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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융진 전투
제1차 고려-거란전쟁(993년)의 판도를 바꾸다.
993년 10월
거란의 동경 유수 소손녕이 80만(허풍의 숫자, 실제는 10만 이하)의 대군으로 침공했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이 발발했다.
916년 건국한 거란은
926년 발해, 986년 정안국(발해의 후신)을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를 석권한 후
대륙의 패자인 송나라 정벌 전쟁의 전단계로 고려를 공격한 것이다.
고려는 거란에 적대적이었다.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고려는
태조 왕건의 훈요10조에서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을 중시할 것”에 따라
고구려 실지회복을 위한 북진 정책,
송나라와 수교하고 거란에는 적대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993년 거란의 제1차 고려 침공을 시작으로
1010년 2차 침공, 1019년 3차 침공까지, 30년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이 시작됐다.
고려왕 성종은 본대를 거느리고 청천강 이남의 안주성까지 나아가 전쟁을 직접 지휘했다.
고려군의 선봉은 소손녕의 거란군과 청천강 이북의 봉산군에서 조우하여 첫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봉산의 첫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고 선봉대장인 윤서안이 포로로 잡힌다.
거란군의 위력에 눌린 성종은 안주에서 서경(평양)으로 물러났다.
첫 전투의 대패로 고려 조정엔 항복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고려는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너 안주성을 직공할 것으로 예상했다.
안주성을 점령하면 곧바로 서경(평양)에 도달하고, 서경마저 점령하면 무인지경으로 내달려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성종이 서경으로 물러났지만, 고려군의 주력은 안주성을 지키며 전세의 반전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군의 허를 찔렀다.
안주성을 공경하는 듯 허장성세를 부리는 한편,
별동대를 몰래 빼내어 청천강 건너 하류에 위치한 작은 토성인 ‘안융진’을 공격한다.
안융진에서 70리 거리의 안주에 총사령부를 두고, 청천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있던 고려군으로서는 꼼짝없이 기습을 당한 셈이다.
안융진이 점령당하면 청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곧바로 서경을 거쳐 개경까지 공격당하게 되는 것이다.
소손녕은 고려군의 주력이 배치된 안주성을 공격하는 모험수 보다는
겉으로는 안주성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안융진을 손쉽게 공략한 후,
안주성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곧바로 서경을 공략한 후 개경까지 돌격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안융진에 이어 안주성까지 점령한 후 80만 대군이라는 허장성세로 고려 조정을 겁박하면
거란군이 큰 손실 없이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어
향후 송나라와의 최후결전을 위한 안전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전략을 구상한 것이다.
어리석은 오랑캐 수준이 아니라 군사전략에 나름 일가견이 있는 수준의 전략 구사였다.
그럼 거란은 안융진을 손쉽게 점령했을까?
오늘 다루는 ‘작은 전투’는 안융진 전투다.
안융진 전투는 고려-거란 전쟁 중 일어난 전투였지만
실제 내용은 발해-거란 전쟁의 성격을 띤 전투였으며
거란에 멸망한 말해의 유민들이 거란에 복수한 전투였다.
거란군 별동대에게 기습당한 안융진의 수비대 책임자는 중량장 대도수였다.
대도수는 거란에게 926년 멸망한 발해의 마지막 태자였던 대광현의 아들이었다.
발해 재건 운동을 펴던 대광현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934년 발해 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동족의 나라인 고려로 귀순했다.
태조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내려 왕씨로 입적시키며 후대했다.
대광현과 발해 유민들은 황해도 이북 땅을 배정받고 고려인의 일부로 살아갔으며
대도수는 발해유민 후손들의 지도자였다.
당시 대도수의 계급은 정5품 무관직인 중랑장에 불과했다.
중랑장은 장군 밑의 계급이었다.
고려군 편제상으로 100여 명의 중랑장들이 50여 명의 장군(정4품)들을 보좌하는 일선 지휘관이자 참모였다.
고려 장군은 1000명의 군대를 지휘했으니, 각 장군에 배속된 2명의 중랑장은 각각 500명 정도의 군대를 지휘했을 것이다.
고려군의 계급은 상장군(정3품), 대장군(종3품) 장군, 중랑장, 낭장 순으로 이어졌다.
중랑장이라면 지금 군대의 편제로 보자면 연대장 정도 되는 영관급 지휘관인 셈이다.
거란군의 안융진 기습에 대도수는 1000명도 채 안되는 병력으로 맞섰다.
거란군의 별동대의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만명 규모 수준의 최정예 병력으로 추정된다.
전력상 절대 열세인 대도수는 발해유민들의 후손들을 총동원해 전투를 치렀다.
대도수와 발해 유민의 후손들은 발해를 무너뜨린 원수인 거란에 맞서 이를 악물고 싸웠을 것이다.
안융진 전투에서 대도수의 고려군이 승리했다.
발해와 정안국의 멸망으로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던 발해가
고려군이 거란군을 처음으로 물리친 안융진 전투에서 극적으로 등장했다.
대도수 장군은 1009년 2차 전쟁에서도 맹활약한다.
안융진 전투는 수십 만의 대군이 맞붙는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규모에 비해 매우 작은 전투였지만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중요한 전투가 되었다.
안융진 전투의 패배로 예기가 꺾인 거란군은
더 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고 청천강 이북에 포진한 채 고려를 향해 항복만 요구하는 입싸움으로 일관했다.
봉산 전투 패배 이후 항복론으로 기울어지고 있던 고려 조정은
안융진전투의 승리 소식에 고무되어 항전과 강화 전략으로 선회한다.
서희가 강화를 위한 담판에 나섰다.
서희-소손녕 담판은 우리 외교사의 빛나는 업적으로 기록된다.
서희는 압록강 이남과 청천강 이북, 현재의 평안북도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을
고려와 거란이 함께 몰아낸 후, 땅을 나누어 점령하자고 소손녕에게 제안했다.
소손녕은 서희의 이 제안을 수용했다.
서희의 외교담판 성공으로 당시까지도 고려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미치지 못하던 압록강 이남과 청천강 이북의 강동6주를 고려가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1차 고려-거란 전쟁은
안융진 전투에서 발해유민의 분전과 서희의 외교술로 고려의 정치적 승리로 귀결된다.
서희는 거란군이 물러난 직후 2년간 여진족을 공략하여 몰아내고
평안도 지역에 강동6주 지역에 총 29개 소의 성을 쌓는다.
여진족을 몰아낸다는 명분이었지만, 결국은 장차 침공할 거란군을 막을 방벽을 쌓은 것이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영토가 종전의 청천강 이남에서 압록강 이남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귀결됐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을 떠올리면 누구나 서희의 외교담판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서희의 외교력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대도수와 발해 유민군이 안융진전투에서 거란의 예봉을 확실히 꺾은 덕분임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생존에 있어 무력과 외교는 일란성 쌍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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