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화엄일승법계도(법성게)

윤홍식의 화엄일승법계도 4.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Buddhastudy 2017. 1. 31. 21:10


법성원융, , 첫 번째 그림 볼게요. 어디입니까? 저쪽이 시작이죠. 법성원융무이상, 이렇게 딱딱 끊어집니다. 7언이죠. 7언절구죠. 7언으로 끊어져요.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은 지금 아시겠죠. 진리의 성품, 우리 안에 있는 에고의 성품 말고요, 진리의 성품, 법성, 이 참나 자리에는 육바라밀이 들어있습니다. 참나는 육바라밀 들어있다는 거 어떻게 아십니까?

 

참나는 너와 나가 없어요. 그래서 보시를 합니다.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으니까 움직일 때 보시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보시바라밀이. 참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죠. 그러니까 에고는 넘어가지만 참나는 안 넘어가니까, 유혹이 왔을 때, 에고가 참나한테 마음을 더 실어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몰라 괜찮아] 에고가 자기 걸 탁 놔버리고 참나한테 집중해주면 [몰라] 내 이름을 탁 놔버리세요. 지금 참나한테 힘을 실어주셨나요?

 

내 이름을 놔버렸는데 누구를 위하겠습니까? 위할 대상이 없어지니까, 참나가 드러나요. 보시. 나와 남을 안 갈라요. 그 자리에서는. 그 자리에서는요, 지계_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요. 아무리 유혹에 넘어가고 싶어도요, 내가 있어야 넘어갑니다. [몰라]라고 자꾸 해버리시면요, 유혹이 올라오다 식어버리고, 올라오다 식어버리고, 그렇게 됩니다. 실제 해보세요. [몰라] 힘이 강력해지면요, 유혹이 올라오다 식어버려요.

 

아주 무서운 욕망들도 올라오다가 [몰라] 해버리면, 내 이름도 [몰라] 해버리면 누구를 위한 욕망인데요, 이게 식어버려요. 이게 지계바라밀입니다. 참나에는 그런 계율을 어기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참나의 계율이겠죠. 인간들이 만든 계율이 아니고요, 참나의 법칙, 나와 남을 해롭게 하지 않겠다는 그 원칙이 늘 통용되고 있고,

 

인욕_그 다음에 남한테 개인적으로 화난 것들입니다. 국가적인 공분은 내야 되요. 그건 참을 게 아닙니다. 정의를 구현해야 되는 거 말구요. 이거는 그 내 개인적으로 좀 쪼잔한 건 데, 계속 화나고 있는 거 있죠. 어디다 말도 못하겠는데, 내려놓으세요. 인욕. 참아버리세요. 그런데 억지로 참으면 화병이 생기는데, 어떻게 참으시라고요?

 

[몰라. 괜찮아] 했더니 참나는 화를 안내고 있기 때문에 그게 녹아져요. 그래서 엄청 화낼 일이었는데요, [몰라 괜찮아] 5분만 하고 내가 끝내주게 화를 내주겠다.”하고 5분간 [몰라 괜찮아]하고 나시면요, 화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린다면 그건 참나가 그건 화내지 마라고 한 거잖아요. 그런 것들은 화내지 마세요.

 

그랬는데, 그렇게 했는데 더 화가 나는 게 있어요. 영화 도가니보시고, 잘못된, 요즘 잘못된 사연들 있죠. 그건 보살심이에요. 구제해주고 싶다. 도와주고 싶다는. 단순히 같은 화로 취급하시면 안 됩니다. 뭔가 이렇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은요, 바로 잡으라는 보살심이에요. 거기서 원을 세우세요. “내가 저걸 절대 바로 잡겠습니다하고. 개인적인 분노는 인욕으로 다스리시고요.

 

정진_나태해지고 싶은데 아 정말 게을러 오늘 수행하기 싫어.” [몰라 괜찮아]하시면요, 벌떡 일어나서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정말 오늘 설거지 청소하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을 계속 곱씹고 있으면 에고가 할리가 없잖아요. [몰라 괜찮아] 5분만 해보세요. 벌떡 일어나서 하게 되어있어요. 이해되십니까? 정진 바라밀입니다. 이게 별게 아니라.

 

선정바라밀_힘들 때 [몰라 괜찮아] 해보세요. 마음이 평정심이 와요. 억지로 평정시키는 게 아니라 근원적인 평정심이 올라와버려요.

