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화가 났을 경우에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났는데 어떻게 주체를 해. 못하지. 안 그래요? 주체를 못할 정도로 화가 났는데, 그걸 질문을 하면 어떻게 해. 그건 주체를 못하는 거지. 그냥. 생긴 대로 엎어지는 수밖에 없지. 그런데 어떤 화도 사실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까지는 안 갑니다. 우리가 거기 넘치는 경우가 있죠. 그러나 자꾸 여러분들이 화라는 게 뭐 때문에 일어난다? ‘내가 옳다’ 하는 것에 100% 사로잡히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일어나고, 80%정도 사로잡히면 눈에 뵈는 게 없고, 70%쯤 사로잡히면 화를 내고 약간 뒤끝이 좀 켕기고. 그렇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이럴 정도로 화가 난다는 것은 100% 자기가 옳다는데 딱 순간적으로 사로잡혀 버린다. 그러니까 늘 제법이 공한 이치를 안다는 거는 화가 나는 거를 상대에게 100% 돌리는 게 아니고, 늘 화가 탁~ 일어날 때는 내가 옳다는데 지금 어떤 상태다? 100% 사로잡힌 상태. 이걸 늘 생각해야 돼. ‘네가’ 하는 쪽으로 한단 말이오. 그때 빨리 ‘내가, 내가 사로잡힌다.’ 그래서 이 수행문이 있잖아요. 수행문을 늘 독송을 해야 되요. 그러면 하는 형태는 그렇게 나와도, 옛날하고 똑같이 나와도, 시간이 경과하면 그 강도가 점점 약해집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돌이키는 힘이 생기게 된다.
첫째 알아차려야 되요. 주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순간에 못 알아차린다는 거요. 못 알아차린다. 일단 이렇게 알아차려야 돼.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이게 근본적인 치유고, 뭐랄까? 임시적인 치료, 근본 뿌리를 뽑는 거는 아니지만, 임시적인 치료는 어떻게 하냐 하면 호흡을 관찰하면 좋겠네. 이게 마음속에서 화가 탁 일어날 때는 벌써 심장이 뛰고 숨이 가파진다. 그걸 빨리 알아차리고 호흡을 딱 지켜봐야 돼. 코끝에 집중을 해서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딱 지켜보면 이게 가라앉죠.
여러분들 실험을 한번 해 보세요. 실험을. 만약에 남자들 같으면 성욕이 딱 일어났다. 그럴 때 호흡을 딱 한 번 지켜봐요. 세지 말고. 들어오면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가면 나가는 줄 알고. 그 호흡의 상태를 지켜보면 2~3분만 있으면 딱 평정이 됩니다. 이렇게 딱 체험을 해야 돼. 자기 몸으로. 수행이라는 건. 모든 대상에서 체험을 해야 돼. 경계에 끄달려 우리가 심리 현상이 일어날 때, 그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진을 해 봤을 때, 그 경계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도 평정이 되는 거를 체험을 하게 되면, 비록 그런 게 일어나더라도 자기 컨트롤이 가능해 지는 거다.
Q2. 꿈(원)일까? 욕심일까?
꿈이라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죠. ‘야, 임마 그건 꿈이야.’ 이럴 때는 뭐다? 헛거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헛거다. 망상이다. 이런 얘기고. 또 ‘야~ 꿈을 가져야지.’ 이럴 때는 그것은 희망을 뜻할 때가 있죠. 또 꿈이라는 것이 헛된 욕심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꿈을 가졌는데 초조하다는 건 뭘 말할까? 헛된 욕심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저 멀리 보는 방향, 희망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가기 위해서는 한발한발을 걸어가야 되는데, 마음이 한발한발 가는 거를 무시하고 시간적으로나 거리적으로 이미 마음이 앞에 가버려.
그러면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마음에서 초조하고, 답답함이 생기는 거요. 이건 욕심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들이 갖는 어떤 희망이 있어. 바람이 있어. 그 바람이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원인지. 내가 중생을 구제하겠다. 내가 고아원을 하나 만들겠다. 내가 좋은 일을 하겠다. 그랬는데 그게 원입니까? 그것도 욕심입니까? 그거는 마음이 괴롭거나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답답하면 그건 다 뭐다? 욕심이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거라도 비현실적이 되면. 그 원이면 어떠냐?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안 생기는 거요. 그것이 실현이 안 되면 실현되기 위해서 하거든,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하고,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하고, 다만 할 뿐인 거요.
열 번해서 안 되면 스무 번하고, 스무 번 해서 안 되면 백 번하면 되요. 그래서 보살의 원에 그런 게 있잖아. 보현보살의 원 중에 그런 게 있죠? ‘중생의 업이 다함이 없으므로 보살의 업도 다함이 없다.’ 중생을 구제하겠다. 이게 원이냐? 욕심이냐? 우린 대부분 욕심, 우리가 만약에 지장보살이라서 지옥에 가서 한번 건져내 보자. 지가 잘못해서 지옥에 와서 괴롭지만은 인생이 불쌍해서 건져 내 놨다.
