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61] 안이비설신의라는 살아있음 / 피올라 현대선 10강 "내어맡김의 공부" 4회

Buddhastudy 2024. 12. 30. 19:22

 

 

그래서 우리가 잘 봅시다.

여러분이 갓난아기 때 태어났을 때 막 갓태어났을 때

자기가

아 나 태어났구나, 남자구나 나는, 여자구나하고 태어나신 분 손 들어봐.

아무도 없어요.

 

태어났을 때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어요.

언제 개혁해?

자기의 기억할 수 있는 최대한 거꾸로 올라가면

아마 한 4, 5살 그때 무렵에 최초의 기억이 있을 거야.

근데 요즘 애들은 영특해서

두세 살 때도 기억하는 애들이 있대요.

 

근데 어쨌든 그 이전은 몰라, 아무도 몰라.

오직 모를 뿐의 그 모름이야.

왜 그럴까? 왜 그걸 모를까?

 

이 자리는, 지금 이 자리에 그 자리가

갓난아기가 존재했던 그 자리가

지금 여기도 계속 있어요.

여러분 눈앞에 있잖아.

 

그런데 이걸 우리는

이 자리는 기억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기억을 만드는 재료거든.

기억을 만드는 재료고, 재질이지

기억의 대상화가 될 수 없어.

기억을 만드는 자야.

그래서 기억의 대상이 안 돼요.

스스로 영원한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기억의 대상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여러분 모른다고 그래.

모른다는 건 뭐냐 하면

기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잘 생각해 봐요.

우리가 어떤 기억을 하다가 기억이 잊혀졌어, 망각했어.

그럼, 기억이 사라졌죠.

사라진 자리도 이 자리 아니에요?

 

이 자리라는 게

여러분 눈앞에 있는 이 자리를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을 존재하게 하는 바로 이 자리

이게 이 자리라는 거예요.

 

지금 이 안에서

여러분하고 나하고 대화하고 있잖아.

이 몸과 마음이라는 현상을 가지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앞으로

내어맡김의 공부라고 하는 거는

자기를 몸이나 마음 현상에다 여기다가

자기를 중심을 두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걸 못 깨달아.

 

내어 맡기라는 건 뭐냐 하면

이거에다 내어 맡겨야 되는 거예요.

?

이게 진짜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리고 몸과 마음을 자기로 여기지 말아야 돼.

그래서 오온개공이란 말이 나온 거예요.

 

오온개공은 뭐냐하면

안이비시설신의에 따라 다니면 너는

마음을 너라고 여기는 거다.

중생은 몸을 자기라고 여긴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둘 다 아니다.

그래야 이 자리를 본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오온개공

오온개공 하려면 뭐 해야 돼요?

정견해야 되잖아.

일체를 정견해야 돼.

 

정견하다 보면 어떻게 깨어날 수가 있는가?

왜냐하면 안이비설신의

우리가 이 본다는 것이

여러분 잘 생각해 봐요.

본다는 것이 의가 같이 작동하지 않으면

봐도 본 게 아니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라는 건 생각이라고 그랬죠.

우리가 뭘 봤는데

여러분 어제 하루 종일 여러분의 눈은

분명히 낮 동안에 한참 뜨고 있고, 무지하게 많은 걸 봤지만

지금 기억에 남는 게 뭐가 있어요?

별로 없죠.

아마 자기 아는 사람들 누구 만났고

뭐 어느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고

이런 것밖에 없을 거야. 그죠?

 

나머지도 분명히 은 봤는데

가 안 따라갔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기억이 없는 거야.

진리는 이와 같이 기억의 대상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과거가

수많은 세월을 산 것 같은데

왜 지금 기억이 안 날까?

이유는 간단해.

진리는 기억 하지 않는다. 기억의 대상도 아니고.

그러니까 기억이 안 나지.

근데 그냥 존재한 건 사실이야. 안 그래? 그렇죠?

 

스스로 기억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

?

기억하는 걸 만드는 자지

기억의 대상화가 되지 않는단 말이야.

기억을 경험하는 자지

기억의 대상이 안 돼요.

 

마치 거울이 거울을 못 비추고

눈이 눈 자신을 못 보고

왼손이 왼손을 못 붙잡는 거하고 똑같아.

이 왼손이 왼손을 잡을 수가 있나?

스스로 못 붙잡잖아.

