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말하는 게 근본입니다. 언제나. 그러나 어리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얘기에요. 어린 것은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독이 될 수가 있다. 진실이라 하더라도 독이 될 수가 있다. 이 말이오. 애가 세 살짜리가 나 어디서 태어났다 해서 옷 벗고 얘기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그럼 뭐라고 그래요? 배꼽으로 낫다. 이렇게 말하지. 탯줄이 붙어 있었잖아. 그죠? 그렇게 얘기하다가 일정하게 나이가 들면 알게 돼요. 그러니까 이걸 갖다가 거짓말이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빠가 미국에 가서 계신다. 멀리 가서 계신다. 그래. 너희 공부 열심히 하면 돌아오실 거다. 이렇게 얘기하면 되지.
그러면서 애가 약간 철이 들면. 그런데 이거는 애가 지금 힘들어서 이 문제가 죽겠어요? 자꾸 이런 묻는 것을 듣는 엄마나 할매가 힘이 들어서 죽겠는 거요? 그래 애도 힘 안 들게 사는데 왜 자기는 그것도 못 참고 죽겠다. 그래. 그러니까 그런 고민은 다 자기 고민이지. 애 고민 아니에요. 자기가 잘 생각해야 돼. 아이들이 소꿉장난할 때 이건 아빠자리 엄마자리. 아빠가 언제 오냐? 여름에는 왔으면 좋겠다. 애들이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 그거 뭐 그냥 들으면 되지. 그걸 듣고 한쪽에 가서 눈물 흘리고 또 와가지고 보고. 이러면 애들이 정신이 나빠지지. 그러면 이게 무슨, 자라면서 아~ 이게 무슨 문제가 있구나 하고 낌새를 체고, 상처가 되기 시작하지.
그런 거는 아이 문제가 아니에요. 예를 들면 아이가 언청이다. 그럼 약간 신체장애가 되면 나중에 성격적 결함이 있거든요. 그게 신체장애 때문에 오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는 자기 얼굴을 자기가 알 수 있어요? 없어요? 몰라. 그런데 어른들이 보고, 보는 사람마다 “아이고 애가 왜 저러노?” 보는 사람마다 이렇게 인상을 쓰니까. 애가 당연히 그런 것이 마음에 쌓이죠. 그래서 성격적 결함이 생기는 거란 말이오. 그러면 엄마나 할머니가 벌써 이 문제를 갖고 슬퍼하고 전전긍긍하고 한다는 거는 벌써 애한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고, 성격적인 결함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이건 손주 문제 아니오. 자기 문제요. 자기가 지금 생각을 잘못하는 거요. 그러니까 잘 보세요. 그럼 딸만 보자. 딸은 우선 자긴 살았으니까 자기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 두 번째 자긴 뭐 혼자 살고 싶으면 혼자 살고, 재혼하고 싶으면 재혼하고. 길이 많잖아요. 뭐 특별히 문제될 거 없고. 엄마도 딸 그렇게 된 거, 뭐가 문제요? 특별히? 애들은 지금 세 살 다섯 살 잘 사는데. 엄마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서 기쁘게 살면 애들은 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죠. 그런데 죽은 남편 생각하고 자꾸 울고 이러면 애들이 우울증 기초가 형성되죠.
딸이 기쁘게 살아야 되는데, 그럼 엄마가 계속 울어주면 딸이 기쁘게 살까? 딸이 울더라도 엄마가 기쁘게 해야 될까? 그리 안 된다. 스님 말은 맞는데 마음은 그래 안 됩니다. 이 얘기하고 싶죠? 그래. 그게 지 무덤을 파는 거죠. 담배 피우는 사람도 다 스님 끊으면 좋지만 이게 잘 안되네요. 화내는 사람은 다 화내면 안 되지만 화가 나네요. 그래 뭐~ 생긴 대로 살아라. 그럼 뭐 여기 와서 공부할 게 뭐가 있어요? 지금까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이렇게 법문을 듣고 살펴보니, 아~ 이게 손주를 위하는 게 아니고 뭐다? 손주를 해치는 거구나.
