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화엄일승법계도(법성게)

윤홍식의 화엄일승법계도 5. 무명무상절일체 ~ 불수자성수연성

Buddhastudy 2017. 2. 1. 20:19


그래서 그 자리는 다시 이 자리로 돌아가서요, 그 선험적 자아자리는 무명, 이름도 붙일 수가 없어요. 원래. 이름이라는 것도 나와 남이 구별되는 세계에서만 가능한 거잖아요. 이름도 없고 또 뭐죠? 무명, 무상. 여러 상이 있을 수가 없어요. 나와 남의 상이 거기가면 다 없어져요. 그러니까 이 방법은 이거 그대로 하면 무명무상만 하면 선험적 자아 아닌가요? 그럼 어떻게 하시면 됩니까?

 

내 이름 모른다.

이름도 모르겠다.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 나 모르겠다.

 

시간도 [몰라],

나 여기 어디 있지? [몰라].

공간? [몰라].

시간? 몇 시지? [몰라].

내 이름 [몰라].

 

우리 10분 명상이 그렇게 되어있죠. 이 순서로 이 원리로 되어있는 겁니다. 그래버리고 나면 선험적 자아만 턱, 나와요. 요게 견성입니다. 너무 쉽죠? 견성이. 견성 어렵다는 분들은요, 저는 절대 그분들은 피하십시오. 아까 말한 과위의 견성, 완벽한 법신을 구현하는 건 당연히 어렵지만, 견성 자체가 왜 어렵겠습니까? 내 순수한 나를 찾는 것뿐인데.

 

그래서 절일체, 일체를 뚝 끊어버리면 [몰라] 해버리면 그 자리가 참나입니다. 이거 그대로 하시는 겁니다. 지금 [몰라] 하나만 하셔도요. 그런데 이 세계가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여기까지 얘기하니까, 여기는 너무 신비한 세계인가보다, 혹시 착각 일으키실까봐. 그거 아니다.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증지소지비어경, 깨달은 지혜, 알아차림. 깨달은 알아차림으로는요, 반드시 알 수 있는 거지, 별다른 건 아니다. 여러분이 깨달으면 그냥 알 수 있는 거지, 이거 별로 신비한 거 아니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증지소지 비어경, 다른 거 아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요, 진성심심극미묘, 이 자리, 이 참나의 자리는 지극히 깊고 미묘하여, 나와 남이 없으니까 미묘하다고 하는 겁니다. 오로지 나의 알아차림. 텅 빈 알아차림만 있지 거긴 나와 남이 없잖아요. 미묘하니,

 

불수자성 수연성. 불수자성, 자기가 어떤 성질을 지키지 않아요. 이 자성은 본성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어떤 상이 없다는 겁니다. ‘난 이래야지.’ 하는 그런 성질이 없어요. 그래서 인연 따라 이룬다. 늘 오픈되어 있어서 추우면 추운 데로, 더우면 더운 데로 참나는 자유자재하게 반응한다는 겁니다. ‘나는 꼭 이래야지하는 그런 고집이 없다는 겁니다. 불수자성수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