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스트레스와 연기법

Buddhastudy 2024. 6. 17. 20:11

 

 

스트레스는

위협을 인식할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반응이지만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심리적 스트레스의 핵심적인 요인은

인식이다.

이와 관련하여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불교에서

인식과 관련된 궁극적인 설명이 바로 연기법이다.

 

모든 현상이

조건생 조건멸의 법칙을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

헛된 집착과 과도한 걱정을 떨치고

삶을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인식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스트레스와 연기법에 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생활은 스트레스와 함께하는 생활이죠.

스트레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황이 나를 위협한다고 내가 인식하면

그 인식에 따라서 우리가 우리 몸을 살리기 위해서

Fight or Flight 반응을 해야 되는데

즉각적으로

그 반응을 준비시켜 주는 과정에서

혈압도 올라가고 혈당도 올라가고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전쟁 상태를 심리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인데

이게 심리적 스트레스가 있고 생리적 스트레스가 있겠죠.

추위와 굶주림 같은 것은 생리적인 스트레스지만은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현대인들에게는 더 본질적이고 어려운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심리적 스트레스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매우 인간적인 욕망이라고 하는 것의 문제와 관련이 있겠죠.

 

그래서 욕망이라고 하는 것을 뜯어보면

하나는 미래에 가지고 싶거나

하나는 미래에 그것을 잃고 싶지 않거나

그러니까 소유와 상실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욕망이 어떤 형태로든지 좌절이 되면

스트레스가 되고, 분노와 슬픔이 되고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불교의 어떤 지혜로서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이고득락이잖아요.

불교는 해탈이라든지, 죽어서 천당에 갔다든지, 그게 아니고

정확하게는 괴로움이 벗어나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심리적인 스트레스의 극복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

이 스트레스를 괴로움을 보는 불교적 관점은 뭔가?

그게 진단이고 처방이 될 수 있잖아요.

그게 고집멸도인 것이죠.

 

우리가 괴로운 것은 [] 때문이다.

여기서 집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이라기보다는

욕망, 갈애 이렇게 표현하지만

사실은 모을 집자거든요.

굳어진 습관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야 고가 없어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없애는, 얼음을 녹이는, 봄을 가져오는 행동들이

8가지 바른 행동, 바른 길 이렇게 제시를 하죠.

그게 팔정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핵심은

집이 있고, 그 집의 멸이 있고

그것이 스트레스를 잡는 핵심적인 방법론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집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집착한다 뜻이 아니고, ‘쥐고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모을 집자거든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걸 갈애라고 욕망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정확하게 형상을 보면

지층처럼 켜켜이 흙이 쌓여서

굳고 굳어서 암석처럼 된 어떤 굳어진 습관, 가치관, 방향성, 기질

이런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습관이 된, 습관으로 굳어진 인식 체계

이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이 왜곡의 근원이고

그 왜곡에 따라서 현실을 제대로 못 보고 반응하기 때문에

항상 현실과는 배치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것이 두카

이 두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내 생각과 같지 않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괴로움이 찾아들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불교가 보는 괴로움에 대한 스트레스에 대한 관점이죠.

 

어떻게 보면

습관이 인식을 낳고, 인식이 또 습관을 낳고

2개가 서로를 강화하는 풍차 돌리기 과정

그것이 인간이 괴로움으로 빠져드는

근본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에서 보면은

스트레스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블랙박스는

내가 아주 훌륭한 것을 갖고 있어야 되는데

그 블랙박스의 두 가지 중요한 키워드인 [습관][인식]

이것을 해결해야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습관과 인식을 어떻게 보면

깨부수고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지혜가 뭐냐?

그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에 대한 이해와 체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연기법은

그 자체로 지적인 이론이면서 또 체험을 위한 실천기준이다

이렇게 실천 기준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연기법을 적용하면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생활에서는 어떤 것을 초월하려면, 넘어서려면

염증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죠.

대단히 실질적인 얘기인데

지긋지긋하다

염증이 난다.

진절머리가 난다

쳐다보기도 싫다

이런 정도로 그것을 접해봐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은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에서 떠나게 되고

욕망하지 않으면 자유로워지잖아요.

그것이 해탈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현대어로 번역하면 개고생을 해봐야 된다.

구르고 닳토록 괴로워 봐야 된다.

그리고 가루가 되도록 까여봐야 된다.

그러면 그게 진절머리가 나고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됐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다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해변의 몽돌이 동글동글하고 예뻐진 것은

무수하게 서로 부딪침으로 해서 깎여서

둥글고 원만하게 된 거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게 현실적인 것이죠.

이렇게 해서라도 원만해지면 좋은데

끝까지 뾰족한 채로 더 뾰족하게 되는 것도 있기 때문에

하여튼 보장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죠.

불교에서는 연기법을 좀 알아놔라, 좀 이해해라

이렇게 권하고 있죠.

연기법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두 가지만 딱 얘기하자면

하나는 상대성 대칭성 그것보다 좀 더 넓은 개념인데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것이죠.’

 

기대가 있으면 실망도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이렇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기준이 있으면

반드시 그 기준에 미달하거나 초과하거나 그 갭이 생기니까

그 갭, 그것만큼이

우리의 기쁨과 슬픔

즉 스트레스의 크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피 끓는 젊은 사람으로서 볼 때는

그러면 무슨 좀비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 숨만 쉬라는 얘기인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것은 아니고

우리 심리적인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좀 솔직하게 보면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그 결핍만큼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고

그래서 좀 더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이런 나쁜 일들의 연속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 게

우리 마음속이거든요.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연기법은 인연생기잖아요.

