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눈앞이 살아있다!

Buddhastudy 2024. 5. 21. 19:05

 

 

진짜 불교가 뭐냐 하면은

공부하면 할수록 알아지는 게

그때는 우리의 심리 상태가 그래요.

뭔가 현실을 떠나서

뭔가를 찾으려고 할 때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있단 말이에요.

이게 아닌데라는 그런 심정이 있어요.

이게 아닌데라는 그런 마음으로 이것인 거를 찾으려고 하죠.

 

그래서 눈앞의 현실이 아닌

내가 만족스러운 어떤 거를 지향하는

아니면 그거를 얻으려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요.

그중에 하나가 우리가 깨달음이라든가

진실이 뭔가? 진리가 뭔가? 이런 거에 대한 추구고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공부를 하거든요.

 

사실은 부처님도 그렇게 시작을 했잖아요.

사문유관이 그거거든요.

성 밖으로 나갔을 때, 사람이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하는 그것이

그게 석가모니가 보기에는 그게 아닌 거예요.

그게 아닌 뭔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사문유관 중에 사문을 쫓아가는

그 마지막에 사문을 따라가는 것으로부터 출가가 시작된 거잖아요.

 

그게 우리들의 어떤 심리상태란 말이에요.

늙고, 병들어서 죽는 것이

그냥 늙고 단지 병들어서 죽는 게 아니라

[불만족의 상징적인 표현]인 거예요.

우리 삶의 불만족.

 

우리가 늙는 거, 병드는 거, 죽는 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그게 가장 [불만족의 대명사]와 같은 거거든요.

인간 삶에서.

 

그래서 이게 아닌데

그래서 이게 아닌 뭔가를 찾아 나서는 게

사문을 따라서 나서는 거죠.

우리의 어떤 공부하는 공부인들의 내적인 상태를 말한다고 저는 보거든요.

 

그래서 출가를 해요.

출가라는 게 뭐냐면

머리를 깎고, 그런 어떤 사회 속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걸 찾아 나선다이거예요.

우리가 십우도에서 말한 동자가 소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그러니까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난 세계를 찾아 나선다 이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중에 정각을 이루었다 그러면은

우리는 이쪽 세계를 떠나서 그쪽 세계로 가서

이쪽 세계인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고 접할 수 없는

특별한, 우월한, 아무나 갈 수 없는 그 세계에 도달했구나라고

그 연장선에서 우리 불교를 생각해요.

 

그래서 여기를 떠난 그쪽의 세계, 본국의 세계.

그래서 현실을 떠난, 이 불만족을 떠난 만족스러운 세계, 진리의 세계,

이렇게 생각을 하죠.

불교는 그런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그래서 우리가 길을 떠난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 공부 여정이 들어갔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불교는 결국은 뭐냐면

그 길이 끊어지는 거예요.

회피하거나 우회하거나 옮겨갈 장소가 끊어지는 공부인 거예요.

이 공부가.

 

자기 공부가 그렇게 돼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나의 현실은 불만족스러워.

이건 아니야. 그래서 뭔가가 있어

그걸 찾아가는데 그 여정 가운데

법문을 넣기도 하고,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이 추구를 하죠.

명상하기도 하고, 무슨 염불하기도 하고

무슨 다양한 전통적인 수행 방법을 한다거나 나름의 그런 거를 쫓아가는데

그래서 결국 어떤 세계로 도달하느냐?

진짜 도달해야 될 데가 따로 없어지는 게 불교구나.

 

그러면은 법이라는 것

지금 내가 마음공부 과정 중에

법문을 듣는다거나 이런 가르침을 들으면서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물론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짜 그 과정속에서 갈 데가 없어져 버리는 그 전환이 오는 게

진짜 불교공부라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하면 퇴로가 끊기는 느낌이에요.

현실 여기에 정확히 초점을 맞는 거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에요.

여기 이 현실의 정체를 못 봐서

우리가 헤매 다녔던 것이고, 다른 세계가 있었다고 착각했던 거지

다른 세계가 있다면 그거는 진정한 불법이 아니고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공즉시색이나 아니면 불이법이 아니에요.

 

불이법이라는 거는 둘이 없다라는 거거든요.

그럼 이 현실을 떠날 재주가 있으세요?

이것처럼 떠날 수 없는 게 없어요.

