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픽입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10명 중 6명만이 통일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또 10명 중 3명만이 통일이 될 경우 북한 주민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통일에 대한 그 절실함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2000년 역사적인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있은 직후에 한 역사 학술지에서는 역사학계 원로들을 대상으로 통일 이후에 우리나라에 국호, 수도, 국가 상징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설문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국호는 그대로 두고, 수도는 평양으로 옮기자’ 라고 답한 쪽이 상대적 다수였구요,
아니면 ‘국호를 새로 만들고 수도는 서울로 유지하자’는 쪽도 상대적으로 다수였습니다.
‘국기가 국가 같은 국가 상징물은 완전히 새로 만들자.’ 라고 답한 쪽이 절대적 다수였습니다.
지금 기준에서도 논란이 일만한 그런 설문이었는데요, 그 당시 왜 그런 설문조사를 진행했느냐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1990년에 갑작스럽게 통일을 이룬 독일의 사례였습니다.
독일은 국기도 바이마르 공화국 국기를 동서독이 같이 쓰다가 1959년에 동독은 거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따로 만들었습니다.
수도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인 베를린이 분단이 되어서 동독은 베를린을 수도로 삼았고, 서독은 본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통일 이후에 국호는 원래 같았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독일로 Deutschland로 썼습니다만 수도는 동독의 수도였던 베를린으로 옮겼죠.
본의 구축되어 있었던 독일의 국가적 네트워크가 약화되는 걸 감수한 결단이었습니다.
이 결단에 동독 주민들, 서독 체제에 흡수된 동독 주민들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고 봤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역사학자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영토통일과 민족통일은 별개라는 사실,
일단 영토통일이 이루어지더라도 민족통일까지 이르는 길은 길고 험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픽은 민족통일과 영토통일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서기 660년.
수도 사비를 함락하고 왕과 태자를 포로로 삼았죠.
후대의 역사가들은 백제의 멸망으로 기록했습니다만 당대의 백제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새 지도자를 옹립하고, 왜에 지원군까지 끌어들여서 자기 땅에서 신라와 당나라군들을 몰아내기 위해 계속 싸웠죠.
그 싸움은 4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서기 668년, 이번에 또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해서 평양성을 함락하고, 보장왕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역시 고구려의 멸망으로 역사에는 기록된 사건이죠.
그러나 당대 고구려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새 지도자를 옹립하고 자기 땅을 찾기 위해서 또 싸웠습니다.
이번에는 신라가 고구려인들을 지원했구요, 그래서 이들의 싸움도 5년이나 지속이 되었습니다.
신라가 백제 땅 전역과 고구려 땅 일부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것은 서기 675년이었습니다.
이로서 통일신라시대라고 하는 것이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게 되었죠.
그런데 정말 통일신라였을까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고, 그 주민들을 자기 백성으로 편입한 것은 맞지만 그 편입된 주민들은 자기가 신라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지 무려 225년이나 지난 서기 900년에 백제의 옛 땅에서 세력을 키워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견훤은 나라이름을 후백제라고 정했습니다.
그가 백제 왕실과 무슨 혈연관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백제의 부흥을 바라는 그 지역 주민들의 열망과 염원을 정치적으로 동원, 이용하기 위해서였죠.
그게 자기의 왕위를 확고히 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인 서기 901년 옛고구려 땅 일부를 차지한 궁예는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고구려를 위해 복수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알려져 있는 바로는 그는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 신라 귀족의 후예라고 하죠.
신라 귀족의 후예가 고구려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했습니다.
자신의 혈통보다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200년 넘게 지녀온 복수님, 자기네 나라를 되찾겠다는 그런 마음이 정치적으로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죠.
궁예의 고려는 후에 마진, 태봉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 왕위에 오른 왕건에 의해서 다시 고려로 돌아갑니다.
왕건은 공공연하게 나라 이름을 통해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표시했던 거죠.
그리고 왕건에 의한 후삼국의 재통일은 이제 신라대신 삼국 속의 고구려가 한반도에 통일지배자, 통일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으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이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려 왕조가 선지 다시 200년이 훨씬 지난 1190년 신라의 수도였던 당시 동경, 옛 서라벌이죠. 그 땅에서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모두 신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목표를 표방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1217년 서경에서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최광수라는 사람이 이 반란을 이끌었는데, 그는 자기의 직함을 고구려부흥병마사, 고려에서 또 고구려를 부흥하겠다고 했던 것이죠.
또 1236년에는 엣 백제 땅에 살던 이연년 형제가 역시 병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자칭 백제도원수라고 했습니다.
고구려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지 600년
또 고려가 후삼국을 재통일한지 300년이 지났어도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이라는 자의식은 소멸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들은 여전히 신라왕조로부터 또 나중에는 고려왕조로부터 독립해서 옛신라, 옛백제, 옛고구려를 되찾겠다고 했던 거죠.
삼국사기가 출판된 것은 1145년, 이때에는 단군관련 기록이 없었습니다.
단군 관련 기록은 잘 아시다시피 삼국유사에 처음 나타납니다.
몽골침입기였죠.
몽골이라는 강력한 외적에 맞서서, 외적의 침략으로 인해서,
고구려인이었던 백제인이었던 신라인이었던 가릴 것 없이 참혹한 피해를 당하는 와중에,
비로소 이제 우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라고 하는 그런 나라들 이전에
조선의 후예다 라고 하는 인식이 싹텄고,
비로소 단군관련 기사가 역사서에 실렸던 것입니다.
고려의 뒤를 이은 왕조가 국가 이름을 ‘조선’이라고 정한 것도,
이제 더 이상 신라 백제 고구려라는 이름의 구애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몽골 침략기에 비로소 하나로 통합된
신라 고구려 백제인의 통합체로서의 국가를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더 이상 신라니, 백제니, 고구려니
이런 옛나라들을 부흥하겠다고 하는 그런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이른바 고구려 유민의식, 백제 유민의식, 신라 유민의식이 완전히 극복되기까지에는
무려 600년의 세월이 넘게 필요했던 셈이죠.
내년은 남북이 서로 총칼을 겨눈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정도로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지 70년이 지났고, 또 그 전쟁은 남북한에 사는 사람 각각에게 상대에 대한 아주 강렬한 복수심을 심어놓았습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프랑스 파리에 가든 현실이 꾸지도 않은 꿈이 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남북 문화의 이질화를 걱정하고,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모두의 시작할 때 말씀드렸듯이 지금은 통일이 꼭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의 40%에 달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편의 복수심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는데,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 실정인 거죠.
그러나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져도, 또 그 경로가 아무리 복잡해도, 같은 언어를 쓰면서 관념적으로든 아니면 좀 더 진심을 담았었든, 서로를 동포라고 불러왔던 우리 역사적 힘은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우리를 통일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현대에 왕조국가와 비슷한 세습독재체제가 영속할 수는 없을 겁니다.
네, 올해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북한에 인도적 차원의 식량지원까지 반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전쟁이 나면 북한 주민 모두를 우리 국민 한사람 한 사람씩 맡아서 다 죽이자’
이런 이야기까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지만 하는 실정입니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통일이 된다면 북한 주민들이 남한 주민들 보고
“우리가 굶주려 죽어갈 때, 여유가 있으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식량을 지원하지 않았으면서 우리를 동포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서로 적대했던 기억만을 간직한 채로 통일이 된다면
그 통일은 어쩌면 또 다른 재앙을 낳을 수도 있을 겁니다.
북한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인도적이기 때문에 필요한 일일뿐만 아니라
영토 통일 이후에 민족통일 과정을 순탄하게
또 앞빠르게 진전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네, 전우용의 픽,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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