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95. 원효스님에게 배우는 몰입사고의 비밀 (III)_윤홍식

Buddhastudy 2014. 3. 23. 19:51

출처 : 홍익학당

 

 

원효스님 거는 짧아요. 금강삼매경론 중에서 짧은 한 대목을 제가 추렸습니다. 여러분 몰입하시는데 팁이 되라고. 만약 정신이 하나의 대상에 머물러 있는데, ~ 똑같아요. 또 몰입의 얘기를 합니다. 마음이 한 가지 대상에 몰입하고 있는데, 흐리멍텅하거나 어두워서. 정신이요, 꼭 잠에 빠진 것처럼 무의식에 빠져서, 정신을 차려서 그 대상을 붙잡을 수가 없다면, 이것은 혼침이다. ~ 이게 구주심에서 나왔던 건데, 요 코끼리랑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올바르게 얻는데 제일 방해가 된 게 뭐였냐 하면, 한 대상에 몰입하려고 하는데, 산란, 거기서 원숭이가 그려졌죠? 꼬리달린 원숭이. 원숭이 아니면 혼침. 혼침은 어떻게 표현됐나요? . 코끼리가 시커멓게 표현됐어요.

 

그런데 코끼리가 하얘졌으니까, 혼침. 무의식에 빠지지를 않아요. 원숭이가 없어졌기 때문에 저 코끼리는 또랑또랑해요. 환하고 또랑또랑한 마음이 몰입이 잘 됐다는 얘기고, 저 불검을 들고 있다는 거는 판단까지 잘해요. 훤히. 아무리 어두워도 불빛을 갖다 대면 훤해지죠. 여러분 심사에 어두운 일들을 이 몰입하는 마음으로 딱~ 살펴보면요, 환하게 옳은지 그른지가 가 다 보인다는 거예요. 결국 이게 한 작업이에요. 합쳐서. 몰입이 안 되면 절대 지혜도 없습니다. 정신이 이미 어두운데, 무의식에 빠졌고 산란한데, 원숭이를 따라가고 있거나 아니면 시커먼 어둠에 빠져있는데, 어떻게 올바른 판단을 합니까? 이게 두 개가 한 문제에요.

 

그래서 원효대사는 뭐라고 하냐하면 정신이 한 가지 대상에 집중은 못하고 혼침에 빠져 있는 거, 요게 지금 문제다. 이 얘기를 하시다가, 그런데 만약에 정신이 하나의 대상에 머물러 있는데도 혼침에 빠지지도 않고, 어두워지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으면, 산란하지도 않는다면, 원숭이도 안 따라가고 어둡지도 않는다면, 그러면서 정신을 차려 자세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다면, 원효대사도 반드시 몰입사고를 할 수 있냐고 물어요. 여러분 진짜 명상 잘 드는 거는 여러분 이렇게 생각 안하시죠? 명상에 끝내주는 건 무조건 나에 대한 몰입이라고만 생각하시죠? 대상을 다 잊어버리고 들어간 몰입. 지금 원효스님은 뭔 몰입을 얘기 하냐하면 대상에 대한 몰입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대상에 대해서 몰입했을 때, 기민하게 선악판단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올바로 깨어있는 게 아니다. 그런 몰입은 지금 선악판단, 지혜를 얻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나에 대한 몰입은 몰입 충전에 도움이 되는 거지, 실제 대상에 대한 몰입을 할 때 몰입 사고를 끌어다 쓸 수가 없으면 올바른 깨어있음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삼매에만 얼마나 잘 들어 있느냐? 중시하는 그런 얘기들 많죠. 모든 걸 잊고 나로만 순수한 존재, 열반으로, 순수한 참나로 얼마나 머물러 있느냐? 이런 거 가지고 공부 잘했다고 얘기하는 거랑, 원효스님은 괘를 달리합니다. 원효스님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가지고 그 대상을 정신 차려서, 바르게 생각하고 연구할 수 없다면 삼매라고 보지 않은 겁니다. 아예, 이건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신 거예요.

 

그것만이 삼매다. 그게 진짜 삼매다. 지금 제 얘기 들으시면서 정신이 고요하고 선명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삼매상태입니다. 지금 삼매 상태에 들어계신 거예요. 다른 삼매를 찾지 마세요. 나를 지금 못 봤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보고 있는 놈이 나에요. 슈퍼의식이 다 드러났는데, 난 슈퍼의식이 이걸 놓치고 지금 저 강사의 말만 듣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고요. 제 얘기 들으시면서 깨어 있다고 생각하셔야죠. 이해되십니까? 나에 대한 몰입에만 집착하지 마세요. 대상에 대한 몰입에 잘 드는가가 진짜 삼매의 고수다. 달인이다. 몰입을 잘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경지는요, 쓸 수 있을 때에요.