 

그다음에 지혜_여러분이 지금 지혜를 뭔가 사물을 정확히 판단 못하는 건 이 두 가지 때문입니다. 무지만이 아니라 아집이 같이 협공을 해요. 협업을 해줘요. 협공을 해줘요. 무지_여러분 고정관념, 지적인 장애 때문에 선명히 이해 안 되는데, 오판을 자꾸 내리는 데, 거기다가 욕심까지 붙어버리면요, 자기가 잘못된 결론 내려놓고도 수정하고 싶지 않아 해요. 그러니까 그때 [몰라 괜찮아]하면요, 선악이 선명히 보여요.

 

왜냐? 여러분한테는 제가 항상 하는 얘기입니다. 나한테 해가 되는 걸 귀신같이 아는 욕심이 있고요, 다른 사람한테 해가 되는 걸 귀신 같이 아는 참나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몰라 괜찮아]만 하시면 내가 하는 일이 모두에게 좋은 일인가 아닌가는요, 그냥 판단이 되요. 그게 선이고요, 나는 좋은데 남한테는 해로운 건 악입니다. 그건 어느 종교나 악이라고 그래요.

 

모든 종교에서 악은 같아요. 초기 불교부터 악은요, 악은 모두한테 고통을 주는 거, 선은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겁니다. 요거 구분 못하실까요? 유치원만 나와도 다 하십니다. 하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그렇죠. 그러니까 [몰라 괜찮아]면 하고 싶게 되어있어요. 에고의 소리가 확 줄어드니까, 참나는요, 그걸 하고 싶어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꽃 피우는 법 간단합니다. [몰라 괜찮아]만 하시면, 그리고 움직이실 때 늘 지혜로운 판단, 자명한 판단, 양심이 합당한 판단. 선악을 정확히 분간하셔서 이 [몰라 괜찮아]와 이 반야의 지혜로 여러분을 인도하시면요, 여러분이 실제 하시는 일도 참나의 뜻에 맞는 일을 하시게 되어 있어요. 이게 꽃피우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법성, 그 진리가 들어있는 여러분 안에 품성에 진리가 가득 들어있어서 가능한 거지, 여러분 진리 안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깨어있어도 좋은 게 안 나오겠죠.

 

그러니까 무진장 공덕이 참나에 들어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법성을 말하는 거고, 법신을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안에는요, 남한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사무량심이 들어있고, 자비사가 다 들어있고, 육바라밀이 다 들어있어요. 참나만 두드리시면 나옵니다.

 

기독교에서 뭐라고 하냐하면 성령의 은총,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열매가 쏟아질 텐데, 성령한테 관심을 안주고, 에고 뜻대로만 살아가고 성령에 무관심하면 이게 열매가 안 나오는데, 조금만 [몰라 괜찮아]에 관심을 주시면 여기서 꽃이 피워버려요.

 

", 나를 드디어 찾아주는구나."하고 나한테 주제권, 경영권을 넘기기만 해라. 내가 다 알아서 해주마하는 상태로 여러분 안에 불성과 성령이 기다리고 있는데 여러분이 여러분 뜻대로, 여러분의 꼼수대로 하시는 겁니다. 자꾸 꼼수를 쓰시니까 답이 안 나와요. , 내려놓으면 길이 선명한 길인데, 대로가 눈앞에 있는 데 꼼수를 쓰면 좁은 길, 좁은 길만 찾아다닙니다. . 이해되시죠?

 

그래서 법성은 원융하여, 원융은 둥그런 원, 융합할 융. 조금도 거기서는 나와 남이 없다는 겁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나와 남이 없어서 무이상, 두 가지 상이 없다. 거기서는 어떤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나와 남의 차별이 없는 세계다. 우리나라 태극기에는 음양이 있으면 차별이 있는 걸까요? 그건 음양기가 됩니다. 차별이 있다고 그러면.

 

태극기라고 한 이유는, 위대한 꼭지점이라고 한 거는 그 음양이 진리로 들어있다는 거지, 그게 그 안에서는 음양이 서로 차별하지 않아요. 태극의 세계에서는. 현상계에 나오면 남녀가 쪼개지면 서로 차별이 일어납니다. 이해되십니까? 진리의 세계에서는 만법이 다 갖추어졌다고 했는데요, 육바라밀이 다 갖추어졌는데 이 6개가 싸울까요? 참나의 세계에서는 안 싸운다는 겁니다.

