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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선과 깨달음, 주장자로 알아보기

Buddhastudy 2024. 12. 10. 19:28

 

 

많은 섬 문답에서

대산님들이 주장자를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장자는 1미터 남짓 되는 일종의 지팡이인데

우리 또래들은 어릴 적 홍콩 무협영화에서

소림사의 높은 스님들이 나올 때마다 봐서 잘 압니다.

 

불자라고 하는 먼지떨이처럼 생긴 것과 더불어

선승들의 상징처럼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걸 내려놓거나 툭 던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가끔 듣는 말로는

한 검사가 옷을 벗는다고 하거나

미국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경찰관이 배지와 권총을 반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니 그게 그런 정도였나요?

 

중이 물었다.

어떤 것이 바로 근원에서 끊는 것입니까?”

대사가 주장자를 던지고 방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습니다.

선문답을 글로 쓰인 것으로 보다 보니

이런 것까지 실감나게 이해하기는 어렵고

주장자나 불자가 등장하는 장면이

대화를 벗어나는 것이다 보니

그냥 왜 저러는 거야?”라는 식으로 이해될 소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한마디로

나 스승 역할 때려치운다는 다소 격한 표현입니다.

 

물론 좋게 해석해서

바닥에 떨어진 주장자를 봐라일 수도 있겠지만

질문한 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방장으로 따라 들어가지 않는 이상

별 소용이 없는 일이겠죠.

 

옛사람이 말했다.

주장자를 알면 일생의 공부를 마친다고도 하고,

주장자를 알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들어간다고도 하였는데

자 말해보라.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알겠는가?”

 

아마도 옛스님들의 선 공부는

주장자를 활용하는 폭이 아주 넓었던 모양입니다.

주장자로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정도입니다.

 

뻥이 좀 심한 것 같긴 하지만

선승이 주장자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건 여전히 의미 있는 나무토막으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마곡이 장경의 방장실로 찾아가서

선상을 세 바퀴 돈 후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 뻣뻣이 섰다.

 

장경이 말하길

됐다. 됐어.”

며칠 뒤 마곡이 다시 남전을 찾아가서 똑같이 했다.

남전이 말하기를

틀렸다. 틀렸어.”

그러자 마곡이 말했다.

장경은 맞다고 하는데 어찌 화상은 틀렸다고 합니까?”

남전이 말했다.

장경의 말은 옳다. 그러나 자네가 한 짓은 틀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좀 황당할 수 있습니다.

이 선문답은 마곡, 장경, 남전 세 사람이 나오는데

마곡은 드러내 보이고 장경은 맞다, 남전은 틀렸다.

근데 맞다고 한 장경이 틀린 것은 또 아니랍니다.

 

선문답은 수학도 논리학도 아니니까

이해는 하지만 왜 이러는 걸까요?

 

우리는 선에 익숙해지자는 취지에서

초심자를 위한 형식 이해를 다섯 번에 걸쳐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인데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추가하려고 합니다.

 

주장자와 몸짓을 사용한 마곡의 행동 때문에

예를 드는 문답에 들어왔습니다.

 

마곡은 주장자와 동작으로 장경에게 깨달은 바를 보여줍니다.

무슨 암호 표현 동작 같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이 광경을 목격한 장경은 맞다고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동작에 대해서 남전은 틀렸다고 해요.

 

이 상황에서 마곡이

뭐 이래? 똑같은데 둘이 왜 달라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남전의 대답이 더 이상합니다.

장경이 맞다고 한 것은 맞고 말이지

네가 한 짓은 틀린 거야

 

이 선문답에서 우리가 보는 형식은 재확인입니다.

한 번 정도는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재차 확인했을 때도 확실하면

그건 진짜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안다면

질문을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당황할 이유가 없겠죠.

 

장경이 마곡을 확인했다는 것을

남전이 알았는지 아닌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랬건 말건 결과적으로는 한 번 더 확인한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같은 스승이 한 번 더 달리 묻거나

동작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어쨌거나 마곡은 말에 딱 걸려듭니다.

정말 안다면 그럴 수 없죠.

 

오히려 마곡은 엉뚱하게 자백을 해버립니다.

장경은 맞다고 하는데 당신은 왜?”

 

그렇습니다.

맞다 틀렸다는 장경이나 남전에게 있지 않아요.

마곡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왜 틀렸다고 합니까?”

이건 그냥 , 전 모릅니다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같은 자리에서 한 사람은 맞다고 하고

한 사람은 틀렸다고 했어야

더 분명한 확인도 되고, 시간 낭비도 없겠지만

이렇게 시간과 거리를 두고 확인을 거듭하는 사례도 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질문을 거듭해 확인한다는 이런 형식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는 곁가닥이 없거늘

들어서는 이는 모두가 위태하다 하니

어찌 해야 곁가닥의 침해를 받지 않겠습니까?”

대사가 주장자로 그 입을 쥐어박자 그가 말했다.

이것도 곁가닥입니다.”

대사가 말했다.

입을 닥쳐라.”

 

마치 입문자 시절에 제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이렇다고 아는데 저렇게 하라고 하니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그 시절 선배 도반들의 반 정도는

주장자로 한 방 칠 듯이 달려들었고

절반은 차나 한잔 마시라고 했습니다.

 

주장자로 입을 쥐어박히고도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습니다.

걱정입니다.

요즘은 주장자가 흔하지 않거든요.

 

조주 스님이 당대의 선승인 수유화상의 방에 올라가

주장자를 짚고 왔다 갔다 하니 수유화상이 말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입니까?”

조주선사가 말했다.

물 깊이를 더듬습니다.”

화상이 말했다.

여기에는 한 방울의 물도 없거늘 무엇을 더듬는다는 말입니까?”

이에 조주선사가 주장자를 벽에 기대놓고서 내려가 버렸다.

 

물 깊이를 재는 동작이

예사 동작이 아님을 아시겠죠?

더군다나 손으로도 아니고

선승의 주장자를 짚는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같은 선승이라도 수준 차가 많이 나네요.

물소리를 듣고 물 밟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몰라도

전혀 문밖입니다.

 

어쨌거나 조주 스님은

주장자를 던지지도 않고 벽에 기대놓은 채 가버렸습니다.

아마 가르칠 군번도 아니라 던지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 깊이를 더듬는다 할 때

수유 스님이 화답을 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타고 오신 배가 못 뜰까, 걱정입니까?

대웅전 지붕 위에 잘 묶어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