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아의 [제로] 함께 하겠습니다.
오늘 읽어 드릴 부분은
‘바람 없는 바람’에 대한 내용인데요.
‘바람 없는 바람’이란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바람,
즉 순수한 바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품는 대부분의 ‘바람’은
‘결핍’에서 나오기 때문에
부정적 잠재의식을 반영하게 되구요.
따라서 ‘바람’의 욕구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결핍과 부정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됩니다.
이것은 원하지 않는 부정적 결과를 이끌어 내게 되는데요.
부정적 인과를 만들어내지 않고
인과법칙을 초월하는 ‘바람’을 어떻게 품을 수 있을지….
내용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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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바람’은 ‘결핍’이라는 전제로부터 일어난다.
즉, 나의 모든 염원은
원하는 결과와 동시에, 원하지 않는 부정적 결과도 만들어 낸다.
삶이 불만족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처럼 원치 않는 상황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기 때문인데
그 또한 내가 창조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늘 원하는 상황이 실현되기를 바라지만
그런 ‘바람’이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잠재의식 속의 부정적 기억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힘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과관계에 의해 삶이 더 복잡하게 꼬이기 십상이다.
우리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외부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그 효과는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들이 잇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스스로 내 안의 창조력을 조절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 욕구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아낼 수가 없다면
한 가지 대안이 있다.
‘바라지 않는 것’이다.
바라지 않으면
동기가 되는 정신에너지가 존재하지 않아서
인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은
어떻게 창조하란 말인가?
바로 ‘바람 없는 바람’을 하는 것이다.
‘바람 없는 바람’이란
이유가 없는 바람,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바람
즉 순수한 바람을 의미한다.
‘바람 없는 바람’은 언어적 모순이지만
이 우주는 바로 그런 모순 속에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욕망으로써 이런저런 것을 바란다.
그것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일어나는 생각들이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내가 원하는 삶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오히려 내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드는 원흉일지도 모른다.
욕망에 의한 바람은
불필요한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바라지 말라는 이유는
‘거짓 나’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을 바라는, 그런 ‘표피적인 바람’을 그칠 때
비로소 우리 ‘본연의 나’가 가야 할 길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이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바람이다.
그러니 ‘바람 없는 바람’이란
‘거짓 나’가 욕망의 바람을 그칠 때 드러나는 ‘진짜 나’의 바람이다.
순수한 바람은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모두를 위하는 순수한 동기를 지닌다.
그것은 개인적인 나를 위한 바람이 아니라
내가 소멸된 무아의 바람이다.
그때 우주는 나의 바람대로 현실을 창조해주기 시작한다.
무아의 창조는
내가 특정한 의념을 가지고 끌어당기는 창조와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모든 일이 술술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한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들이 신기하게 해결되어 버린다.
우주 에너지의 흐름에 막힘이란 없기 때문이다.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바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나만을 위한 바람이 아니라
타인들을 위해 순수하게 빌어주는 축복이 이에 해당한다.
순수한 바람은
특별한 속성값을 띠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진동이 전달되면
방해받는 일 없이 곧바로 현실이 된다.
불특정 대상을 위해 축언을 하면
그 에너지가 도착할 대상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과의 인과관계에 영향받는 과정 없이 그대로 작용한다.
물질적인 환경조건만 갖춰지면 곧장 현실화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 작용하는 인과관계를 모두 알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인과관계를 보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
인과의 법칙을 초월하여 사는 유일한 방법은
그 원인에 해당하는 ‘동기’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품게 되는 ‘바람 없는 바람’은
결과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때 우리에게는 오직 순수한 행과 체험에서 오는 기쁨만이 남게 된다.
그것이 인과의 법칙을 초월하는 바람이며 무위의 삶이다.
불우이웃을 도울 때
사람들이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봐줄 것을 기대하거나
누가 시켜서 하거나, 그들을 동정하거나 죄책감을 느꼈다면
그 행위에는 나의 특정한 동기가 배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내가 기대한 바와 다르게 나왔을 때
우리는 불편함, 분노, 배신감 등의 감정에 시달리게 된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노인에게
매일 3천 원씩 적선한 착한 아주머니가 있다고 하자.
그 아주머니는 자기 아버지와 같은 나이대의 그 노인을 불쌍하게 여겨서
볼 때마다 돈을 건넨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머니는
그 노인이 벤츠 자동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 노인은 자리를 주섬주섬 정리하고 나가더니
대기하고 있던 벤츠의 뒷좌석에 태연히 앉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아주머니는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 노인이 더 이상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보다 훨씬 더 잘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분노마저 솟구친다.
그 후로 그 아주머니는 구걸하는 사람들을 불신하고
단 한 푼도 기부를 하지 않게 된다.
좀 과장되긴 했지만
이처럼 현실은 늘 나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내가 늘 어떤 바람을 품은 채 현실을 대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아주머니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돈을 건넸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남의 도움을 구걸한 그 노인이
벤츠를 타고 다니든, 돈다발을 세든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어떠한 바람도, 목적도 없었다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제로 에너지
곧 영점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그 바람 자체에는
어떠한 에너지도 실려 있지 않다.
‘바람 없는 바람’에 의한 행동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바람 없는 바람’을 실천하는 대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서 특별한 의미를 느끼고 싶어한다.
아주머니의 선한 행위는 그 자체로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왜 분노하는가?
그 노인에게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 노인이 매일 밥을 굶는 처지가 아니라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노인을 통해서
‘저런 사람도 사는데…’라는 위안을 받아왔는데
그 믿음이 깨지니 자괴감이 드는가?
‘바람 없는 바람’과 ‘바람 없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삶은 너무나 아름답다.
거기에는 나의 거짓된 욕구가 투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인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저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마음 속 깊이 원했던 바로 그 행복이 실현된다.
마치 우주의 선물처럼.
엄청나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미 삶 속에서 이런 경험을 숱하게 해왔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잠깐 떠올렸다 잊어버렸던 소소한 생각들은 대단히 잘 이루어진다.
그때 우리는 어렴풋이
‘욕심을 버리면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진실이다.
실제로 ‘의도’가 잔뜩 들어간 염원을 이뤄내는 것보다
‘바람 없는 바람’을 성취하는 일이 더 쉽다.
후자는 인과의 법칙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살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의식을 제로 포인트에 가져다 놓고
인과법칙을 초월하여
매 순간이 목적인 삶을 살 때,
우주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때맞추어 기꺼이 내어놓는다.
제로 포인트에서
‘바람 없는 바람’으로 일으킨 창조의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현실을 꽃피우며, 어떠한 걱정도 근심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왔던 삶을
스스로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행복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가져야 하고
뭔가를 갖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배워왔다.
‘끌어당김의 법칙’도 정신에너지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유위법에 속한다.
하지만 ‘바람 없는 바람’은 정신에너지가 아니라
우주의 순리에 자신의 삶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축복과 창조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내부의 프로그램을 비우고
우주와 하나가 되어
우주의 에너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바라던 모든 것을 창조하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채널 [지혜별숲] 이었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평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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