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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세이셸 역사 정치경제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3. 1. 19. 18:14

 

 

1. 소개

정식명칭 세이셸 공화국줄여서 세이셸은

아프리카 인도양 서부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에 위치한 섬나라로

수도는 빅토리아 (Victoria)입니다.

 

세이셸의 국기는 1976년 독립과 함께 제정되었지만

1977년 쿠데타가 일어난 후, 인민연합당의 당기에서 취한 디자인을 채택했습니다.

이후, 1996년에 일당체제가 아닌

다당제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 색상의 국기를 제정하였습니다.

파랑은 세이셸을 둘러싼 하늘과 바다를

노랑은 빛과 생명을 주는 태양을

빨강은 미래의 단합과 사랑을 위해 일하는 국민들을

하양은 사회 정의와 조화를

초록은 땅과 자연환경을 나타냅니다.

 

세이셸은 아프리카 인도양에 위치한 섬나라로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동쪽으로 1,700km

마다가스카르섬으로부터 북동쪽에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인도양상의 41개의 화강암질 섬과

75개의 산호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섬은 마헤 섬 (Mahe Island)입니다.

 

진기한 동물과 식물이 풍부하여

인도양 최후의 낙원이라고도 불리며

행정구역은 23개의 행정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이셸의 국토면적은 약 460km²

이는 세종특별자치시와 비슷한 정도의 크기입니다.

 

2021년 기준 약 95,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인구수 세계 200위권 정도로

경기도 동두천시 인구수와 비슷한 수치입니다.

 

세이셸의 1년 총 GDP2021년 기준

95천 달러로 세계 179위이지만

1인당 GDP는 약 9500달러로 세계 70위권 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이셸의 공용어는 영어, 프랑스어, 크리올러이며

민족 구성은 크리올인이 약 93%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외 영국계, 프랑스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이셸의 종교는 약 70%의 인구가 로마가톨릭교를 믿고 있으며

그 외 소수가 개신교, 힌두교 등을 믿고 있습니다.

 

 

2-1. 역사

세이셸에 관해 기록되어진 역사적 추론들에 의하면

세이셸은 18세기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무인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12세기에 처음으로 무인도였던 세이셸을 방문한 사람들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Austronesian) 선원들과

이후, 몰디브, 아랍 무역상들이 방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6세기 초. 세이셸에 대한 유럽인들의 목격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포르투갈 제독 바스코 다가마 (Vasco da Gama)가 지휘한 제 4포르투갈령 인도 함대.

루이 멘데스 드 브리토 (Rui Mendes de Brito)에 타고 있던

서기관 톰 로페스 (Thome Lopes)’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다가마의 선박들은

세이셸의 실루엣 섬(Silhouette Island)으로 추정되는 높은 섬 인근을 지나갔으며

다음날에는 데로시섬(Desroches Island)을 지나갔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후, 세이셸에 대한 최초의 상륙은

16091. 영국 동인도 회사의 네 번째 항해 중

알렉산더 샤르페이 (Alexander Sharpeigh)’ 선장이 지휘하던

어센션 Ascension’ 호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에 교역의 통과 지점이었던 세이셸은

무인도 시절. 해적들이 주로 이용하였는데

1756. 프랑스의 니콜라스 모피’ Nicholas Morphey 선장이

마헤(Mahé) 섬에 소유를 상징하는 돌을 올려놓으며

프랑스의 점령을 알렸습니다.

 

이곳의 섬들은 루이 15세의 재무장관이었던

장 모로 드 세이셸 (Jean Moreau de Séchelles)’의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인이 정주하게 된 것은 1770년대로

그들은 노예를 이끌고 특산물인 바다거북을 남획하고

목재를 벌채하여 막대한 이익을 보았습니다.

 

프랑스 당국은 천연자원이 고갈된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시켰고

이후 이주자들은 쌀·목화·옥수수 재배를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세계정세는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제국주의 움직임을 보였는데

프랑스가 점령한 지 40년이 지날 무렵의 세이셸에도

영국의 손길이 뻗쳤습니다.

 

17945. ‘헨리 뉴컴 Henry Newcome’ 선장이 지휘하던

영국의 구축함 오르페우스(Orpheus)’

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마헤에 도착했습니다.

