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즉문즉설 중에서
용서는 벌써 상대가 잘못을 했다는 전제가 들어가기에 사실 용서 자체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저는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 항상 제 일상 중에서 기회가 된다면 스님께 꼭 여쭙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시리아 같은 전쟁으로 고통 받는 무고한 사람들이 살생과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용서가 아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또 우리 일상에 언어와 행위로 폭력을 쓰는 이들을 용서하지 말고 이해와 사랑으로 되받아 치는 게 좀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의 대화는
질문자의 심리치료에 지금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바깥세상을 어떻게 바꿀 거냐’ 하는 대화가 아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고문을 하는 자를 용서할거냐? 말거냐?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되고
고문을 하는 사람은 고문을 하지 않도록 제도를 우리가 만들어야 된다.
다시 말하면 전쟁을 하는 사람에게는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내가 미워하면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거요.
미워하면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건 누가 괴롭다? 내가 괴로울 뿐이다.
그러니까 이 내 괴로움을 어떻게 해소할 거냐 할 때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미워하지 마라’고 얘기했던 거지
그 사람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미워하는 것은
자신만 괴롭히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러니 미워하는 힘이 있으면 가서
고문을 방지하는 사회운동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막는 무슨 활동을 하든지
하라는 것이지
앉아서 미워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요. 의미 자체가. 그러니까
저 나쁜 놈, 저거 봐줘서 되느냐?
저 성추행 하는 놈 저 놈을 내가 용서해 줄 거냐.
이런 개념으로 접근하면
자기는 아무 행동도 안하고 그냥 혼자 집에서 울고, 욕만 하고 하면
그건 자기감정을 손상시키고,
그 사람에게 무슨 아무런 개선의 도움이 안 된다.
그러니까 내 해방을 위해서는 그 성추행범을 용서해 주되,
사회적 정의를 위해서는 그 성추행범을 뭘 해야 된다? 고발을 해야 된다.
고발을 해야 그게 개선이 될 거 아니오.
미워하는 것은 내 괴로움밖에 되는 게 없다.
그 다음에 남편이 어떻다. 아내가 어떻다. 이런 경우는
결혼해서 한 집에서 살면서 상대를 미워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학대나 다름없는 거요.
아까 저 젊은이도 마찬가지죠.
어머니에게 ‘죄송하다. 죄송하다’ 하는 것은
자기 괴로움만 생기지, 어머니한테 아무 도움이 안 돼요.
그렇게 죄송하면 가서 밥을 한 끼 해주든지,
그렇게 죄송하면 돈을 10만원 보내주든지,
그런 구체적은 행동은 안하고
그냥 죄송하다. 그건 자기 학대다. 자기를 괴롭힌다.
‘죄송하지 마라’ 하면 그건 마치 불효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게 잘못된,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의식의 낭비를 지금 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네가 잘못했다는 거다.
그런데 사람이 어떤 행위, 부부지간에는 이 사람이 보면 이 사람이 옳고, 저 사람이 보면 저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둘의 관점이 서로 다른 거지 누가 잘하고 잘못한 게 없다.
그런 면에서 용서한다는 말 속에는 이미 네가 잘못했다는 게 전제되어 있다.
‘서로 다르다’ 할 때는
그것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도 용서해 줄 것은 없다.
그러나 개선할 것은 있다.
그것이 법률에 의해서 범죄행위를 했으면
개선을 해야 되고
윤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깨우쳐줘야 한다.
소위 말해서 인류 문명이 좀 변화한 고차원적으로 변화한 시기가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부터 한 2500년 전후로 해서 이 인류 문명의 정신작용에 큰 혁명이 한번 일어났습니다.
그게 중국에서는 노자, 공자, 장자 하는 소위 사상이 나왔죠. 인도에서는 부처님과 여러 사상가들이 나왔고, 그 다음에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이런 분들이 나온 게 2500년 전, BC 500년 전 거의 동시대에요. 내용도 비슷해요.
