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지혜별숲] 쿤달리니 각성을 위해 영혼을 깨우는 방법(1) [쿤달리니 각성/9회]

Buddhastudy 2023. 4. 12. 20:06

 

 

 

인간은요

몸체와 마음체와 영체가 통합되어 이루어진 존재에요.

 

때문에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 성장하여 조화를 이루어 갈수록

근원과 더 바르게 정렬됩니다.

 

근원과 바르게 정렬되면

차크라와 나디를 통해

더 많은 근원에너지가 내 안으로 흘러들게 되구요

이때 내 안의 신성에너지는 우주의 신성에너지와 공명하면서 깨어납니다.

 

이 말은 신성에너지인 쿤달리니를 깨우고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 성장하고 깨어나야 한다는 뜻인데요

지난 영상들에서

몸을 깨우는 방법마음을 깨우는 방법들에 대하여 살펴보았고요.

오늘 영상에서는 영혼을 깨우는 방법

영혼의 소리에 주파수 맞추기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개체 영혼은요

인간 육체를 선택하고 지구에서의 삶 속으로 들어올 때

나름의 소망을 가지고 옵니다.

이 삶을 통해 체험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고, 성취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거죠.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는

영혼의 소망을 알고 있었고

영혼의 소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아기들의 눈빛은

새로운 체험을 향한 영혼의 순수한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구요

아이들이 터트리는 웃음엔

영혼의 천진난만한 기쁨과 생동감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면서

허상인 에고가 자라났고요

점점 더 에고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혼의 소리보다 에고의 소리가 커지면서

우리는 영혼의 소망이 아니라

에고의 소망을 따라 살게 되었는데요

에고의 소망을 따라 사는 삶이 반복될수록 에고의 소리는 더 커지고요

상대적으로 영혼의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천방지축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에 묻혀

안내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한데요

안내자가 잠들어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에고의 큰 소리에 파묻혀

영혼의 소리가 무시되고 거절되는 상황이 반복되면요

영혼은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게 되고요

활기를 잃어버린 아이가

보이지 않는 구석에 앉아 웅크리고 잠들어버리듯

활기를 잃어버린 영혼은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하여 침묵합니다.

 

이제 영혼은 잠들어 버린 듯 침묵하고

영혼의 안내를 잃어버린 우리는

삶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들은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에요.

여기에서 더 깊게 이해해야 할 것은요.

영혼이 실제로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

 

영혼은 깨어있지만, 우리의 의식이

영혼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고

에고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을 뿐이에요.

 

너무 오랫동안 에고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추고 살아왔기 때문에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우리가

영혼이 잠들어버렸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몇십 년 동안

인터넷 TV의 현란한 광고 채널에만 집중하느라

정규 채널의 존재와 주파수를 잊어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영혼을 깨우기 위한 수련에서

가장 먼저 이해하고 실천하고 연습해야 할 것은

영혼의 소리에 주파수 맞추기입니다.

 

우리가 영혼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춰야 하는 이유는요

안내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듯이

영혼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삶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에요.

 

영혼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서는요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

에고를 따르지 않고 영혼을 따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선택의 연속인데요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영화를 보러 갈까? 운동을 하러 갈까?’ 이와 같이

가벼운 선택들도 있고요

 

이걸 전공할까? 저걸 전공할까?’ ‘이 회사에 다닐까? 저 회사에 다닐까?’

이 사람과 결혼할까? 저 사람과 결혼할까?’ ‘아이를 낳을까? 낳지 말까?’