그럼 불이법이면

이거와 둘이 아니라는 게 불법이라는 거예요.

그건 뭐냐?

쉽게 말해서 이거라는 거예요, 그냥.

이거밖에 없다라는 거 갈 데가 없다라는 거예요.

 

[눈앞의 현실, 이거밖에 없다]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왜 불만족스럽고,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이거 아닌 뭔가 있다라는 [망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불교는 뭐냐면

정확히 눈앞에 있는 현실에 딱 들어맞게, 초점이 맞게

딴 데로 새는 눈이 끊어지는 공부에요.

 

자꾸 뭔가를 따로 두고 있어.

이거 말고 뭐가 있어

이거 말고 궁극의 진리가 있어

그게 망상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끊어지는 게, 분별심이 극복되는 게

그게 다 분별심이거든

그게 따로 두고 있는 마음이잖아요.

 

눈앞에 현실을 벗어날 재주 있으시면은 한번 떠나보세요.

근데 불법은 분명히 부처님이 불이법이라고 그랬거든요.

그럼 이건 떠날 재주는 없어.

불이법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둘이 아니라는 얘기거든요.

 

근데 이전과 다른 게 뭐냐?

예전에 이 현실을 잘못 보고 있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공부 과정을 들어가야 된다는 게

제대로 보는 그 눈을 키워주는 거고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마음공부라는 거얘요.

 

정확하게 눈앞에 초점을 맞게 하려고 그런 가르침을 펴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과정 중에 뭔가 따로 있다라는 그 분별심을 끊어놓는 거에요.

이 방편이라는 게.

 

결국 어디에 도달해야 되냐?

퇴로가 사라져야 돼.

우회할 만한 데가 없어져 돼

버린 숨을 곳이 없어져야 돼.

 

그게 뭐냐 뭘로 숨어들어요?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로 숨어드는 거야.

그게 둘이잖아. 그렇죠.

눈앞에 현실을 떠난 공부가 있다면 그건 둘이잖아요.

불법은 아니에요, 이법이지 그건.

불이법은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 과정에서

우회하고, 숨어들고, 뭐 진짜 각 잡고, 폼잡고, 망상부리고

그거 다 거기서 깨어나시는 게 이 불법 공부예요.

 

그럼 공부라는 게 어떻게 되냐면

정확히 현실이 곧, 이 삶이 곧, 눈앞에 있는 이 하나 하나가 곧

내가 도달해야 곳이었고, 바라봐야 될 곳이었고

떠날 수 없는 곳이었다라는 거를 깨달아야 돼.

근데 그 따로 있다라는 망상심을 조복하는 거예요.

 

그럼 뭐야?

불교처럼 쉬운 게 없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왜냐?

찾을 게 없고, 구할 게 없고, 지킬 게 없고, 옮겨갈 데가 없는 거거든.

근데 말이 너무 어려운 거야.

 

지금 여기에서 여러분이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게 [분별심]이거든요.

분별하는 마음이 가장 장애가 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그냥 눈앞에 이것은요

분별을 하든 안 하든 그냥 있습니다.

벗어날 재주가 없다고 하는 말은

나하고 상관없이 늘 이거야, 그냥.

근데 뭔가 따로 두고 있고, 벗어날 수 있는 거는

우리가 한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게 가능한 거예요.

 

그게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름은 마음이 됐든, 불법이 됐든, 진리가 됐든, 도가 됐든

아니면 이상세계가 됐든, 유토피아가 됐든

근데 다 한 생각 일어나서 그게 되는 거예요.

 

그거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안 하거나 상관없이, 항상 한 게 아니고

생각할 때만 있는 거예요, 그것들은.

그건 사람마다 다 다른 겁니다.

사람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거든요.

 

근데 눈앞에 있는 이거는

저절로 드러나는 이거는

이거에 대한 분별은 또 다를 수가 있죠.

이름이 뭐다, 이거다 저거다, 지식과 정보는 다를 수 있는데

그냥 이 자체는요.

우리의 그 분별하고는 그 분별 의식하고는 상관없이 늘 이것입니다.

그냥 이것이에요.

저절로 이렇게 펼쳐진 세계는.