중국에서 공자는 중용을 얘기하고
인도에서 부처님은 중도를 얘기하고
그리스에서도 중도를 얘기하죠.
중도라는 것은
정해진 길이 없다.
인연을 따라 가장 알맞은 길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할 수 있는
이런 새로운 길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 생각은 어떠냐? 잘못을 하면 응징을 합니다. 응징.
“네가 잘못했다.” 그럼 뭘 받아라? 벌을 받아라. 벌을 받아라.
“네가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아라.” 이게 응징이라고 그래요.
이것을 우리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뭐라고 그래요? 인과응보라고 그래요. 인과응보.
인과응보는 특정한 사상이 아니에요. 불교 사상도 아니고, 원시종교 시대에 보편적 인간의 사유체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뭐요? 함무라비 법전에 뭐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말이 있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보복해라. 이렇게 들으면 안 돼요.
그 응징을 하는 시대에도 응징을 너무 과하게 하면 안된다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아시겠어요?
상대가 내 눈을 빼면 눈만 빼야지 죽이면 안 된다. 이 얘기에요.
상대가 내 이 한 개를 빼면 나도 한 개를 빼야지 3개 4개 빼면 안 된다.
이 법을 여러분들이 잘못 이해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 법이 굉장히 발전된 법입니다.
그러니까 과잉으로 보복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감정은 어때요? 한 대 맞고 5대를 대려야 속이 시원하잖아. 그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법이오. 그 법이. 대부분 다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지금 21세기에 왔는데도 아직도 응징이 주 목적이오.
네가 잘못했으니까 보복을 하는 거요. 보복을.
그것은 우리 감정의 산물이에요. 그러니까
미워하면
복수, 보복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지해서 그렇다.’
그러니까 깨우쳐야 된다.
그런데 깨우치지 못하면(제3의 피해가 생기고)
피해를 막아야 되니까 격리를 해야 된다.
격리의 목적도 궁극적으로 깨우치는 것이다.
관점을 이렇게 자꾸 여러분들이 접근을 해야 돼.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 자녀마저도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잖아. 그지?
그러니까 두들겨 패는 것은 잘못한 거에 대한 여러분들의 응징이에요.
화가 나니까 복수를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자녀에게 복수를 하면 안 되잖아. 응징을 하면 안 되잖아.
자녀를 깨우쳐야 된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응징을 했다가 또 자기 자식이니까, 마음이 안 돼서 후회를 했다가, 신경질 나면 또 응징을 했다가 또 후회를 했다가 왔다 갔다 한다. 여러분들이 아직 수준이 안 되어 그런 거요.
그러니까 애를 내버려 두는 건 안 돼요.
왜냐하면 아이가 잘못을 했는데도 내버려두면 아이 버릇이 나빠지면 아이의 미래에 나쁜 거요.
그러니까 반드시 개선해야 되나? 안 되나? 개선해야 되는데,
개선하려면 뭘 해야 된다? 깨우쳐야 되는 거요.
응징을 하면 깨우쳐지는 게 아니라, 심리가 억압이 되는 거요. 응징을 하면.
그래서 조선시대에 아이가 잘못하면 매를 갖고 아이를 때리는 게 응징인데, 매를 가져오게 해서 “엄마가 너를 잘못 가르쳐서 그렇구나. 그러니 네가 이 매로 엄마를 때려라. 엄마가 너의 잘못에 대해서 엄마책임으로 벌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아이가 엄마 종아리를 때리다가 스스로 울고
“엄마 다시 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이게 교화란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도 지금 어떻게 용서를 하나, 용서를 못하는데, 제가 얘기하는 건 이런 원리를 알면,
원리적으로는 뭘 할 게 없다?
용서할 게 없는 거요.
우리는 뭐할 것만 있다?
깨우칠 것만 있는 거요.
그러니까 그런 관점에서 제가 한 말씀이에요. 이해하셨습니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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