이와 같이 좀 더 진지하고 무거운 선택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선택이

우리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택시를 탈지 지하철을 탈지, 영화를 보러 갈지 운동을 하러 갈지

이 단순한 선택이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로 이어져

생과 사를 갈라놓을 수도 있고요

 

어떤 회사에 다닐지, 어떤 사람과 결혼할지

신중하게 고민하고 최선이라 여겼던 선택이

인생 전체를 엉망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에고는요

어떤 선택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지 못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에고는요

무엇이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자신이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삶은 더 엉망진창이 되고 힘들어지는데요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이 할 수 있다며 억지를 부리다가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에고의 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소리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요

이 삶을 통해 구현해내고 싶은 영혼의 소망이 무엇인지는

오직 영혼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영혼을 따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느낌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에고의 소리에 집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영혼의 소리와 에고의 소리를 구분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좋은 것도 같고 싫은 것도 같고

자신의 느낌조차 제대로 구분이 안 될 수 있고요

심지어 내가 지금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섬세하게 귀를 기울이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영혼의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리고요

우리는 더 쉽게 영혼의 소리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영혼은 단순하고 근원적인 느낌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이때의 느낌은

다양하게 분화된 강렬한 감정들이 아니에요.

분노나 증오, 질투나 미움, 우월감이나 열등감처럼

명확하게 이름표를 붙일 수 있는 강렬한 감정들은

에고에게 속합니다.

 

영혼의 느낌은 좀 더 부드럽고 나지막하며 직관적입니다.

좋다, 싫다’ ‘편하다, 불편하다’ ‘내킨다, 내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느낌으로 영혼은 자신을 표현합니다.

 

물론 이런 느낌 역시 에고의 느낌과 혼동될 수도 있는데요

에고의 소리와 영혼의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요

계산하는 마음직관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에고의 계산하는 마음은

반드시 물질적인 계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기대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모두가 에고의 계산하는 마음에 속합니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기대했다면

에고의 계산하는 마음이 작동한 거고요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자신이 착한 사람으로 보여지길 기대했다면

에고의 계산하는 마음이 작동한 겁니다.

 

선택의 순간에 에고는 자동적으로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하고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직관을 따릅니다.

 

따라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일을 하든

계산하는 마음이 작동되고 있다면

에고가 활동하고 있는 것이고요

직관이 일어나고 있다면

영혼이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계산하는 마음을 따르고 있다면

에고를 따르고 있는 거고요.

직관을 따르고 있다면 영혼을 따르고 있는 것인데요

왜 어떤 선택들은 쉽게 할 수 있는 반면에

어떤 선택들은 오랫동안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까요?

 

에고가 원하는 것과 영혼이 원하는 것이 일치할 때는

혼란이나 갈등이 없는데요

에고가 원하는 것과 영혼이 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혼란이나 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내면에 마음의 불편함이 일어났다면

에고의 소망과 영혼의 소망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고요

영혼의 순수한 소망을 에고의 계산적 마음이 가로막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손익에 대한 에고의 저울질과 계산에 의한 결과가

영혼의 소망과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의 내부에서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마음의 시끄러움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죠.

 

영혼의 소망을 반대한 에고가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에요.

 

더 재미있는 사실은

에고가 온갖 논리를 동원해 설득하려고 하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자신에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거죠.

자신 안에서 자신이 분열되어

논리의 공격과 방어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마음이 불편하고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영혼이 가고자 하는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요

이때 에고의 생각감정은 더 많이 분열되기 때문에

마음의 불편함과 시끄러움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이렇게 일어난

마음의 불편함과 시끄러움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에너지는

차크라의 활성을 방해하고

쿤달리니 각성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영혼의 소망에 에고의 소망을 일치시킬 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내부는 분열되지 않고 통합될 수 있고요

영혼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주파수를 맞추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생각보다 느낌을 따르고

계산보다 직관을 따르는 연습을 꾸준히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게 되고요

영혼은 활발하게 깨어나

우리의 길을 안내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더 깊이 근원과 연결되고

근원의 신비와 깨달음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오늘은 쿤달리니 각성을 위한

영혼 깨우기 수련의 첫 번째 시간으로

영혼의 소리에 주파수 맞추기에 대해 말씀 드렸구요.

 

다음 영상에서

쿤달리니 각성을 위한 영혼 깨우기 수련

두 번째 시간 계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채널 [지혜별숲] 이었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현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