. 때려 쳐버려라.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이 경계해야 되는 거요. 수행 조금 했다 하면 이렇게 헷가닥 해서 빠질 수가 있어. 물 떠다 주면 내가 좋은 걸로 끝나야 이게 무주상 아니오. 그냥 베푸는 걸로 내가 좋다. 베풀면 주인이니까. 그런데 기대하는 마음을 내면 미움이 생긴단 말이오. 이런 게 심플하게 쉽게 설명한 게 뭐요? 예수님이 왼손이 하는 거를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이렇게 표현을 한 거요. 또 하나님이 너에게 하듯이 너도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하라. 이런 말도 있죠.

내가 막 무슨 죄를 짓고도 하나님이 나 좀 봐주기를 원하나 안 원하나? 원하지. 우리 인간이 그렇잖아. 지는 온갖 못된 짓 해 놓고도 좀 봐 주소. 그 안 봐주면 하느님이 아니오. 하느님이 아니지. 하느님이라는 건 마음이 탁 넓어 이런 나를 다 봐줘야 되잖아, 그지. 그런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에게 다 봐주라는 거요. 내가 다른 사람한테 한만큼 그 분도 나한테 할 거다. 그러니까 그건 조금 관점이 지금 잘못 잡고 있어.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거는 이 분한테 손해 날 일이 없으면 되.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손해지 않습니까? 이럴 때 나한테 질문을 해. 부처님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야. 손해 날 짓은 절대 안 가르치는 사람이야. 내가 봐서는 그래. 내가 갈수록 탄복을 해.

어째 요렇게 머리가 돌아갈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온갖 꾀를 내어 하는데 자기를 끝없이 해쳐. 우리의 삶은 자기를 해친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면 자기가 좋아.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아~ 아버님 죄송합니다. 아버님 제가 어리석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으면 누가 좋으냐? 아버지가 좋으냐? 아버지는 똑같애. 아버지도 조금 기분 좋을 수는 있지만. 훌륭한 아버지를 둔 내가 좋지. 내 인생이니까. 우리아버지는 인간도 아니다. 치한이다. 이러면 지는 누구의 딸이다? 치한의 딸이니까 자기 인생에 아무 긍지가 없어. 이게 다 자기를 위하는 길이야.

남편을 딱 존중하면 존중받는 사람과 같이 사니 내가 값어치가 있는 사람야. 아시겠어? 이런 미친 인간들, 돈에 미친 인간들, 그런 미친 인간 틈에 끼어있는 지는 아무런 자존심도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 얼른 들으면 스님얘기나 부처님 얘기는 저렇게 하면 손해만 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이 드는데. 조금 더 생각을 해봐. 부처님이 뭐 하러 왕위까지 버리고 6년 고생까지 해서 남 손해날 짓 가르치겠어. 안 그래? 이 세상에 안 그래도 손해 볼 일 천지인데. 손해 보는 건 안 배워도 다 하는데. 거기다 손해 보는 일을 뭐 하러 밥 먹고 또 배우겠어.

우리는 뭔가 이익 같은데 그게 이익이 아니에요. 인생을 조금 찬찬히 한 번 살펴보세요. 자기 인생이 어떤지. 여러분들 옛날에 노예들 보고 ‘아이고 바보같이 거기 매어 사나’ 했죠? 신분에 매어 살았잖아 그죠? 농부는 어디 매어 살았어요? 토지에 매어 살았지. 여러분 지금 어디에 매어 살아요? 임금에 매어 살잖아. 똑같아.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이게 노동해방이 아니야. 임금이 더 올라가고 휴식시간이 는다고 해방이 아니야. 그건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야.

조금 본질을 자기 삶을 잘 관찰해서 자기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되. 자기를 해치지 말아야 되. 아까도 어떤 분이 저는 수행을 열심히 했는데도 자꾸 이렇게. 화를 안내야 되겠다. 해도 자꾸 화가 나고. 그래서 요새는 수행을 하다가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서 자기 잘못한 거에 대해서 너무 민감해져가지고 그래서 소화도 안 되고. 그럼 수행 때문에 소화가 안 될까? 이제까지는 남을 보고 잘못하는 거 잘하는 거를 너무 따지고 이렇게 했단 말이오.

그런데 이게 화살이 어디로? 뒤집어져서 자기한테로 돌아온 거요. 자기는 화를 안 내는 사람. 자기는 아주 성스러운 사람이 돼야 되는데. 이게 지 맘대로 빨리빨리 안 되잖아 그죠?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기 행위에 대해서 자꾸 후회를 한단 말이오. 후회를 하는 건 수행이 아니에요. ‘아~ 내가 또 화를 냈네.’ ‘아~ 내가 또 생각 잘못했네.’ 이거로 끝내야 되요. 잘못한 남도 수용 하듯이 잘못한 누구도? 자기도 수용해야 되. 잘못하는 이게 중생이거든. 중생도 불쌍히 여겨야 되. 자기 합리화하고는 틀려요.

지는 온갖 거 다 옳다 그러고. 이제까지 남을 용서안하다가 생각이 또 바뀌면 어때요 세상 사람들은 봐주는데 자기는 또 못 봐줘요. 그럼 안 돼. 다 똑같애. 그걸 수용해 내야 되. 이미 지나가버린 거니까. 그래야 에너지가 계속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작용하지. 지나간 거에 자꾸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된 다니까. 그만해라. 이 소리지. 말이 많다. 제가 그만하자니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