알았으면, 진짜 손주를 위한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웃어야지. 웃으려면 억지로 웃으면 안 되죠. 진짜 웃어야지. 진짜 웃으려면 ‘잘됐다.’ 이렇게 생각해야 진짜 웃음이 나와. ‘잘됐다.’ 아니 그런데 잘됐다고 알아차려 버리면 노력할 게 있어요? 없어요? 없는데. 잘못됐는데 스님 말 듣고 이걸 잘됐다고 억지로 하려니까 이제 엄청나게 힘이 드는 거요. 안 되는 거요. 쉬운 건데 지금 자꾸 어렵게 만들어. 죽는 거는 잘못된 것도 아니고, 잘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의 현상이에요. 잘되고 잘못된 거는 우리 생각이지. 낙엽이 떨어진 건 잘된 거요? 잘못된 거요? 꽃이 피는 건 잘된 거요? 잘못된 거요? 그냥 하나의 현상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꽃은 피는 건 잘됐다. 그러고, 낙엽 지는 건 잘못됐다. 그러는데, 떨어져야 나중에 피고. 피어야 떨어지고. 이러는 거요. 이치는. 잘되고 잘못된 거는 없어요. 그런데 이 현상을 내가 잘못됐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이 뭐해진다? 슬퍼지는 거요. 그리고 괴로워지는 거요. 그러니까 잘못된 사실이라서 잘못된 게 아니고, 사실 자체는 잘못된 것도 없고, 잘된 것도 없는데, 우리는 항상 어떤 사건을 두고 잘됐다 잘못됐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괴롭고, 슬프고. 잘됐다고 생각하면 기쁘고. 그런 거요.
스님이 잘된 일이다. 이 말은 사건 자체는 잘된 일도 아니고 잘못된 일도 아닌데. 당신이 잘못됐다고 하니까 잘못됐다고 생각할게 하나도 없지 않으냐? 이 말은 사건은 잘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왜 잘됐다고 말하느냐? 잘됐다고 생각하면 누가 좋으냐? 내가 좋다. 그러니까 이거를 앞으로 잘됐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돼. 내가 이렇게 괴로우면 당연히 내 딸도 엄마 괴로워하는 거 보면 또 그 영향 받아 괴로울까? 안 괴로울까? 괴롭고. 그 엄마를 보는 딸들도 또 괴로울까? 안 괴로울까? 또 괴롭고. 이래서 괴로움은 괴로움의 전염이 일어나. 계속.
그런데 이제 애가 어리석어서 울더라도, 엄마가 기뻐하면 슬픔이 빨리 없어지고, 또 딸이 어리석어서 슬퍼하더라도 엄마라도 어떠니? 기뻐하면, 딸이 엄마 볼 때는 그때라도 뭐한다? 웃겠죠.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울더라도 엄마 만날 때는 웃을 거 아니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이 잘못됐다 해서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죠? 오~ 이건 틀렸네 하면 고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그죠?
그런데 지금 사위가 죽었다. 어~ 이거 잘못됐다 해서 고칠 수 있는 일이오? 못 고치는 일이오? 못 고치는 일을 가지고 계속 붙들고 있으면 이건 어리석은 거지.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내 아들이 죽어도 내 손자가 죽어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그건 나만 슬픈 것이 아니라, 내 주위를 슬프게 만들어서, 전체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면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살은 사람들이 다 고통스러우면 죽은 사람이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만약에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좋아할까? 싫어할까? 싫어하겠지.
거기도 또 울 거 아니오. 같이 따라 가지고. 왜 이렇게 하느냐 이거요. 아무 이익이 없는 짓이오. 그러니 웃으세요. 남이 오해할 만큼 웃으세요. 아이고~ 저 할매 미쳤다. 사위 죽었는데 뭐 좋다고 저래 웃을까? 저그 딸 시집 한 번 더 보낼라고 저리 웃나? 이런 소리 들을 정도로 웃어라. 그런 소리 듣고 오히려 아~ 내가 이 정도 됐다. 오해다. 이래 생각하지 말고. 그럴 정도로 웃어야, 웃음의 에너지, 기쁨의 에너지가 퍼져 나가고. 그러면 그 아이들은 아빠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고, 언제 얘기해 줄 거냐? 하는 거는 걱정거리가 안 된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니까 이걸 언제 얘기해줄지 고민이 되지.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건 언제 얘기해줘도 괜찮아요. 기쁘게 얘기할 수 있으면 언제 얘기해도 괜찮고. 중차대한 일로 생각하고 얘기해주면 언제 얘기해 줘도 충격이 됩니다. 커서 얘기해주면 커서 충격이고. 어려서 얘기해주면 어려서 충격이고. 그래요. 자~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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