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62] 정견과 생각의 차이 / 피올라 현대선 10강 "내어맡김의 공부" 5회

Buddhastudy 2024. 12. 31. 18:54

 

 

그럼 만약 생각이 떨어졌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라는 게 다 떨어져요.

없어진다고

그럴 거 아니에요?

 

생각이 떨어지면

나머지 안이비설신

5개를 전오식이라고 그래요.

자의 앞에 있는 5가지 식이라고 그래서 전오식이라고 그래.

 

부처는 전오식으로 존재한다

이런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안이비설신은 생생해.

근데 그다음에 생각은

작동하나 마나 아이돈 케어야.

설사 작동해도 쓰고 그냥 버려, 매 순간 버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

생각을 쓰고 버렸는데

그런데 여러분은 생각에 의지해 살잖아요.

그래서 못 깨닫는 거야.

 

?

생각은 잘 봐요,

생각은 단어가 필요해요.

생각이 작동하려면 꼭 단어가 있어야 돼.

안 그래요?

명사, 형용사, 동사 이런 게 필요하다고

단어 없이 생각할 수는 없어요.

 

근데 모든 단어는 한마디로 죽은 관념이야.

살아있는 생생한 팩트가 아니라고.

그건 손가락질이야.

뭘 가르키는 손가락질이라고요.

진짜가 아니야 그거는, 수단이야.

그 죽은 걸 가지고 산 거를 알겠다고 드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전오식으로만, 안이비실선으로만 있어보기하면

이게 내어 맡기는 공부예요.

 

?

본래 이 자리는 전오식으로

갓난애기 때도 전오식으로 이미 있었잖아.

그냥 그 상태로 내어 맡기는 거야.

 

자 그러면 여기서

그러면서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려야 되는데

이게 딱 한 가지가 필요해.

그게 뭐냐?

정견이 필요해.

 

즉 멍때리고 있으면 안 되고

전오식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서

딱 하나의 초점

그게 뭐냐면

이게 뭐냐?”에 초점을 맞춰야 돼.

도대체 이게 뭐냐?”

내 앞에 일어나는 이 모든 이게 뭐냐?

 

그럼 그거 생각 아닙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의 원초 궁극으로 들어가고 들어가면

이게 생각이 아닌 하나의 집념이 돼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이 만약에 지금 급하게 차를 타고 나가야 되는데

자동차 키가 어디 있는지 몰라.

그때 처음에는 생각이 작동해요.

이 키가 어디 갔지?” 하고 막 찾아.

근데 나중에는 이 키가 어디 갔지? 이 키가 어디 갔지?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어떤 퀘스천 마크 하나만 있어.

이게 집념이야. 그게 집중이라고.

 

화두 참선이 별개 아니야.

이걸 [의단]이라고 해서

이게 형성돼야

여러분의 생각이 무너지면서

안이비설신의가 확 살아난다 이 말이에요.

원리가 별거 아니여.

알고 보면

 

그러니까 정견이

전오식으로 있으면서, 갓나내기처럼 있으면서

단지 갓난아기하고 다른 점은 이거 딱 하나예요.

이게 뭐지?”

이거 하나만이야.

시심마

이게 뭐지?

 

더 줄이면

?

이 퀘스천 마크 하나만 있는 거야.

그게 정견이에요.

정견하는 법이 별거 아니야.

 

근데 여러분 잘 생각해 봐.

여러분은 이미

이렇게 자기가 생각으로 뭘 본다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도 보고 있어.

안 그래요?

근데 생각이 정리하기 전에는

뭘 봤는지 모르는 것뿐이야.

그렇죠?

 

그거 잘 보고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

그게 부처예요, 이미.

그러니까 이미 부처인데

자기 생각에 가려서 모르는 거야.

 

...

 

*!

 

재밌어요?

어 나는 젊은 사람들이 이런 거 재밌다고 그러면

너무 존경스러워, 훌륭해.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야.

 

...

 

화두 참선이라는 형식은 필요 없어요.

지금 내가 화두참선의 요체만 가르쳐줬잖아.

정견 속에 화두참선이 그냥 있어요.

뭐 따로 할 거 없어.

 

(좌선...)

 

그런 건 할 필요 없어요.

그런 거 할 필요 없어요.

시간 낭비예요.

 

지금 정교하면 저절로 화두참선인데?

핵심을 알면 됐지

뭘 그런 형식을 따라가요.

 

(습관이 돼서 앉아서 이 뭐꼬?...)

 

그거 다 망상 분별이야.

그냥 핵심만 알면 돼.

그냥 이 순간에 이 뭐꼬?’가 바로 나타나는데

뭘 또 따로 이 뭐꼬?’.

 

그건 벌써 가 따라다니고 있잖아요.

가 떨어져야지.

 

...

 

아니 무념무상도 아니라니까

무념무상이라는 거 자체가 라고요, ‘생각이라고.

무념무상도 떨어져야 진짜 무념무상이야.

성성적적도 떨어져야 진짜 성성적적이야.

 

(그럼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항상?)

 

어떻게나온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이

자기가 하겠다고, 공부하겠다고 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그걸 내가 떨어뜨리라고 그러잖아.

근데 왜 자꾸 그걸 끌고 다녀요?

 

그러니까 이 안에 지금 에고가 딱 지가 알겠다고

지가 설치고 있는 거야.

제발 좀 쉬어요. 쉬어.

내려놓으라는 말이 그 말이야.

생각 좀 내려놓으라고.

 

벙어리 3, 귀머러기 3, 장님 3...

시집살이...

그것처럼 좀 제발 좀 멍충이 돼 봐요.

멍충이 돼야 깨달아지는 거예요.

그 순간을 거쳐서 딱 깨닫는 거야.

근데 왜 자꾸 너무 똑똑하게 사시려고 그래

 

...

 

또 그래도

 

 

(내 꿈에 의식도 없이 푹 자듯이

그 생시에도 내 의식이 그 꿈에서 자듯이

그 의식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꿈속에서 그 의식이

생명 현상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랬는데

사회 현실에서도 그 의식이...)

 

누가 들어가요? 들어가기는

그것도 다 분별이지

이미 그건데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누가 들어가?

누가 어떤 대상을 만들어서 어디로 들어가?

들어가는 놈이 없는데

그냥 그것뿐인데.

 

(그러고 살아요.

다닐 때는 오직 그게 하나가 나를 움직인다, 그러고 사는데...)

 

그렇지, 그게 내어 맡기는 거예요.

아니 그런데

오직 하나, 그거 하나

이런 생각도

꼬리를 떼버리라는 거지.

그걸 왜 자꾸 꼬리를 끌고 다녀.

 

(그냥 무심한 상태로 다니라고?)

 

무심 무심도 잊어버리세요.

그게 진짜 무심이에요.

내가 지금 무심...”

그거는 유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