오른손이 잡을 순 있어도.

그거와 똑같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이 없이 안 스스로 있을 때는

이것은 그냥 이거의 속성이 돼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또 들리는 것도

생각이 붙지 않으면 그냥 이거가 돼요.

이거에 살아있음, 현상이 되는 거야.

 

*!

여러분이 이거를 들으면서

우리 마음학교의 대표적인 게 징소리 명상이에요.

징소리를 치면서 여러분이

 

예를 들면

*!

이렇게 징을 쳤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거 들으면서

아 징을 쳤구나.”

여러분은 벌써 징을 쳤구나는 생각이 떨어져 버린 거야.

다시 말하면 전체를 못 보고, 칠판을 못 보고

별만 보고 있는 거야.

 

징소리의 자기

하고 가 동시에 일어나서

둘이 붙어서 짝짝꿍을 한 거예요.

이걸 분별이라고 그래요.

 

근데 만약에 현상은 일어났는데

, 생각이 안 따라 붙으면

그냥 이거는 자체의 살아있는 기능이 드러난 게 된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서 생명성에 원래 가지고 있는 영원한 능력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이 몸에 달린 눈, , , 입 이런 게

스스로 보고 듣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게 스스로 보고 듣는다 그러면

송장도 봐야 될 거 아니야.

방금 저 죽은 송장도 보고 듣고 느껴야 될 거 아니야.

 

근데 그것들은 보고 듣고 못해.

?

그것들은 도구에 불과하지

실제로 보는 놈은 이놈이란 말이여.

 

여러분이 죽으면 영가가이런 말 하잖아요.

쉽게 말해서 영가가 보고 듣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귀신이 보고 듣는 거다, 이 말이지.

 

한마디로 귀신하고 부처하고 차이는 딱 하나뿐이에요.

귀신은 몸과 마음의 존재의 중심에 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귀신이야

부처는 뭐냐?

여기 존재의 중심에 가 있기 때문에 부처인 거예요.

그 차이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수심결에도 나와 있어.

중생은 자기를 특정한 무엇이라고 여긴다.

부처는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그 알 수 없는 초월자로서의 이것이라고 여긴다.

그 차이뿐이라니까.

 

그러니까 안이비설신의라는

지금 여러분의 세계가

여러분 눈앞에 있는 세계

저랑 대화하고 이거를 듣고 이해하고 있는 이 모든 게

안이비설신의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안이비설신의가 만드는

정보세계 속에 사는 거야.

이게 3차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내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핵심이 뭐냐 하면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우리가 무얼 안다라고 하는 것

기억한다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안이비설신의 끝에 가 따라따녀요.

 

라는 게 뭐냐?

생각이에요.

생각이 따라다니면서

본 것을 봤다라고 함으로써

본 것으로 기억이 되는 거예요.

 

생각이 없는

치매 환자나 갓난 애기나 정신병자는

봐도 본 줄 몰라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런데 부처는

의가 작동을 하든 안 하든

그 의가 작동하기 이전에 안이비실신, 5가지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그 본래의 이 자리에 딱 중심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이 작동하든 안 하든 아무 차이가 없어.

생각일 뿐이니까.

이게 다른 점일 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예를 들어

보아도 생각이 따라붙지 않으면

기억할 수가 없어요.

소리를 들어도 생각에 따라붙지 않으면 들은 바가 없어.

들어도 들은 게 아니야.

 

이제 불교에 나오는 그 말들이 다 이해가 되죠?

봐도 본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게 그 소리에요.

생각이 안 따라붙는다는 거예요.

설사 생각이 따라붙어도

생각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깨어나지 못한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냐 하면

뭐든지 요 가 따라다니면서

내가 알아야 돼 내가 알아야 돼.

그래서 이게 뭐 어떻다는 거야?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되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소화해야 되는 거야?”

 

이 짓을 계속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떤 패러다임 속에 있냐면

아느냐 모르느냐의 패러다임 속에 빠져 있어요.

알아야 돼. 모르면 안 돼.

 

그런데 깨어난 사람은

생각이 고 장난을 하는 놈이라는 걸 항상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놈이 뚝 떨어져 버린 거하고 똑같은 거야.

그러니까 안이비설신의가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동시에 생생하게 살아나요.

생각에 의해서 죽지 않아.

