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통과하기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 시험을 일러 고시라고 하는데
경쟁률이 수백 대 1이거나 심지어 그 이상인 경우도 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시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바로 ‘깨달음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평생 동안 공부해도 통과할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내생, 그리고 또 다음 내생을 기약하기 일쑤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깨달음 시험은 합격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가령 어떤 사람이 이상향인 엘도라도를 찾아 길을 떠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출발하기 전에 어떡하든 엘도라도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위치뿐만 아니라 여정에 발생할 수 있는 샛길이나 험도 그리고 함정 같은 것도 조목조목 따져봐야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기본 정보도 없이
무작정 엘도라도를 향해 길을 나선다고 하면 어떨까요?
동서남북의 방향조차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다 보면
허탕을 칠 확률이 매우 높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들은 그 목적지인 ‘깨달음’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이 뭔지 알아야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깨달음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자기 자신이 믿고 싶은 깨달음이며
그렇기에 평생을 매달려도 이룰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깨달음의 좌표가 어긋나게 된 것이지 한번 살펴볼까요?
불교의 출발점은 고(苦)입니다.
괴로움을 인식해야만 수행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인생을 고해(苦海)로 여기지 않는 분들은 불교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괴로움의 대상이 뭘까요?
이렇게 물으면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생로병사라고 대답을 합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허망함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수행이고 곧 깨달음인가요?
생로병사에서 해방되려면 생사의 분별을 일으키는 상대적 관념을 소멸해 열반에 이르러야 합니다.
더 나아가 열반마저도 뛰어넘어 해탈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생로병사의 근원인 윤회를 끊고 영생하게 됩니다.
열반, 해탈, 영생 같은 것들이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달콤한 열매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맞을까요?
힌두교에서도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고, 그 끝에 열반과 해탈, 그리고 영생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교와 힌두교의 깨달음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요?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는 깨달음은
죄다 상상으로 가공된 것들입니다.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깨달음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이 믿고 싶은 것으로 꾸며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뜻이고
그러니 수행하는 내내
나라는 족쇄가 강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반과 해탈, 영생 같은 것들을 이뤄도
그 이면의 나는 여전히 들러붙어 있습니다.
이런 찌꺼지 아상마저 떨쳐내야 하는데
이것이 도저히 안되니
진아, 참나, 불성 같은 이름을 그럴듯하게 지어내고
범아일여의 논리를 붙이는 것입니다.
일찍이 싯다르타는 이런 병폐를 직시하고
나의 흔적을 남겨 두지 말라, 나의 범위를 정하지 마라는 뜻에서
무아론을 피력하게 됩니다.
싯다르타의 무아는 나가 있다, 없다의 문제를 떠나서
나를 위해 수행을 이용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원점으로 돌아와서 사성제의 첫 단추인 고를 떠올려 봅시다.
앞서 말했듯 고를 생로병사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생로병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은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의 좌표 속에서 하나의 점으로 찍혀있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나 또한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오감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점멸과
그것들이 일으키는 단편적인 상념들뿐입니다.
이런 것들로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 알 길이 없습니다.
나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면
두려움과 허망함과 괴로움이 뒤섞인 탄식이 신음처럼 올라오게 됩니다.
이때의 감정은 생로병사 같은 저차원의 괴로움이 아닙니다.
존재에 대한 의문, 진리에 대한 갈애에서 오는 고차원적 괴로움이며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말한 사성제의 고입니다.
생로병사의 고가 동쪽이라면 진리 갈구의 고는 서쪽입니다.
길이 완전히 다르기에 추구하는 깨달음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서쪽으로 가라고 했는데
왜 그 제자들은 하나같이 힌두교가 가리키는 동쪽으로 가는 걸까요?
자신이 진리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수행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윤회하는 중생의 설움, 허망한 인생살이, 덧없는 부와 명예, 생로병사에서 오는 고통 같은 것이 수행의 동기라면
당신은 상상속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전부 나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한 도구이고
바꿔 말하면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받는 것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결국 아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으니
그 결과가 뻔하지 않을까요?
사실 싯다르타 역시 수행의 출발점은 생로병사에서 오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땠나요?
싯다르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절대와 열반, 해탈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수행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통감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심리적 만족만 있지 진리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진리에 대한 갈애가 솟구쳤고
사성제의 진짜 고가 시작하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스승을 떠나 홀로 수행에 들어갔고
진리의 핵심 키워드인 제1원인을 화두로 삼아 반야를 궁극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사상 최초로 무상정등각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요컨대, 고로움의 대상을 어떤 것으로 놓는지에 따라
수행의 방향은 달라지고 깨달음의 성패도 갈리게 됩니다.
괴로움을 생로병사나 인생무상으로 놓는다면
당신은 힌두교의 수행으로 나아갈 것이고
이에 반해 진리에 대한 갈애를 괴로움으로 여긴다면
싯다르타의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불법의 바탕엔 늘 고의 진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괴로움은 정녕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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