 

그냥 이것일 뿐인데

이게 머물러 있지도 않고, 고정돼 있지도 않고

그냥 순간순간순간순간

이것도 사실은 뭐가 있다고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뭐가 있다라고 하는 것도 한 생각이거든.

근데 여기를 떠나서

어디 도를 구하거나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이 그냥 있는데, 뭐가 있다 없다라고 하는 거는

여기서 일어난 한 생각에 의지했을 때

있다 없다가 되는 것이고

맞다 틀리다가 되는 것이지

그냥 이거는 뭐라고 할 수는 없어.

근데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에요.

다 드러나잖아 저절로, 다 드러나죠.

저절로 들리고, 저절로 보이고, 저절로 생각하고

생각의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저절로 다 일어나고 있어요, 저절로.

 

그러니까 눈앞이 깨어 있고 눈앞이 살아있는 것이지

우리가 깨어 있고 살아있는 뭔가를 얻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눈앞이라는 것도 사실 방편의 말이에요.

눈앞이라고 고정시켜버리면 안 돼요.

 

말하자면 찾지 말라고 눈앞을 얘기하는 거예요.

눈앞이 있어서 눈앞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어디 따로 두고 찾지 말라고.

눈앞은 우리가 찾지 않아도 항상 눈앞이니까

눈앞을 또 고정시켜 버리면 그것도 분별에 빠진 거죠.

 

그러니까 이게 참, 말이라는 게

말의 속성은 뭔가 분별이고, 딱 규정하는 건데

달리 이 소식을 전할 길이 없어서

쉽게 메이게 만드는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불가피하게.

 

근데 거기서 진짜 전하고 싶은 거는

어떤 언어가 아니고

지금 눈앞에 지금 실상, 현실

지금 순간순간순간순간 소리도 일어나고, 감각도 일어나고, 생각도 일어나고

이거는 늘, 늘 변함이 없어요.

 

여기서 한 생각에 빠지면

도를 구하고, 깨달음을 구하고, 불교를 구하고, 불교를 추구하고 이런다고.

생각의 내용은 상관없습니다. 이름은 상관없어요.

 

변함없는 건

진짜 눈앞이 깨어 있고, 눈앞이 살아있고,

모든 창조가 다 여기서 일어나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긴 일어나는데

일어난 게 머물러 있는 것도 없고

사람마다 똑같은 것도 없어요.

그냥 뭘 몰라요, 뭐가 뭔지 몰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떻게 얘기할 수가 없어.

근데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다 살아 있고, 깨어 있고, 머물러 있는 게 없어요.

 

머물러 있는 게 없다라는 말은

다른 관점에서 얘기하면

그건 살아있다는 얘기거든.

머물러 있으면은 죽은 거잖아.

 

우리가 살아있다는 표현 어떻게 해요?

움직이니까 살아있는 거지.

눈앞이 살아있고, 눈앞이 깨어 있고

이 깨어 있음이 분명한데

절대 말을 붙이면 안 돼.

말의 속성을 이해하셔야 돼요.

말이라는 거는 다 규정입니다. 규정

말로 잡으려고 하면 안 돼요.

직접 맛보시라. 이거지.

 

불교는 뭐냐?

그래서 손가락 드는 거, 이거 다

불교가 뭐냐?

이거 다 하는 게 그거야.

이게 뭐 어디 우리 생각 속에 있습니까?

법이라는 게 법이 뭡니까?

곧바로 가리켜 보이잖아요.

지금 이것밖에 없다.

 

이것이라고 눈앞의 현실이라는 어떤 테두리를 그으시면 안 돼요.

공부가 아주 섬세하게 들어가야 돼요.

왜냐면 자기도 모르게 미세하게 잡고 있는 망념들이 있으면

그게 분별심이거든.

그게 딱 하나가 가려버리면

이 전체를 확연하게 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시야를 가려버리면

먼지 티클 하나라도 안경에 묻는다거나 눈에 묻으면

시야가 흐려지잖아요.

말끔하게 깨어나야 된다는 건

단 하나도 잡고 있는 게 없고, 규정하고 있는 게 없고, 지키는 게 없고, 추구하고 있는 게 없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완전 분별심에서 깨어나야 된다, 분명해져야 된다는 게 그거예요.

그래서 어떠한 것도 잡고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의지하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공부를 좀 오래 하신 분의 자세한 안내가 필요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