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9)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554회] 말기 암 판정 3개월

Buddhastudy 2019. 12. 5. 20:25


말기 암 판정을 받고 3개월도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는데
스님 법문에서 배운 것처럼 살다 보니까
아무 두려움도 없이 행복하고
그날그날이 즐겁고 기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감사 인사가 다입니까?
네. 아주 좋았어요.

지난 여름에 제가 잘 알고 있던 노스님 한 분 돌아가셨는데,
이 분은 올해 78세에요.
저는 몇 세인지 몰랐는데 돌아가신 후에 신문에 난 거 보니 78세였어요.
전화가 왔어요.
“한번 보자” 이래요.
“너 바쁜 줄 아는데 그렇지만 한번 보자. 
왜냐하면 내가 암이 말기라서 올해 안에는 죽는단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한번 봤으면 좋겠다.” 그래요.

갔더니 말씀이 이래요.
“내 죽고 난 뒤에 자네가 문상을 오면 내가 자네 온 줄 알겠는가, 자네가 나를 보겠는가
그러니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럴 때 우리가 보는게 안 좋겠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죠.
죽고 난 뒤에 와서 괜히 뭐, 문상 가니 어쩌니 하기 전에 그냥 우리 서로 다 아는 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살아 있을 때 한번 보는 게 낫지 않겠냐, 이래서 전화를 했다.
너 바쁜 줄 알지만 그래서 전화를 한 거다.
“아이고, 잘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앉아서 대화를 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제가 인사 한 번 드리고 조금 얘기하다 와야 되는데, 
사람을 구경하러 오라고 했기 때문에 시간도 넉넉해서 대화를 나눴는데, 2시간 이상 대화를 나눴습니다.
살아오신 얘기, 젊은 시절 얘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보냈어요.
주로 본인의 좀 뭐랄까, 잘난 얘기보다는 못난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갔다 오고 이틀인가 3일 있으니까 돌아가셨다. 이렇게 신문에 난 걸 보고
문상을 갔지만, 문상을 가니 내가 뭐, 돌아가신 시신만 봤지 서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쉽지가 않았습니다. 충분히 대화를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 두려움이 왜 생길까요?
두려움.
겁난다. 하는 두려움이 왜 생길까?

자, 밝을 때가 두려워요? 어두울 때가 두려워요?
아는 사람 만날 때가 두려워요? 모르는 사람 만날 때가 두려워요?
아는 곳에 갈 때가 두려워요?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두려워요?
그럼 이게 무슨 얘기에요?

두려움이라는 것은 어떤 장소, 어떤 사람,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잘 모르면, 어두우면 안 보이잖아. 그죠?
그러니까 잘 모르면 두려움이 생긴다. 

두려움은
무지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무지 때문에. 무지...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것 중에도 제일 모르겠는게 뭘까?
죽은 뒤의 얘기에요. 
어떤 얘기도 죽은 뒤에 얘기, 아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괜히 듣고 아는 척 하는 소리이지.
그러니까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두려우니까... 이 두려움을 없애려면 좀 위로를 안심을 시키려면 뭐가 필요해요?
첫째, 죽은 뒤에 좋은데 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헤어지고 어디 갈 때 좋은데 간다 하는 게 아쉬워요? 나쁜데 간다 할 때 더 두려워요?
좋은데 간다 할 때 영전되어 갈 때는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서로 웃으면서 헤어지죠.
그런데 좀 고생하러 간다 그러면 어때요? 서로 울고 난리잖아. 그죠?

그러니까 내생 얘기가 나오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좀 위로하기 위해서 나온 얘기에요.
그런데 그걸 진짜냐? 거짓말이냐?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자에요.
진짜냐? 거짓말이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
어쨌든 좋은데 간다 하면 위로가 되요? 안 돼요? 위로가 되요.
‘진짜냐?’ 이렇게 하면 면죄부를 파는 부작용이 생기고,
‘거짓말이다’ 그러면 위로가 안 돼요.
그래서 그런 거는 따지지 않는다. 그냥 ‘좋은데 가나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그런데 인도 사람은 이거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냈는데 뭘까요? 
‘다시 태어난다’ 아이디어 굉장히 좋죠.
좋은데 가도 못 보잖아요. 다시 태어나니까 볼 수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인도 사람은 죽은 뒤에 별로 안 울어요.
금방 갔다 올 거니까.

그래서 장래기간이 우리는 보통 3일이고 5일이고 열흘이고 옛날에 그랬잖아요.
그런데 인도에는 오늘 죽으면 오늘 화장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도에는 관이라는 문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나니까 시신을 화장 해버려야 집착이 없어진다. 
다시 태어나는데 연연해서 귀신이 안 남아 있다. 이 말이오. 빨리 가버린다 이 말이오.
그런 여러 가지 ‘천당간다, 지옥간다, 그다음에 다시 태어난다’ 이런 것도 다 우리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거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자연현상을 한 번 보세요.
잎이 피면 반드시 어떻게 됩니까? 잎이 지죠.
핀 잎이 안 지는 것 보신 분 손 한번 들어봐요.

생겨나면 반드시 멸하고 
잎이 피면 반드시 지고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 그래요.
이건 그냥 자연의 이치에요.

태어난다고 특별히 기뻐할 것도 없고 
죽는다고 슬퍼할 것도 없어요.
엄격하게 말하면 죽는다 태어난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내 눈에 보이면 안 보이다가 보이면 뭐라고 한다? 생겼다고 그러고
보이다가 안 보이면 뭐했다고 한다? 없어졌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방문 열고 들어오면 ‘생겼다’ 그러고
방문 열고 나가면 ‘없어졌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는 
엄격하게는 생겼다 멸했다 할 것도 없다.
그게 불생불멸(不生不滅)이에요.

