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룩셈부르크’로 알려진 국가의 정식 명칭은
룩셈부르크 대공국(Grand Duchy of Luxembourg)’입니다.
유럽 북서부에 있으며 수도는 룩셈부르크(Luxembourg)입니다.
룩셈부르크의 국기는
빨강, 하양, 하늘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색상은 룩셈부르크의 국가원수인 대공작 가문인 대공가를 상징합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문장은
하얀색과 하늘색 두 가지 색으로 구성된 가로 줄무늬 바탕에
빨간색 사자가 그려져 있는데 국기에서도 이 색상을 반영합니다.
유럽 북서부에 위치한 룩셈부르크는
동쪽으로는 독일, 북쪽으로는 벨기에, 남쪽으로 프랑스에 접해있는 내륙국입니다.
국토면적은 약 2600㎢로 세계 174위이며
이는 1300㎢인 경주시의 약 2배에 해당하는 수준입니다.
룩셈부르크는 2019년 기준으로 약 6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인구수로 세계 168위이며
이는 전라북도 전주시와 비슷한 수치입니다.
룩셈부르크의 1년 총 GDP는
2017년 기준 약 624억 달러. 이는 세계 70위이지만
1인당 GDP로는 2018년 기준으로 약 115,000달러로 세계 1위 국가입니다.
인종 구성은 룩셈부르크인이 53%, 포르투갈인 17%,
그 외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 벨기에인 등이 소수 있습니다.
언어는 룩셈부르크어와 독일어·프랑스어가 사용되며,
종교는 가톨릭교가 90%로 다수를 차지하며 그 외 개신교, 무슬림 등이 있습니다.
2. 역사
로마시대부터 게르만부족 중 하나였던 트레베리족이
오늘날 룩셈부르크 지역에 거주해왔지만
5세기 초부터 프랑크왕국의 일부로 편입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중프랑크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후에 최종적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독일 왕국에 병합됩니다.
963년 아르덴 백작 지크프리트 1세가
루실리부르후스 언덕위의 고성을 거점으로 삼고
일대의 영토를 얻어내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1060년경 지크프리트의 증손인 콘라트가
처음으로 룩셈부르크 백작이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결혼 동맹을 통해 14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을 획득한 룩셈부르크 가문은
본거지를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옮겨가 버렸고
룩셈부르크 지역은 1437년부터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후로도 룩셈부르크는 합스부르크가와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역사적인 부침을 겪는데요.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혁명전쟁이 시작되던 시기인 1794년
프랑스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열린 빈회의에서
오스트리아가 북이탈리아를 얻는 대가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포기하였고
룩셈부르크는 대공국으로 승격했습니다.
이때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 1세가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하게 됩니다.
1829년 런던회의에 의해 서쪽 영토 절반을 벨기에에 할양한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프로이센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아오다가
드디어 1867년 런던조약으로 프로이센군이 철수하고
대공국으로서의 독립과 중립보장을 받게 됩니다.
1890년 대공을 겸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 3세가 죽자
룩셈부르크에서는 나사우-바일부르크가의 아돌프가 대공에 즉위하고
네덜란드의 지배에서도 벗어나 분리되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점령당하여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작은 국가라는 불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네덜란드, 벨기에와 베네룩스를 결성하기도 하였고
1949년부터는 영세 중립국을 포기하고 NATO와 유럽공동체 EU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3. 정치 & 경제
룩셈부르크의 정치는 입헌군주국으로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국가원수이자 국가통합을 상징하는 대표자는
흔히 대공이라 부르는 대공작(Grand Duke)입니다.
대공작은 황제와 왕보다는 낮지만
귀족 중에서는 최고 권위를 지닌 귀족으로
왕이 아닌 대공작이 입헌군주의 역할을 맡은 국가는 룩셈부르크가 유일합니다.
대공은 세습에 의해 승계되며 헌법에 의해 부여된 입법, 행정, 사법에 관한
주로 상징적인 권한을 행사합니다.
정통의 후계자가 없을 경우에는 국회가 선출하며
2019년 현재 국가원수는 2000년 10월 이래 앙리(Henry) 대공작입니다.
룩셈부르크의 의회는 단원제로
임기 5년의 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의회에 대한 자문기구 역할을 하는 국사원(Council of State)이 있으며
대공에 의해 임명된 21명의 자문관으로 구성됩니다.
총리는 2013년부터 총리직을 맡고 있는 사비에르 베텔(Xavier Bettel)로
2015년 동성 연인과 결혼한 동성애자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룩셈부르크는 인구 60만 명의 작은 국가지만
2017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이 107,700달러로 세계 1위 국가입니다.
이는 산유국인 카타르나 미국과 비교해도 월등히 높은 수준입니다.
룩셈부르크는 전통적으로 근처 나라와 유대를 굳건히 하며 경제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19세기에는 독일과 관세동맹을 맺고
서유럽 최대철강회사인 아르셀로미탈을 탄생시켰고,
1944년에는 벨기에, 네덜란드와 함께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맺었습니다.