 

대상에 딱~ 몰입해서 원하는 정보를 끌어올 수 있을 때, 우리가 삼매에 제대로 들었다라고 한다는 겁니다. 원효스님 말씀이요. 따라서 보십시오. 이제 한방 더 먹입니다. 나에 대한 몰입만이 몰입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몰입 잘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한 다음에 한방 덕 먹입니다. ~ 대상도요, 생각하고 살필 수 있느냐? 깨어서 몰입 사고를 할 수 있느냐로 혼침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혼침에 빠지지 않다면요. 기민하게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 나 삼매에 들어서 생각을 못하겠어.” 그러면 원효스님은 삼매 아닌 건 아니지만 진정한 삼매는 생각도 할 수 있어야지 왜 생각을 못하는 거냐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생각할 수 있다는 걸로 저 혼침과 구별된다.

 

깨어서 생각할 몰입사고를 할 수 있다는 거, 그냥 생각이 아니고요, 분별심이 아니고, 몰입해가지고 뭔가를 판정할 수 있다는 게 저 무의식에 빠져있는 혼침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하나의 대상에 머무는 것과 여러 가지 대상을 옮겨 다니는 것으로 삼매와 혼침을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님을 좀 알아야 된다. 이 말이 뭔 말이냐 하면요, 우리는 한 가지 대상만 몰입하고 있으면 몰입 잘하는 줄 아는데, 몰입을 잘한다는 건요, 혼침에 빠지지 않고, 몰입사고를 할 수 있느냐? 깨어서 판단할 수 있느냐 이기 때문에, 이게 핵심이기 때문에 한 가지 대상만 보면서 혼침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 그러니까 가능하거든요. 한가지 보고 있다고 해서 삼매에 든 게 하니라는 겁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중에도 늘 몰입해가지고 판단할 수 있으면 그게 더 훌륭한 삼매라는 거예요. 마지막 말씀은 뭐냐 하면요, 한 가지만 보고 있다고 해서 삼매가 아니라는 겁니다. 한가지한 가지 매순간 한가지죠. 여러 대상을 옮겨 다니면서도 계속 한 가지. 그 순간에는 한 가지밖에 없잖아요. 한 가지를 오래 붙잡고 있다고 삼매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이 계속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데, 여러 가지마다 다 집중해가지고 몰입 사고를 할 수 있으면 그게 더 훌륭한 삼매라는 얘기. 원효스님은 평생 이렇게 사신 분이에요. 왜냐?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고 책을 쓰고 하신 분이에요. 계속 이러고만 계신분이 아니라고요. 몰입력을 충전했다가 잘 쓰셨던 분들이. 큰 보살은요, 잘 쓰는 분들이 큰 보살에 올라갑니다.

 

계속 나에 대한 몰입에만 들어가 있으면요, 많이 가야 1급이나 가요. 그런데 대상에 대한 몰입에다가 슈퍼의식을 끌어다 쓰면서 선악판단을 잘하는 분들은 10지까지도 가요. 그 힘으로 가는 거예요. 두 개가 천지차이입니다. 나에 대한 물입, 지금 원효스님 아예 얘기도 안하고 있죠. 진짜 몰입은 진짜 몰입 잘했냐? 못했느냐는 어디서 판정이 나느냐? 대상에 대해 몰입할 수 있느냐고, 그 대상에 대해 물입해서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느냐고, 더 나아가서는 수많은 대상을 옮겨 가면서도 그걸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 이게 진짜 어려운거라고 얘기를 하신 겁니다. 이게 몰입사고에 아주 핵심이죠. 그래서 원효스님한테 지금 몰입 사고하는 법을 지금 배우신거에요. 한 가지 세상만 고집하지마시라는 겁니다. 그게 진짜 삼매가 아니고요, 자유자재해야 진짜 삼매입니다.

 

그래서 이 대상에 대한 몰입만이 진짜 삼매라는 게 아니고요, 대상에 대한 몰입까지도 자유 자래로 쓸 수 있어야 진짜 삼매라는 겁니다. 나에 대한 몰입은 당연한 베이스고요, 본체와 작용이 잘 돌아갔을 때 진짜 삼매지, 본체만 집착해있는 삼매는 진짜삼매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이런 마인드면요, 이런 마인드에 보살이 세상을 어려워할까요? 그러니까 절에서 나오셔서 거지 소굴로 들어가서 중생을 구제하러 들어가신 겁니다. 상관이 없거든요. 어떤 대상이 와도 나는 몰입해서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조금도 겁을 안내요. 이런 분들한테는 천하를 맡겨도 잘 다스릴 겁니다. 겁을 안내요.