 

무이상이라는 건요, 그 안에 육바라밀이 없다는 게 아니라, 잠재되어 있을 뿐이지 서로 간에 싸우지 않아요. 참나의 서로 모습일 뿐이지. 그런데 현상계 나오면 보시냐, 지계냐가 다 찢어집니다. . 이해되시죠? 그래서 법성원융무이상, 만법의 진리를 다 갖추고 있지만, 거기는 하나로 융합되어있다. 만물의 씨앗으로 존재하는데, 제법부동본래적, 거기서 나오는 만법입니다. 제법은. 거기서 온갖 법이 다 나오죠. 현상계를 만들어내는.

 

거기서요, 배고픔도 나오고, 기쁨도 나오고, 슬픔도 나오고, 욕망도 나오고 다 나와요. 여러분이 만드신 거 하나도 없어요. 참나의 희노애락이 없다면 지금 여러분이 희노애락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이것도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탐진치가 여러분이 만드신 게 아니거든요. 탐진치도 다 참나에서 나온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욕망도 분노도 어리석음도 이 참나에 근원적인 정보가 있어서 걔네들이 조합되어서 나오다가 대게 안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뿐이지, 참나에 없던 게 현상계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대승에서 뭐라고 합니까? 번뇌가 보리다. 번뇌도 사실은 청정하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해되세요? 물감 자체는 청정한데, 그 번뇌가 나를 괴롭히고 남을 괴롭히는 데까지 가면 그놈을 빨리 처리해야 될 문제일 뿐이지, 그런다하더라도 탐진치를 다룰 때, 이놈이 죽일 놈들이라고 다루지 마시고, 원래 뭐죠? 교통정리만 잘해주면 아무 문제가 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그게 제법부동본래적, 만법 역시 진리의 본성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원래 움직인 적이 없고, 본래 고요할 뿐이다. 이 얘기는요, 만법이 본래 니르바나 상태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울고 웃고 하는 그것마저도, 울고 웃게 하는 그 자리는 참나자리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만법은 본래 오온이 본래 공하다.

 

반야심경에서 나오죠. 만법이 본래 다 참나의 나툼이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 지금 한번 실습해 보실래요? [몰라 괜찮아] 해보십시오. [몰라. 괜찮아] . [몰라] 모르시죠? 성함 모르십니다. 모르시는데, 지금 제 얘기 듣고 소리라는 법이랑 만나고 계시죠. 저를 보고 계시죠. 색이랑 법이랑 만나고 계시죠. 또 생각도 일어나시죠.

 

생각이라는 법을 만나고 계신데, 그 법들이 참나말고, 지금 [몰라 괜찮아] 해서 참나 내면의 깨어있음을 좀 강하게 해보십시오. 둘일까요? 그 깨어있음에 근거를 두지 않고 존재하는 게 있을 수 있을까요?

 

심각하게 여러분을 위협하는 그런 번뇌나 욕망이나 분노마저도 다 참나에서 올라옵니다. 올라와서 남한테 해를 끼치면 악이 되는 것뿐이지, 그 악도 본래 나온 자리가 어디라고요?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없는데 그게 나올 수 있나요? 지금 성함 모르시죠? 저 바라보고 계시죠? 그 자리에 생각이 있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생각이 나오고, 말이 나오고 하거든요.

 

그래서 대승불교의 입장은 만법이 본래 공하다는 겁니다. 즉 그 얘기는 만법이 허망하다는 게 아니고요, 만법이 다 참나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나라는 게 있어서 거기서 올라와요.

 

나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들만 여러분이 육바라밀로 잘 다스릴 수 있으면 참나의 힘을 가지고 다스릴 수 있으면 그대로 퍼펙트하게 여러분은 부처고 보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만법이 본래 고요하다. 그러니까 이 자리, 이 법성게자리 입장에서 보면, 여러분 이 현상계에 아무리 복잡하고 시끄러워도요,

 

, 에고는 시끄럽다고 하고 힘들다고 하는데, 깨어있으면 참나 상태에서는 힘들다는 얘기 하나요? 이름도 모르시는데? 제 얘기 듣고 보고하지만 그걸 버거워 하지 않습니다.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요. 에고가 시끄러워져야 이제 몇 번 불러야 시끄러워집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몇 번 더 커져야 이게 문제를 일으키지, 나를 사랑한 마음 자체도요, 참나에서 나온 겁니다. 참나가 원래 나잖아요. 그러니까 보십시오. 참나가 절대계에서 원래 나인데, 여러분의 의식에 제일 근원이 나인데, 그 나가 이 우주를 지금 인식하다보면 뭐가 생기나요? 시간 공간이 생겨요.