 

헨리 뉴컴은 세이셸 영토에 대해 항복 조건들을 작성했고

다음날 세이셸은 영국에 항복했습니다.

 

당시, 영국과의 전쟁 중이었던 세이셸의 프랑스 행정관

장 밥티스트 쿠에 우 퀸시 (Jean Baptiste Quéau de Quincy)‘

무장한 영국 함선들이 도착했을 때

현실적으로 큰 전력차를 느끼며 저항하기를 포기했습니다.

 

대신, 그는 영국과 항복 지위에 대해 성공적으로 협상하였으며

이에 영국은 기존 정착민들을 학살하거나 세이셸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2-2. 역사(독립 이후)

19세기 초의 나폴레옹 전쟁 때 인도양의 세이셸 제도 부근은

영국과 프랑스 해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세이셸은 모리셔스 제도와 함께 영국에 점령되었고

1814년의 파리회의를 거쳐 정식으로 영국령이 되었습니다.

 

이후 1세기 동안 영국은

모리셔스와 세이셸을 통치하였는데

1903년 세이셸은 모리셔스와 분리되며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 동안

변방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던 세이셸은

전쟁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1966년과 1970년에 선거가 개최되며

대폭적인 자치권을 획득하여

19766. 마침내 세이셸 공화국으로서 독립에 성공합니다.

 

공화국이 된 세이셸은 영 연방의 일원이 되었으며

초대 대통령 제임스 만참 (James Mancham)

영국과의 우호친선 관계 유지를 바탕으로 온건한 중립정책을 취했습니다.

 

1970년대의 세이셸은 스타 영화배우들의 휴식처이자

국제 제트기가 착륙하는 장소로 알려지며

만참의 통치기간 동안 산업개발과 관광을 발달시켰습니다.

 

하지만, 제임스 만참의 시정은 불과 1년에 그쳤는데

1977년 만참이 영국연방 회의에 출석하기 위해서 런던 체재 중

수도 빅토리아에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총리였던 프랑스 알베르 르네(France Albert René)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르네는 관광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지양하며

세이셸인들을 위해 세이셸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고 선언합니다.

 

1979년 대통령 르네는 재선에 성공하는데

헌법은 사회주의 일당 체제를 선포하였으며

공산정권을 내세워 소련과 국교를 수립.

중국, 북한을 방문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습니다.

 

세이셸에서는 이와 같은 르네 공산정권에 대한 반발로

1980년대. 르네 대통령에 대한 일련의 쿠데타 시도들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이 중 일부는 남아프리카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81. 매드 마이크 호어 (Mike Hoare)

휴가를 즐기던 럭비 선수들로 가장한

43명의 남아프리카 용병팀을 이끌고 쿠데타를 시도했습니다.

 

공항에서 총격전이 이루어졌지만, 정권 탈환은 실패에 머물렀고

대부분의 용병들은 에어 인디아 항공기로 탈출했습니다.

 

이어 1986년에 시도된 쿠데타는

세이셸 국방 장관인 오길비 베를루이스 (Ogilvy Berlouis)가 주도했으며

르네 대통령은 인도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Flowers are Blooming이라고 불리는 작전에서

인도의 해군 군함 빈다야지리 (Vindhyagiri)

빅토리아 항에 도착하며 쿠데타를 저지시켰습니다.

 

세이셸에서의 르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초기 10여 년간 독재정치를 펼쳤다는 점 때문에

세이셸에서도 지지층과 반대층이 대립했는데

경제성장과 복지정책 확충으로 고정지지층이 탄탄하여

오랫동안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르네는 1980년대부터 일당 독재로 세이셸을 통치하다가

소련 붕괴 직후에 일당 독재체제를 폐지하고

1992년에 다당제 총선을 치루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확고한 지지층으로 인기는 식을 줄 몰았고

2004년에 들어서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3. 정치

국가와 정부 수장인 세이셸 대통령은

5년 임기로 투표로 선출됩니다.

