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붓다가 대도(大盜)가 된 진짜 이유?

Buddhastudy 2022. 4. 28. 19:16

 

 

 

행복은 만족 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와 명예를 쌓았어도 만족하지 못하면 당연히 행복하지 않겠지요.

 

예전에 한남동의 한 주택가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글쎄 모 재벌기업 회장의 저택 앞에 삼성그룹 일가의 대저택이 증축되면서

한강 조망을 가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 모 재벌기업 회장은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산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 아니냐!”며 한탄을 했다는 겁니다.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됐는데,

이 일화에서 상대적 비교 심리가 얼마나 불행을 조장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족을 행복에서 떼어 내어 사회 경쟁력에 대입하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쉽게 만족하는 만큼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출세가 만족에 반비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논리는 수행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수행에 있어서의 만족은 어느 무엇보다 커다란 방해 요소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만족은 수행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을 넘어

시동 자체를 꺼버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첫 번째, 출발하자마자 바로 수행의 시동을 끄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부처님이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 마음이 한결 가볍게 됩니다.

생로병사를 비롯해 세상만사를 의 뜻에 달렸다고 믿게 되면 마음이 무척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두 번째, 동네 한 바퀴 정도 돌다가 수행의 시동을 끄는 경우입니다.

몰라같은 화두 몇 개나 선문답을 주고받다 겪는 멍 때리는 현상

무척이나 만족해하는 경우입니다.

평소에 깨닫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의식에 가해진 약간의 충격이나 카타르시스를 과대 해석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세 번째, 삼매에 들다 보면 종종 무념무상(無念無想)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 를 비롯해 삼라만상 모든 것이 사라진 의 상태를 깨달음이라며 자족하곤 합니다.

자신의 無知로 포장하고 돌멩이 같은 의식을 해탈로 치장함으로써

붓다의 가면을 쓰게 된 경우라 하겠습니다.

 

네 번째, 선정에 자주 들다 보니 번뇌망상이 사라져 열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니 탐진치가 대폭 줄어들어 일상에도 청정한 마음을 어느 정도 유지하게 됩니다.

선정이 평상심으로 이어져 늘 깨어 있으니 만족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정리하면

신앙(귀의), 몰라(참나), 삼매(해탈), 선정(열반)에 만족하면서 수행이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상의 네 가지 심리상태는 수행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행이란 자신의 의식 수준을 높이고자 함이지

어떤 평화로운 기분 따위를 즐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들이 자꾸만 체험의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아상의 탐욕에 있습니다.

그래서 단계를 밟지 않고 한 번에 목적지에 이르려고 무척이나 조급해합니다.

 

여기서 단계란 생물학적 의식의 진화 과정을 말합니다.

이는 고급 정보를 습득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일정 수준의 의식 구조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가령 어떤 돌연변이 원숭이가 일체의 탐욕을 버리고 선정에 잠겨 있다고 칩시다.

이 원숭이는 해탈과 열반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원숭이에게 깨달음이 열릴까요?

 

비유가 어려우면 오뉴월의 개 팔자를 떠올려도 됩니다.

처마 밑에 웅크려 따뜻한 햇볕을 쬐며 평화로움에 잠겨 있는 개의 표정은 가히 해탈경입니다.

 

하지만 개는 어떤 기가 막힌 체험을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적 영역에서의 자각(自覺)이 발생하지 않으니까요.

 

아이큐가 좀 더 높은 원숭이나 침팬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얘기는 생물학적 지적 수준이 안되면

제아무리 수행에 매진해도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윤회를 반복하며 후생을 기약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고요.

 

물론 수행자들은 예외 없이 직관에 의한 도약을 꿈꿉니다.

양자도약처럼 시공을 건너뛰면 현재의 지적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평한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깨달음은 준비되지 않으면 결코 나눠지지 않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중에서도

의심하며 추론하는 인간이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의심을 1원인까지 파고들면서

깨달음을 훔치려는 대도(大盜)여야 합니다.

 

여기까지 생물학적 진화가 된 인간만이 싯다르타가 간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행자는

기본적인 철할 지식과 논리적인 사고 능력에 더해

만족할 줄 모르는 의심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수행은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행자들의 대부분이 이런 기본 소양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평생을 수행해도 진전이 없고

그러다 애가 타서 참나나 무념무상의 체험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결국 만족의 크기가 수행을 좌우하는 꼴이 됩니다.

싯다르타가 브라만교의 수행과 깨달음에 만족했다면

어떻게 위대한 불교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듯 당신이 온전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싯다르타와 동등해지기 전에 결코 만족해선 안 됩니다.

 

이것이 세간에 횡행하는

절대, 해탈, 열반, 본성, 불성, 참나 같은 체험의 함정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며

진리적 자각에 강한 초점을 둬야 하는 까닭입니다.

 

당신은 깨달음을 훔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나요?

당신의 만족은 과연 어디까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