 

그런데 나에 대한 몰입만 하던 사람한테 천하를 맡기면 죽어요. 그냥 나에 대한 몰입으로 다시 돌아가실 겁니다. 아마. 우주가 본래 공하다. 하고 그냥 들어가실 겁니다. 나오면 힘드니까. 선비들도요, 이걸 잘해서 선비가 된 겁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선비들이요, 불교를 탄압할 때 불교를 공격하던 논리가 이거에요. 우리는 경을 몰입을 해도 꼭 지혜를 얻는데, 너희는 경에만 집착한다. 몰입에만. 이런 어떤 비판을 받을만한 요소가 그때 스님들한테도 있었으니까 그런 비판이 나왔겠죠. 그러니까 당연히 뭐죠? 유교가 불교, 그냥 억압했다. 이렇게만 알지마시고요, 그 논리가 뭐였는지 아신다면요, 종파를 떠나서 이런 몰입에만 집착하는, 그런 특히 나에 대한 몰입에만 집착하는 이런 사고에 대해서. 보십시오.

 

조선시대에는 나에 대한 몰입에만 빠져드는 그런 그 수도인들에 대해서 그것만이 답이 아니고, 대상에 대한 몰입을 해서 올바른 사고를 해서 선악을 정확히 판정할 줄 알아야만 진짜 수도인 이라는 그 사상이 앞에 사상을 공격했던 시대에요. 그러니까 이걸 문파별로 보지마시고, 왜냐? 원효스님도 똑같이 얘기하고 계시니까요. 단순이 이거는 유교와 불교의 싸움이 아닌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500년간, 500년간 나에 대한 몰입, 명상에만 빠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러지 말고 대상세계까지 잘 다스릴 수 있어야 된다. 진짜 육바라밀과 사단이 나와야 된다라는 그런 사상으로 500년간 다스려왔던 나라라고요. 우리 민족이. 그런데 지금 100년 동안 정신을 잃더니 다시 명상이 최고인가벼 하고 다시 지금 이렇게 가고 있다면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겁니다.

 

역사가 퇴보하고 있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고려 때 불교가 득세했잖아요. 그때 이런 좋은 위대한 보살들도 나왔지만, 참나, 견성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겠죠. 또 다른 뭐, 여러 부패는 따지지 말고, 일단 철학의 우리 철학의 핵심에 도움 되는 것만, 핵심이 되는 것만 우리가 지금 건져보더라도, 참나에만 집착한 겁니다. 그러니까 고려 말에 선비들이 저걸 좀 깰 사상이 없나 하다가 중국에서 마침 성리학이 나왔다니까 갖다보니까, 요거는 불교를 깰 수 있겠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갖다가 쓴 거예요. 성리학에선 뭐라고 주장 하냐 하면, 몰입만 잘해선 안 되고, 지혜까지 있어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이게 불교보다 우리 유교가 나은 거다. 결국은 그게 대승불교에서 하던 거죠.

 

똑같은데, 유교에 옷을 입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고려 말에 선비들이 그걸 가져다가 불교 공격할 때 이걸 쓴 겁니다. 너네는 공에 빠져있다. 우리는 현실을 다스린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에 이게 나와요. [너희는 이 선정에만 빠져서 세상사를 관리할 줄을 모르고, 가정으로부터 도망가면서, 우주를 초월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가정을 인의예지로 다스릴 뿐이다. 천리대로 다스릴 뿐, 이 세계에서 도망가지 않는다.] 이런 식의 논리를 폅니다. 대승불교거든요. 그래서 제가 원효스님 걸 설명해 드린 거예요. 원래 같은 건데, 모양만, 옷만 자꾸 바꾸어 입고 있는데, 옷 바꾸어 입었다고 다른 사람인 줄 알면 안 된다는 겁니다.

 

같은 사조가 지금 나만 알고 나의 열반에만 집착하는 이런 사조를 천하를 다스리는데 이 명상을 쓰자는 사조가 계속해서 나오면서 견제하고 있고, 이렇게 또 비판하고 있다는 거, 이 흐름을 아셔야 고려 조선에서 오던 그런 사상사의 흐름이 보이고요, 지금 우리가 뭘 선택할 건지 우리가 다시 이 시점에서. 작은 명상에서 나와서 큰 명상을 하시자는 겁니다. 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판정할 수 없는 그런 명상이라면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나 하나도 구제 못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좀 줬다고 구제가 아니에요. 여러분 삶이요, 우주에 내놔도 난 당당하다고 말 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야 그게 진짜 여러분을 치유해준 거죠.

 

여러분을 정말 바로 잡게 해준 건데,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명상을 하고 계시다면 당장 버리십시오. . 이게 역사 속에서도 계속 나왔던 화두에요. 조선 500년간 공격했던 그 사조가 공에 빠져가지고 천하, 남도 모르고 천하도 모른다는 고 부분에 또 우리가 다시 빠져들려고 하는 거 같아서 걱정이 되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