[원인이 있어서 생겨나고

잠복하고 있다가 연이 닿으면 일어난다]

이런 뜻이지 않습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연기법은 인과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훨씬 복잡하고, 유연하고, 다채로운 형태로

인과법은 관철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놀라지 말고 침착하라고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미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은

인과 연이 충분히 무르익어서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니까

네가 몰라서 그렇지

충분히 그 원인이 축적되어서 무르익은 것이다.

그것을 결론만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어도 놀랍거나 당황하지는 않는다.

[올 게 왔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 놀라움과 당황에 쓰일 에너지를

좀 더 침착한 대응에 쓸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옛날부터

연기법으로 지혜를 얻고, 연기법을 깨닫고

그다음에 행동으로 그것을 체득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행동으로 체득한다는 얘기는

딱 한마디로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알든 모르든

그 원인과 인연이 성숙되어서 나에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달게 수용하고

다만 수용한 다음에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의 조건을 살펴라.

 

왜냐하면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이 변화되거나 해체되면

그 현상도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생 조건멸의 그 조건을 보라, 살펴라.

그래서 조건의 변화를 이해하고

내가 바꿀 수 있으면

그 조건들을 바꾸면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죠.

 

또는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조건들이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조건들의 변화를 기다려라

그러면 상황도 바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확고하게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프레임을

그렇게 당장 내일 오늘도 내일도 영원할 것 같은 그런 괴로움을 겪지는 않는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연기법을 알고

연기법을 세상에서 적용하면서 산다고 하면

우리는 뭐라 그럴까

내공이 깊어져서

우리 앞에 닥친 상황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연기법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바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바람 때문에 파도가 치고 있지만

그 파도는 바람이 멈추면

이 파도는 조금 있다가 사그라들겠죠.

 

그래서 내 앞에 일어나는 내 삶의 모든 부분들을

연기법으로 이해하면

바람은 이미 멈춘 것이고

그 연기법이 현상에서 실행되는 것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체득이 되면

파도도 멈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그래서 불교에서는 스트레스, 번뇌

이런 것에 적어도 심리적인 스트레스에

근본적인 치유법으로

연기법을 깨닫고, 연기법을 체득하라고 권유하고 있고요.

그리고 연기법의 중요한 논리적인 귀결에 대해서 한 두세 가지

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대자대비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자비로

정말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뭐냐?

 

큰 대자를 쓰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장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추운 사람에게 따뜻하게 해주고

당장 필요한 것을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더 큰 사랑은

그 사람에게 진리를 알게 해 주는 것.

 

사실은 모든 종교의 권유가 그런 내용이죠.

그래서 이걸 알려줘야, 알아야 자유가 온다, 그 사람에게.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논리적 귀결이 연기법

연기법은 뭡니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모든 것은 조건이 결합해서 생기고

조건이 해체되면 그 상황은 사라진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첫 번째 논리적 귀결이

바로 [무상]이고 [무아]다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조건이 만나서 생겨나고, 조건이 흩어져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영원할 수가 없다.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하는 것이 무상이고

 

또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체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부품들이

모였다가 사라졌다 해체됐다가 하는 거니까

이 실체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 무아이죠.

 

조건들의 결합으로 생각하면

무상하고 무아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슬픔의 강을 건너갈 수 있다.

그것이 무상하고 무아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고해, 괴로움이라고 하는 바다를 건너가는 배다, 뗏목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또 하나는

[불이법]에 관한 얘기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우리는 왜 괴로운가 하면

내가 있고, 세상이 있고

또 내가 좋은 게 있고, 싫은 게 있고

이렇게 구분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은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미운 것을 좋아한다거나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는 것은 좀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우리가 기본적인 갈등의 구조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좋은 것은 당기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고

이게 어떻게 보면은 괴로움의 구조이죠.

 

그래서 이 이분법

연기법을 잘 이해하면

이 이분법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죠.

 

왜냐하면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그 속에 진정한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은 이 조건부고 임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걸 특정할 수가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구분해서

영원히 대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건 논리적으로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을 깊이깊이 실감할수록

나와 세상이 쩍 갈라지고

내 눈에 좋은 것과 싫은 것이 구분되는 그런 거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

이게 불이법에 관한 것이죠.

 

그리고 이 이분법이야말로, 플라톤적인 이분법이야말로

세계를 정말 잘못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이 내적인 번뇌와 외적인 갈등 투쟁의 원인이 된다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봐라, 다 조건부고

조건 결합, 조건 해체

여기에 따라서 이 현상은

무슨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동영상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거 아니냐?

과거의 것은 기억에만 남아 있고

미래의 것도 마찬가지로 상상에만 있으니까

이 둘은 내가 붙잡을 수가 없다.

 

또 현재는 개념일 뿐

내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또 과거로 흘러가 버리니까

사실은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 시계는 돌아가지만

내 마음속에 시간이라고 하는 심리적 시간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은 뭐냐?

꿈이다, 세상은 환상이다.

이 말은 현상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본질이 없다는 의미에서

세상은 꿈이다.

 

현상마저 꿈이다라고 생각하면

그거는 정신병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집착할 만한 본질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연기법의 논리적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너무나 생생하지만 꿈이다.

생생한 꿈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처음에는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내가 연극에서 아주 실감나게 연기를 하고 있더라

이런 정도를 아는 것이죠.

 

근데 그걸 알았다고 해서

연기를 그만두지는 않지 않습니까?

극본에 따라서 충실히 더 맛깔나게 연기할 수도 있죠.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연기법을 터득하는 것은

당장에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도 되고

그리고 무상고 무아라든지, 불이라든지

그다음에 세계의 환상 같음, 실체 아님

이런 것들이 실감하면 실감 날 수록

우리가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불필요해진다.

초월할 수 있다, 넘어갈 수 있다, 없어질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불교에서 말하는 스트레스 해소법의 최고봉

연기법에 대해서

여러분들하고 얘기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