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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3) 오두산 통일전망대 ... 광개토태왕, 수군 상륙작전으로 백제 영토 한강 하구 오두산성 점령하다

Buddhastudy 2022. 6. 15. 20:31

 

 

 

광개토태왕

수군 상륙작전으로 백제 영토 한강 하구 오두산성 점령하다.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371년 즉위한 청년 황제 광개토왕은

즉위 다음 해인 392

백제를 공격해 황대호 강화섬을 점령한다.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후

백제의 영토가 되었던 황해도와 예성강 일대의 실지를 회복하며 창끝을 백제로 겨눴다.

 

백제 16대 진사왕과 벌인 392년 첫 전쟁에서

예성강과 강화섬을 장악한 광개토태왕은

대담한 전략으로 396년 제2차 백제 정벌에 나선다.

 

광개토태왕이 빼든 전략은 수군을 활용한 상륙작전이었다.

고구려 수군은 황해도에서 출발

강화섬을 거쳐 오두산성(또는 관미성이란 학설도 있다)에 기습상륙했다.

 

수군 전력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면

강화섬을 미리 점령해놓지 않았다면

시도하기 어려운 대담한 전격전 전략이었다.

 

고구려 군은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점의 요충지인 오두산에 기습 상륙한 후

백제 수비대를 공격하여 오두산을 점령한다.

4세기 고대 전쟁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격전 개념의 상륙전투였다.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오두산성은 바다로 3면이 툭 튀어나온 특이한 지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오두산은 비록 110m 높이의 야트막한 구릉이었지만

서해와 한강-임진강, 육지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한강 위례성에 도읍해 있는 백제의 입장에서는

오두산성이 고구려군의 수중에 떨어진 사태는 국가적 대쟁앙이었다.

 

오두산은 충청과 호남 지역에서 서해를 거쳐 한강을 통해

위례성으로 운송되는 각종 물자를 통제하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위례성을 도웁으로 한 백제의 국가경영은 큰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역은 대한민국 해병대가 굳게 지키는 전략 요충지다.

 

위례성을 지키려 한강 하구에 오두산성을 설치한 백제의 전략적 안목도 대단하지만

백제에게 치명상을 가하기 위해 대담한 상륙작전을 감행한 광개토태왕의 군사전략 안목이

더 돋보인다.

 

수백 척의 크고 작은 배로 수송한 1만여 명 고구려군의 기습으로

오두산성이 함락됐다.

고구려군은 수륙 병진으로 한강을 거슬러 위례성을 향해 진격했다.

 

최종 목표는 백제 수도 위례성이었다.

고구려군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백제군을 연파한다.

광개토태왕의 수륙 병진 전격전에 무너진 백제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백제 아신왕은 동생과 대신 10명을 고구려에 볼모로 내놓고

백제가 고구려의 제후국임을 대내외에 서약하는 치욕을 감수하며

망국의 위기를 모면한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형제국이었던 백제에 대한 공략을 여기서 중지한다.

그의 눈은 중국 대륙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요절하며 아쉽게도 대륙 정벌과 대륙 경영의 꿈을 접는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펼쳐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위례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남진에 밀린 백제는 475년 웅진성으로 천도했다.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하여 상륙작전을 기획하여 실행한 것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복군주로 손꼽히는 광개토태왕의 전략적 면모가

잘 드러나는 역사의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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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걷기 코스: 금촌역 오두산 통일전망대(11km)

파주 금촌역에서 내려 11km의 지방도로를 걸어가면

산 통일전망대에 도달할 수 있다.

한강걷기 코스로는 일산 대화역에서 통일전망대까지 21km를 걸어가면 되지만

한강변이 군사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한강을 제대로 조망할 수 없다.

고양-파주 한강변도 서울처럼 시민에게 개방되는 평화의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