 

이 나가요, 순수한 나가, 지금 명상 중에 들어가 보시면 알테지만, 생각도 없는 나로 존재하다보면 시공도 못 느껴요. 그런데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 마음의 세계, 현상계랑 접속이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접속이 딱 되는 순간, 남이 있고, 내가 있고, 또 뭐가 있습니까? 그러려면 시공이 전제되어야 되요. 공간이 있어야 나와 남이 펼쳐지겠죠.

 

시간성이 또 생기죠. 이전과 이후가 생겨요. 나를 중심으로요, 참나 일 때는 아무것도 없던 게 그게 에고차원으로 내려오자마자 남이 내 앞사람, 뒷사람, 옆사람이 있고, 공간이 나오고 변화를 하고 있어요. 바로 전시간과 지금. 또 앞으로 올 시간이 생겨나요. 이게 불교식 관점이라는 겁니다. 마음을, 나를 중심으로 우주를 분석해보는 방식이요,

 

이렇게 하면 우주가 어떻게 생겼다는 거 아실 겁니다. 참나 입장에서. 참나 입장에서 시공도 다 나로부터 나온 거고, 나와 남도 나로부터 나와요. 보는 자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있어서 남이 보이거든요. 이런 관점 이해하시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그런 관점이라야 이게 이해가 됩니다.

 

제법이 본래 고요하다는 게, 내가 보고 있는 저 대상마저도 결국은 내 마음소관이고, 내 마음 다 어디서 나왔나요? 참나로 부터. 제가 이런 거 그린 적 있는데 혹시. 서양철학에서도 똑같은 접근을 합니다. 서양철학에서도 이걸 선험적, 경험이전에 선험적 자아 그럽니다. 여러분이 있어야 되요. 여러분 마음 위주로 우주를 보는 겁니다.

 

일단 여러분이 존재하셔야 되지 않나요? 존재하셔야 그 다음 이 우주를 설명하죠. 시간 공간을. 시간 공간에 가장 초점이 되는 여러분 자신이 있어야 되는데, 여러분 자신은 경험이전, 어떠한 때 묻지 않은 여러분 자신이 먼저 있어야 되요. 왜냐? 그래야 옷을 입히죠. 옷걸이는 경험이전의 순수한 자아이어야 됩니다. 이게 참나에요.

 

여기에 대해서 이제 어떤 경험의 세계, 시공이 경험되죠. 그래서 객관적안 대상의 세계, 시간 공간마저 포함한, 개관적인 나 이외의 것들이 보여요. 내 마음에. 그럼 이걸 이 대상이 지금 펼쳐지는데, 이 대상을 보는 나라는 게 또 펼쳐집니다. 이거는 경험적 자아, 즉 대상을 경험하는 자아가 생겨요. 이걸 우리가 에고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는 세계관이어야 됩니다. 나로부터. 나로부터.

 

순수한 내가 있고, [모른다]했을 때 존재하는 내가 있다가, 세상을 느끼는 순간, 세상을 느끼는 내가 생겨요. 울고 웃고 하는 내가 생겨요. 여기 이 나에서는 남이랑 지금 사이가 안 좋겠죠. 남이 있는 나가 되고요, 여기는요? 나와 남이 없어요. 여기서는 이런 구분이 없어요. 경험이 이전의 자아이기 때문에, 시공의 경험도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명상에서 이리 들어가는 걸 우리가 견성 그럽니다. 이해되시죠? 간단하죠? 요런 걸 전제하고 지금 보십시오.

 

그러니까 법성원융무이상, 이 자리에서는 둘이 없어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펼쳐진, 주관과 객관, ‘라는 것과 대상의 세계, 이 모든 만법. 이 만법마저도 다 여기서 나온 거기 때문에 이 놈도 원래 청정하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