생생하게 살아가면서

동시에 생각이 따라붙든, 안 따라붙던

모든 생각에서 자유스러운 거야.

 

이렇게 되면

봐도 본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고, 해도 한 바가 없어요.

생각이 뚝 떨어졌으니까.

생각이 떨어지면 라는 것도 떨어지지

?

나라는 것도 생각이거든

아시겠어요?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이 자리에 계합을 하게 돼요.

이걸 내어 맡긴다고 하는 거예요.

내어 맡긴다라는 게

생각이 자꾸 내가 하겠다고 하는 그 짓을 중시하는 거예요.

내가 알겠다. 내가 알아야 된다.’

 

그러니까 이 세간에서는

생각이 뭘 알아야 돼.

생각이 알지 못하고서는

밥벌이도 안 되고, 버스 타고 갈 수도 없고, 커피를 사 먹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안 돼.

 

그런데 이 진리 공부에 있어서는

생각이 앞장서서 설치면 아무것도 안 돼.

?

선험적인 세상을 깨닫겠다는 건데

경험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생각이

선험적인 것까지 알겠다고 하는 거야.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시겠어요?

 

그래서 불교에 이런 말이 있는 거예요.

상수멸진의 자리

상수멸진의 자리, 필경공,

이런 말들이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상수멸진 이게 뭐냐 하면

_ 생각

_ 느낌, 감각이에요.

 

생각과 느낌이 멸진했다.

그러면 그 나무토막 아니야? 송장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생각과 느낌이 멸진했다는 게 무슨 소리냐면

생각과 느낌이

의만 떨어지면

생각 생각으로

요요 쫓아다니고 이 짓하는 놈만 떨어지면

있어도 있은 바가 아니고, 해도 한 바가 아니니까

멸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갓난아기 상태처럼 되는 거야.

뭘 해도 항상 순수한 생명 그 자체로 있는 거야.

그래서 무사인이라고 하는 거야.

아무 일도 한 바가 없어.

 

하루 종일 일은 다 했는데

아무 일도 한 바가 없어.

?

생각이 떨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은 앞으로 진짜 깨닫고 싶으면

생각이 제발

제 얘기를 알아들으려고 하는 그 짓을 그만두셔야 돼.

 

저 놈은 앞에서 뭐라고 자꾸 떠드는데

그 소리가 그 소리 같고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칠판이고

얘기하는데 그 소리가 그 소리 같다.

이 정도가 돼야

이제 깨달을 때가 온 거예요.

내 얘기가 재미있어? 뭔가 심오한 것 같아?

그러면 여러분 아직 먼 거야. 아직 멀었어.

?

생각이 지금 그 짓을 하고 있거든.

아 심오해, 정말 기막힌 얘기를 하고 있어.”

아이고 멀었어요. 그렇게 되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도대체 저 강의를 들었는데 들은 바가 없는 것 같아.

알쏭달쏭, 도대체 알 수가 없어.

그런데 알고 싶지도 않아.

?

그냥 여기 이렇게 자리 있잖아.

,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요.

 

(모순 아니에요?

그걸 알겠다고 이렇게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아주 귀담아듣고 있는데

그 사실을 뭐 그냥...)

 

내 말이 이해가 안 가요?

이해가시죠?

 

(, 알 것도 같은데 이 모순된 상황 같기도 하고)

 

아 그런 생각을 좀 버리라니까요.

자 이것은 모순된 상황 같다.”

아 이런 꼬리가 제발 좀 끊어지라고.

왜 그런 걸 꼭 이렇게 끌고 다녀야 돼요.

그러니까 중생 딱지를 못 떼는 거야.

 

그래서 선가에서 보면

안다’ ‘모른다

이거는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이런 말이 자꾸 있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의는, 생각은

아는 거 아니면 모르는 거밖에 없어.

얘는 그 이상을 몰라.

 

여러분 생각은 뭘 딱 어떤 걸 접하면

안다 모른다.

둘 중 하나야, 안 그래요?

 

근데 그놈 좀 쉬게 해 봐.

그래야 안다 모른다, 이전에

이 자리가 여러분을, 이마빡을 한 번 치게 되는 거예요.

그때 확연히 깨어나는 거예요.

 

절대 생각 끌고 다녀서는

이건 꿈에도 알 수가 없어요.

아주 쉬운 건데,

생각 끌고 다녀서는 영원히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