또한 1958년에는 EEC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는 등
오늘날까지도 유럽진출의 관문으로
인접국가와의 경제적 연계성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1970년대 철강산업이 쇠락기에 접어들자
룩셈부르크는 재빨리 금융업을 발전시켰습니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금융산업을 지원하면서
금융거래 관련 세금을 면제해주고
기업의 법인세를 낮춰 다국적 기업을 유치했습니다.
이 덕분에 유럽 전체 펀드시장의 약 30%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베이와 스카이프, 아마존과 같은 다수의 글로벌 기업의 유럽본사를 유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룩셈부르크는 1980년대부터 우주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 TV인공위성 산업을 시작해
글로벌 인공위성기업인 SES를 탄생시켰고
현재 룩셈부르크 GDP의 약 2%는 우주산업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4. 자연환경 & 문화
룩셈부르크는 국토 대부분이
북부 프랑스에서 벨기에 남부를 지나 독일에 이르는 아르덴 고원 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르덴 고원은 평균 해발고도가 400~500m에 이르는 높은 험준한 산지지형입니다.
기후는 해양성기후와 내륙성기후의 중간인 온대기후로
연평균기온이 8~9도 내외로 낮은 편이며 강우량도 많지 않습니다.
고지대인 북부지방은 아침과 오후,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한 편이며
남부지방은 온난한 지역으로 포도가 많이 생산됩니다.
‘작은 성’이라는 뜻의 룩셈부르크는 작은 나라이지만
다양한 카니발과 꽃 축제, 와인축제 등 계절마다 곳곳에서 열리는 축제와 행사가 많아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열리는 룩셈부르크 최대규모의 축제인
쇼버포어(Schueberfouer) 축제가 가장 유명한데요.
1340년대부터 시작되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쇼버포어 축제는
매년 2만 명 이상의 관람객들이 방문하는 대규모 이동식 축제입니다.
크고 작은 레스토랑 뿐 아니라 길거리 가판대와 간이식당에서
다양한 전통음식과 룩셈부르크의 맛있는 맥주도 함께 맛볼 수 있고
재미있는 놀이기구도 즐길 수 있습니다.
쇼버포어의 오픈 시간은 오후 2시부터 새벽 1시까지로,
룩셈부르크의 아름다운 야경을 즐기기에도 적당하다고 합니다.
룩셈부르크는 외국인 인구가 2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6% 정도를 차지합니다.
룩셈부르크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국적만 해도 170개국이 넘을 정도이며
대부분은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벨기에와 같이 인접국 출신이 많습니다.
이는 룩셈부르크에서 사용하는 언어와도 관련이 깊은데요.
룩셈부르크인들은 자국 내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룩셈부르크어 말고도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와 포르투갈어 등 함께 사용합니다.
룩셈부르크어는 1984년에 공용어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공용어였습니다.
이 때문에 중,고등 교육에도 프랑스어가 주로 사용되며,
신문과 방송에서도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혼용되고 있습니다.
5. 인물
룩셈부르크에서 잘 알려진 인물로는
국민 사이클 스타 ‘슐렉 형제(Schleck brothers)’가 있습니다.
동생인 앤디 슐렉과 5살 위인 형 프랭크 슐렉은
룩셈부르크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사이클링 선수입니다.
슐렉 형제는 룩셈부르크의 수도 룩셈부르크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조니 슐렉 역시 젊은 시절 사이클 세계랭킹 20위까지 올랐던 선수였습니다.
3형제 중 첫째인 스티브 슐렉은 자라서 정치인이 되었지만,
둘째인 프랭크 슐렉과 막내인 앤디 슐렉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이클링 선수가 되었습니다.
형인 프랭크 슐렉은 1980년대 태생으로
룩셈부르크 군사 스포츠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이탈리아 사이클 프로팀 활동을 하게 되며
이후 20대에 접어들어 ‘룩셈부르크 국립로드 레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더 큰 무대인 프랑스로 이동하여 국제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했고
당시, 각종 아마추어 대회의 우승을 휩쓸던 1985년 태생인 동생 앤디 슐렉 역시
형의 뒤를 따라 프로무대로 입성했습니다.
매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는
사이클 대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기로
3주 동안 프랑스 전역과 인접 국가 4,000km를 일주하는 코스로
‘지옥의 레이스’라고도 불립니다.
형제는 나란히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 꾸준히 참가하였으며
2008년 앤디 슐렉이 25세 이하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2010 시즌 앤디 슐렉은 준우승, 프랭크 슐렉은 3위를 차지하며,
‘투르 드 프랑스’에서 나란히 2,3위를 기록한 형제로 유명세를 떨치게 됩니다.
형제의 이야기는 2011년 그들의 경기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오르막길 The Road Uphill'로도 제작되었습니다.
2014년 형제는 선수생활을 접고,
현재는 룩셈부르크에서 자전거 상점과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사 - 역사 > 역사,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5분상식 세계사] 리비아 10분 완벽정리 (0) | 2022.07.07 |
---|---|
[5분상식 세계사] 르완다 10분 완벽정리 (0) | 2022.07.06 |
[5분상식 세계사] 루마니아 10분 완벽정리 (0) | 2022.06.29 |
[5분상식 세계사] 레소토 10분 완벽정리 (0) | 2022.06.23 |
[5분상식 세계사] 레바논 10분 완벽정리 (0) | 2022.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