대통령은 각료를 주재하고, 임명하며

이러한 각료 임명은 입법부의 다수결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세이셸 의회는 단원제로 5년 임기, 35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이 중 26명은 투표에 의해 직접 선출되고

나머지 9석은 각 당이 받은 득표 비율에 따라 비례제로 임명됩니다.

 

20201026,

59세의 성공회교도 성직자인 와벨 람칼라완 (Wavel Ramkalawan)

세이셸 공화국의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람칼라완은 1993년부터 2011

그리고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야당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그의 승리는 세이셸에서

야당이 대통령 선거에 승리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습니다.

 

세이셸은 유엔,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 인도양 위원회,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와 영연방의 회원국입니다.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과 남아프리카는

실패한 쿠데타 시도에 연루되었는데

이후에도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에 따라

세이셸 외곽에서 드론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세이셸의 군대는 다수의 개별 부대로

보병대와 해안경비대, 공군과 대통령 경호 부대로 구성된

세이셸 인민 방위군이 있습니다.

 

세이셸의 군대가 발전하는 데는

주로 인도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인도는 지속적으로 세이셸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세이셸은 주로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자행되는

인도양 해적 행위를 상대로 하는 전투 주요 참여국입니다.

전직 대통령 제임스 미셸은

해적이 국제 사회에 연간 7백만 달러에서 1,200만 달러 사이에

피해를 안겨주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해적들은 세이셸의 선박과 어업, 관광 손실의 직간접적인 피해를 끼쳐

세이셸 GDP의 약 4%를 희생시켰으며

이에 따라 국제 사회는 해적을 상대로 한세이셸의 전투를 돕기 위하여

경비함, 항공기, 드론 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4. 경제

세이셸은 산업이 발달하기 전 농경 중심 시대에는

시나몬, 바닐라, 코프라(copra)가 주요 수출품이었습니다.

 

1960년대 세이셸은 노동 인구의 약 33%가 농장에서 일을 했고

20%는 공공 혹은 정부 부문에서 일하였으며

사람들은 주로 자급자족 형태로 살아가는 상태였습니다.

 

1976년 독립 후, 세이셸 정부는 경제성장에 중심을 두었고

이로 인해, 1인당 생산량은

1960년대의 자급자족 시절보다 약 7배 확대되었습니다.

 

2008년 전 세계 경제 위기 때의 세이셸 정부는

사회 복지 비용의 억제와 공기업의 추가 민영화를 포함하여

재정 적자의 억제를 우선시했습니다.

 

공기업들이 석유, 제품 유통, 금융, 기초 제품의 수입,

통신 및 광범위한 기타 사업들에서 활동하며

정부가 경제 활동에서 우세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극적 참여의 정부, 시장 개방성, 규제 효율,

법의 지배 및 기타 요소들의 정도를 측정하는

경제자유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에 따르면

세이셸의 경제 자유는 2010년 이후부터 이루어졌습니다.

 

현대의 세이셸은 20201

국제 투명성 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한

최근 부패 인식 지수 보고서에서

아프리카 국가들 중 가장 부패가 적은 국가로 나타났습니다.

 

세이셸에서 생산되는 주요 농산물은

고구마, 바닐라, 코코넛, 시나몬 등이 있으며

주요 수출품은 냉동과 통조림 어류, 코프라, 시나몬과 바닐라 등이 있습니다.

 

1971, 세이셸 국제공항이 개항함에 따라

관광은 중요한 산업이 되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경제 분야를 농장 농업과 관광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관광 부분은 더 많은 투자를 받았으며

경제의 농장 부문은 뚜렷하게 감소하여

세이셸의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코랄 스탠다드 스마트 초이스

비스타 도마와 호텔 부게인빌레의 개장을 포함하여

세이셸 전역에 걸쳐 호텔 건설이 이루어졌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세이셸 정부는 호텔과 다른 서비스들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외국인 투자를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장려책은 부동산 프로젝트와 새로운 리조트 사업들에 대해

막대한 양의 투자가 이루어졌고

세이셸의 관광업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광 중심 국가의 취약점은

코로나 19로 인하여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세이셸 또한 2020년에는 국경을 폐쇄하였습니다.

 

세이셸 정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백신 접종과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 두기 등을 유지하면서

외국인 관광객을 허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