그런데 이게 또 그 짓해서 또 기어들어와. 3번만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어떻다? “이 저 시끼 빼버려라. 안 된다. 안 된다.” 이렇게 된단 말이오. 그게 좋은 일도 지 뜻대로 안되면 어때요?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이거 원이 아니죠. 중생은 그런 업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보살은 그걸 보고 답답해하거나, 그걸 보고 힘들어 하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더욱더 뭐하게 여긴다? 불쌍하게 여기고, 그래서 더욱더 내 할 일이 있는 거요. 그래서 원이 더 커진다 이 말이오. 중생의 업이 끝이 없으므로 나의 원도 끝이 없다.
중생의 업이 태산 같으니 내 원도 하늘같다 이거야. 그러니까 중생의 교화가 답답하므로, 한계로,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에요. 그럴 때 그것은 원이라고 그래. 그런데 우리들이 갖는 생각은 대부분 다 욕심이다. 여러분이 남을 돕겠다. 수행하겠다. 이것도 다 욕심이에요. 수행을 하는 사람이 수행이 안 돼서, 안 깨달아져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건 다 욕심이오. 수행을 돈벌이 하듯이, 명예를 얻듯이, 권력을 잡듯이, 그런 걸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하고, 답답하고 병나고,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어떤 꿈을 갖는 게 좋겠느냐? 그건 뭐 사람마다 다 다르죠? 여러분들이 과학자가 되는 꿈도 좋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꿈을 꿔도 좋고, 뭐 여러 꿈을 꿔도 좋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 여인과 한 남자와 평범하게 만나서 사랑하고 평범하게 살겠다. 이런 꿈도 꿈이에요. 그런데 평범한, 말이 평범하지 그것도 욕심이에요. 왜? 내 뜻에 맞는 여자를 만나서 이 말이 바로 어패가 있는 말이에요. 아시겠습니까? 내 뜻에 맞는 여자라는 얘기는, 앞으로 지 식대로 살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 내 뜻에 맞는 남자 여자는 없어. 이 세상에. 그런 거를 추구하는 거 자체가 바로 엄청난 욕심이오. 엄청난 아상이고.
그러니까 목표가 꿈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비록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과 뜻을 맞추어 가면서, 거기는 수많은 어려움의 과정을 이미 담고 있다.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럴 때 그것이 평범한 도심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 그런데 여러분들이 부부가 만나서 싸우죠. 싸우면서 사는데. 뜻을 맞추기 보다는 싸우면서 살거나, 대립하고 살거나, 겨우 잘해야 어때요? 외면하고 삽니다. 아시겠어요?
‘에이고, 니는 니대로 해라, 나는 나대로 할게?’ 이래가지고 신경 끊고 살자. 이런 수준이지 진짜 뜻을 싹싹 맞춰서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뜻을 맞춰 사는 것보다 쉬운 일이 혼자 사는 거요. 그래서 스님들 공부는 이 보살도가 못 되요. 그래서 늘 이 성문연각이라고 그렇잖아. 그죠? 왜? 뜻을 맞추는 힘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보통 중생의 외면하는 힘의 종류에요. 그러니까 뜻을 맞추기가 어려우니까 아예 그냥 어때요? 외면해 버려. 끊어 버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일단은 종류가 두 종류요. 범부 중생이거나 보살이거나. 길이. 중보다 위에 있거나 밑에 있거나.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머리 깎고 중이 되면 아무튼 중간은 갈 수가 있어. 그런데 여러분들은 밑에 떨어지거나 올라가거나. 가능성이 있어. 요즘 도박도 로똔가 뭔가 아까 신문에 보니 그 가능성 때문에 구름 떼처럼 모인다니까. 여러분도 아마 보살이 될 희망으로 인해서 결혼을 해서 사는지 모르겠어. 나는 아예 그런 희망을 접어 버렸어. 그런 800만분의 1의 행운을 찾기 보다는 내 돈 갖고 내 먹자. 이런 주의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800만분의 1의 희망을 걸고 살잖아. 그죠? 그런 것처럼 여러분들이, 맞추고 살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그건 이미 보살도요. 승려 수준을 이미 넘어가. 그러니까 그걸 연습을 해 봐요. 머리 깎고 중 돼서 수행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내기 보다는, 이미 결혼한 사람은 맞추고 사는 게 이게 해탈지도다. 이렇게 원칙을 정해서 함 맞춰봐. 상대가 얘기하는 게 다 귀에 거슬리지 않고 들리도록. ‘아~ 그럴 수 있겠네요.’ ‘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예.’ 옳다는 게 아니야. 아시겠어요? ‘옳다.’ 이런 말이 아니고, 그럴 수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 이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 그게 ‘예’에요. ‘아, 예.’ 한번 해 보세요. 그것만 하면 뭐. 행자생활 3년이 다 그거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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