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28] 중도와 변증법 / 피올라 현대선 6강 "깨달음을 가로막는 실수들" 2회

Buddhastudy 2024. 8. 27. 19:33

 

 

두 번째는

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제가 비유를 들고 싶은 게

그 헤겔의 철학 중에 정반합이라는 게 있어요.

정반합의라는 게 뭐냐 하면

이제 뭐 간단히 말해서

처음에 이게 옳다라고 생각하다가

그거에 반대,

이 세상에 옳다는 게 진리라는 게 있다면

모든 걸 포괄해야지

이쪽만 옳고 저쪽은 틀렸다 하면

진리가 반쪽 자리가 되잖아요.

 

그럼 무슨 진리가 반쪽이야?

진리 아닌 게 또 있어.

그러니까 그 반대되는 것도 같이 살펴보자는 거예요.

이것만 볼 게 아니라 반대도 보자.

 

그러면 내가 여태까지 이걸 진리라고 믿었는데

이제 봤더니

저것도 이거를 분명히 이거의 상대지만

이거하고 균형을 갖는 무언가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에서 반으로 가면

헤겔의 철학은 뭐냐 하면

이거와 이거 반대되는 걸, 둘 다 우리가 이해하고

그런 것에 대해서 둘 다 수용할 때

그때 합의 길이 열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불교의 깨달음하고도 굉장히 상통하는 점이 있어요.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하면

합이라고 하는 게

이것과 이것 사이에 양다리 걸치는 게 아니에요.

즉 중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뭐가 합이냐?

이럴 수도 있고 이럴 수도 있다는, 확 열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는 자꾸 어떤 법을 이렇게 자꾸 추구해요. 법을.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자전거를 탄다고 할 때

이렇게 경사길 커브길을 돌려면 몸이 이렇게 기울어져야 되죠.

근데 그 기울어지는 각도를 30도를 꼭 유지해야 된다고 그러면

10도만 기울여야 될 데서는 쓰러지게 돼 있어요.

어떤 때에서는 30도 이상 기울여야 될 수도 있을 거야.

또 어떤 때는 똑바로 서서 가야지 왜 기울여

기울일 필요가 없는 평지에서는 똑바로 가야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합이에요.

이게 바로 중도라고

 

중도라는 게 뭐냐 하면

각도에 정해진 바가 없는데

그때그때 맞게 기울어지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수영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때 우리가 수영을 잘하려면

어떤 때는 물 속으로도 좀 들어가야 되고

어떤 때는 물 밖으로 나와야 돼요.

 

근데 무슨 정해진 법이 있어?

물 밑 10cm에서 계속 팔다리를 흔들어라

그런 법이 없어요.

어떤 때는 물 밖으로 완전히 상체가 나와야 되고

어떤 때는 물속으로 잠수해야 돼.

그래야 이 물이라는 수면 위에서

일정한 부력을 이용하면서 이렇게 나아갈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양다리 걸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정과 반을 다 포용하고 수용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하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여러분이 이 세상에 너무 여태까지 몰입해서 살아오셨잖아.

 

세상의 지식, 세상의 탐진치, 세상 사회 현대 문명의 삶의 방식

이 개체의 나, 이 몸의 안위를 위해서

타인과 경쟁해야 되고, 뭔가 나를 우선 챙겨야 되는

뭐 이런 이런 것들을 여태까지 수십 년간 살아오셨잖아요.

그 방식대로, 그렇죠?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게 살아 살아야 이 몸 하나를 유지하니까.

 

그런데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게

그렇게 하라고 해요. 아니면 그 반대를 가르쳐요?

니 걸 내줘라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내밀어라

이타적인 걸 자꾸 강조하잖아요.

 

그럼 솔직히 여러분 생각해 봐요.

그렇게 되면 간 달라는 사람한테 허파도 떼줘라

이런 논리가 되는데

그럼 지가 어떻게 살겠어요?

 

결국 이게 뭐냐 하면

하나는 정이고 하나는 반인 거예요.

현대 종교는 기독교든 불교든

보살행이니 이타행이니 육바라밀이니 잘 보면

정 이렇게 살아온 우리들에게 저렇게 살라고 가르치는 거니까

정과 반인 거예요.

 

근데 이런 데 얽매이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양쪽의 합의 뭔가? 이 중도가 뭔가를

여러분이 때로는 진짜 이기적인 사람 앞에서는 여러분도 이기적이 돼야 되고

악인 앞에서는 여러분도 그 사람을 대화할 줄 아는

그 뱀 같은 지혜가 있어야 돼요.

 

그렇지만 계속 그렇게 가는 게 아니지

필요에 따라서 선과악을 마음대로 굴려 쓰지만

그거를 초월해 있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태초에 태어났을 때는 갓난 애기였을 때는

여러분은 태초에 아담과 이브처럼 그냥 생명 그 자체였어.

에덴 동산의 그 존재 한마디로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면목 그 자체로 태어난 거나 진배가 없는데

이게 살아오면서 문명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그게 이 식수존 교육받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원래 있던 이 동그라미인 걸 잊어버리고

그 안에 식스존이 들어선 거예요.

그 대신에 그래서 식스존이라는 구름이

원래 있던 보름달을 가려버린 거예요.

 

그런데 이제 그 보름달을 다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우리가 식스존을 그래서 내려놔야 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자기 생각도 내려놓고.

 

그런데 사실 우리가 생각도 내려놓고, 감정도 내려놓고, 감각도 내려놔라.

이걸 잘못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냐면

정에서 반으로 가기 때문에

세상살이를 참 힘들게 살게 돼요. 안 그러겠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돼.

아니 현대인이 출가한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하고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그런 공부를 하면서도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 태초의 본래면목과

현 문명이 요구하는 두 가지 합을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중도의 삶이에요.

 

그래서 생각하되 생각 속에 빠지지 말라

분별하되 분별 속에 있지 말라

이런 말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명에 푹 빠졌던 우리는

한 번쯤은 이제는 이 완전한 이 그 진리 이 뭐라고 할까

이 본래면목의 이 자리에

또 한번 완전히 몰입해 볼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완전한 정을 경험해 보고

완전한 합을 경험해 봐야

정과 반을 경험해 봐야

완전한 합을 합에 깨어날 수가 있는데

완전하지 않고 대충 적당히 생각으로 이렇게 굴리고 있으면

그 사람의 깨어남은 약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한 번은 몰입해 봐야 돼요.

이쪽 끝과 이쪽 끝에.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몰입은 중요한데

거기에 빠져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몰입을 체험하는 건 좋은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