생겼다할 것도 없고 
없어졌다 할 것도 없다.

얼음이 생기면 ‘얼음 생겼다’ 하고 좋아하고
얼음 녹으면 울고, 
그건 물이 그냥 모양만 바뀐 거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 존재 자체의 성질을 알게 되면
봄에 잎이 핀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낙엽이 떨어진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그냥 하나의 현상이에요.

죽음에 대해서 아무 두려움이 없는 것을 뭐라고 한다?
죽음을 이겼다.
죽음을 뛰어넘었다.
또 심지어는 뭐라고 그런다?
죽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안 죽는다’ 이 말은 육체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돌아가셨어요? 죽음에 대한 아무 두려움이 없었어요? 없었어.
그래서 육신은 비록 죽었지만 이 영혼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그래서 부활이라고 그잖아요.

우린 다 두려움이 있잖아요.
누가 죽인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도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한다 이 말이오.

왜 그러냐하면 요즘 말로하면 사형집행인이다 이 말이오. 교도관이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그냥 하는 일이에요.
그거 뭐 예수라고 특별히 십자가에 박은 것도 아니고 그냥 재판에서 사형판결이 났기 때문에 뭐다? 
그냥 사형을 집행한 거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건 그 당시 사형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그것이 신성이에요.
죽은 육체가 다시 태어났다. 이건 별로 중요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 우린 지금 죽음이 다 두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떤 분이 좀 부자였는데, 평생 돈 번다고 집착을 하다가 돈 좀 벌어서 살만한데 몸이 아파서 갔더니 암이였어요. 
본인이 너무 놀라서 삶이 영원한 줄 알았는데 ‘1년밖에 못산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일부 사람들한테 주고, 
그 다음에 그 돈을 딱 1년 산다니까 1년을 계산해서 매일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 보면 나눠줬다고 그래요.
다 나눠주고 죽을 때가 되었는데 멀쩡하더래요. 하하하.
그래서 아쉬웠을까? 아니에요.

마음을 비우면 두려움이 없으면 어때요?
그게 뭐 1년 더 살았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 사람은 그런 얘기 들으면 
‘아 그러면 1년 더 살았네’ 그러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극복해 버린 거예요.
그런데 우리 거사님도 공부를 하다가 뭘 해버렸다?
죽는다 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죽는다 그랬는데도 와서 감사 인사하고 그러잖아요. 하하하.

자, 그런 참고로...
여러분들도 늙거나 죽는 거 이런 걸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고

노인들은 저한테 많이 그래요.
“아이고, 스님. 잠자듯이 죽었으면 좋겠다” 그래요.
잠자듯이 죽었으면 좋겠다가 엄청난 이기주의자입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면 자식한테 엄청난 충격이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그래서 진짜 자식을 사랑하면 좀 아프다 죽어야 되요? 그냥 잠자듯이 죽어야 되요?
좀 아프다가 죽어야 되요.

그래서 제가 노인들 보고 ‘잠자듯이 죽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너무 이기주의라고 
그러면 자녀들에게 평생 가슴에 못 박는다고..

그러니까 아프다가 돌아가셔야 되요.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누구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좀 아파야 되요.

그래서 아파서 병원에서 누워있으면 자식들이 
‘어머니 어머니’ 처음에는 그러다가 시간이 좀 흐르면 어때요?
“아이고 왜 안 죽나, 마.. 죽지..”
겉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들어요. 힘이 들어서.
그걸 뭐라고 그런다?
‘정 뗀다’ 그래요. 
뭐라고? 정을 떼는 거요.

막 울고 해도 실제로 마음은 아프나? 안 아프나? 별로 안 아파요.
그래서 “에고 에고 에고...” 하다가 
“어, 거기 물 올려라. 물 올려” 이러다가 다시 
“에고 에고 에고” 이러는 거요. 

그래서 이러면 호상이 되는 거예요.
초상이 났다고 막 사람이 슬피 울고 그게 아니라 
정을 다 떼고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옛날에는 자식들이 불효자라.. 부모가 3년 이상 아파야 ‘긴 병에 효자 없다’ 이런 말 있잖아.
정을 떼줘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효성이 깊어서 3개월만 아프면 정을 떼 줘요.

그러니까 많이 안 아파도 되나? 많이 안 아파도 되요. 조금만 아프면 되요.
좀 3개월만 끙끙거리면 애들이 정을 딱 떼줘요.
그래서 ‘안 아프고 죽겠다’ 그것도 욕심이에요.

부모님이 갑자기 탁 돌아가시면 자녀는 우는데, 그것도 또 잘못이에요.
내가 슬프지, 돌아가신 분은 탁 죽는게 좋아요? 안 좋아요? 좋아요.
그럼 이 우는 것도 부모를 위해서 울어요? 자기 때문에 울어요? 자기 때문에. 
부모 돌아가셨는데 나 때문에 울 필요는 없잖아요.
부모가 탁 돌아가시면 
“아이고 우리 어머니 고통없이 돌아가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돼.

그런데 우린 다 거꾸로 받아들어요.
다 죽을 때까지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몰라요.
죽는 사람은 탁 내 생각만 하고 죽어버리겠다고 그러고.
또 자녀는 자기 생각만 해서 ‘왜 그렇게 빨리 죽노? 내가 죽어라 할 때 죽지’ 이래요.
죽는 것도 허락받아야 되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이런 문제 안 생기게 
죽을 때 괜히 재산 놔놓고 그러지 말고 다 누구를 주고 죽어라?
법륜스님을 주고 죽어라.

‘스님이 떼어 먹을 거 아니냐?’ 
저는 그런 돈은 안 떼어먹습니다. 하하하.
이 세상에는 필요로 할 데가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 좋죠.

죽음을 이렇게 좀
초연히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