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당신도 1초 만에 견성, 깨달음이 가능하다. '참나’를 증명하는 충격적인 방법

Buddhastudy 2022. 6. 15. 20:38

 

 

 

일주일 속성 견성법이 나왔을 때, 세상은 깜짝 놀랐습니다.

평생을 받쳐 수행해도 이루기 어려운 것이 깨달음이고

그래서 내생을 기약하는 것이 다반사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속성 견성법은 세상의 큰 주목을 받았고

그 시류를 타고 등장한 것이 참나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일주일도 긴 모양입니다.

하루 속성 견성법도 모자라

11초 단위로까지 좁혀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불교에도 돈오가 있지만, 사실 말이 돈오이지

이것을 이루려면 오랜 수행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빨라지는 속성 견성법은

매우 놀라운 비전임에 분명합니다.

 

왜 이렇게 쉽고 빠르게 견성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건 바로 힌두교의 참나때문입니다.

 

참나가 깨달음이라는 전제를 달고

그 접근 방법에 몰라를 섞으면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정의에 따라

수행 방법과 성취 시간이 얼마든지 줄어들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참에 우리들도 참나를 통해

견성이라는 것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부터 참나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연필을 하나 예로 들겠습니다.

주변에 연필 혹은 볼펜을 찾아 아무것이나 바라보십시오.

호흡을 깊게 들이쉬면서 다시 한 번 바라보세요.

 

, 이제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참나의 속성 견성법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들 어이가 없어 할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 참나전도사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입니다.

연필을 처음 보는 순간 당신은 그 어떤 해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비쳐질 뿐입니다.

이렇듯 삼라만상 모든 것은

연필처럼 당신의 마음에 저절로 비추어집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자성이며 본성이며, 이름하여 참나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습관적으로 연필에 해석을 가합니다.

연필에 관련된 정보를 붙여 인식하면서

참나에서 떨어져 현재의 가아가 된 것이지요.

 

당신이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해석을 넣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것이 참나이고 깨달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들은 참나와 가아가 공존하는 셈이 됩니다.

해석(관념)에 휘둘리지 않으면 늘 붓다인 채로 깨어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일주일을 넘어 11초의 속성 견성법이 가능하게 되는 논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방법으로 여러분은 정말로 견성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그러면 뒤로 미룰 것도 없이

지금 즉시 견성해서 참나상태로 있어 봅시다.

 

다시 한 번 영상에 주목하십시오.

연필을 보실 때 깊게 호흡하면서

아주 잠깐이라도 멍한 상태를 만들어 보세요.

이것이 잘 안 되면 이것저것 다 모르겠다고 하고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몰라, 몰라, 아무것도 몰라를 주문처럼 외우시는 겁니다.

이제 몰라를 통해 여러분들의 의식은 포맷이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여태껏 쌓아온 지식들이 모두 사라져

갓 태어난 아기의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 이 상태로 다시금 영상에 나오는 어떤 물체를 보세요.

 

이 물체에 대한 이름이나 그 어떤 정보도 없이

그냥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잠깐이라도 해석을 섞지 않았다면

이제 견성한 것입니다.

해석이 빠지는 순간이 전체의식이고 이 상태가 참나이니까요.

해석을 하면서 나의 범위가 생기고

이로써 생로병사를 비롯한 온갖 한계가 따라붙습니다.

 

그래서 해석을 하지 않고

그냥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순수하게 비추는 마음이 되면

생사를 초월해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나로써 깨닫는 공통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면 이 방법이 맞을까요?

해석을 하지 말라는 것은 생각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견성이고 깨달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을 인간보다 적게 쓰는 동물이나 식물

심지어 생각을 하지 않는 무생물들은 어떤가요?

그들이 모두 견성하고 성불했을까요?

 

생각을 쓰지 않으면 돌멩이처럼 될지언정

깨달음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열역한 제2법칙>을 거스르며

생각을 잘 쓰기 위한 방향으로 진화했고

생각을 가장 잘 쓴 싯다르타에 이르러 깨달음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생각을 잘 쓰는 방향이 곧 수행이고

그래서 지혜와 반야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생각을 없애는 쪽으로 수행의 방향을 잡습니다.

 

과거의 이름난 도사, 법사, 대사,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의심 없이 그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하지만 그 길에서 얻을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하나 있다면 그건 생각이 포맷된 체험을 깨달음이라고 신앙하는

무지몽매한 고집뿐입니다.

 

여러분,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대한 해석을 멈추면

당연히 생로병사가 희석되면서 전체 느낌을 얻게 됩니다.

개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우주가 된 홀가분한 기분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그 기분이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가요?

그런 기분을 백번 천번 느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

마음의 평화요?

 

수행은 평화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을 억눌러 얻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도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어떻게 삼라만상이 시작되어 현존하며

그 가운데 나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합니다.

 

진리를 모르면서 누리는 평화는

일종의 마취이고 세뇌이고 신앙일 뿐입니다.

 

인류는 오랜 경험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결과물을 얻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중생의 고통을 빠르게 없애주는 참나라는 진통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생이 된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無我라는 치료제입니다.

 

참나의 진통제는 고통을 유발하는 생각을 마취해 깊은 안식을 줍니다.

 

반면에 無我의 치료제는 생각이 통증이 된 근본 원인을 찾아 해결해 줍니다.

따라서 진통제인 힌두교의 참나를 불교의 치료제처럼 과대포장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가치는 지대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생각을 마취시켜 오는

참나의 안식에 만족하시나요?

 

싯다르타가 인류에게 남긴 無我의 치료제를

사용해 볼 의향은 없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