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25. 당신이 붓다인 과학적 증거! 당신은 언제나 깨달아 있다!

Buddhastudy 2023. 6. 15. 19:58

 

 

 

모든 수행은 현재의 나가 중생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번뇌망상이 그치질 않고 그렇다고 지혜가 출중한 것도 아니니 중생임에 틀림없다.

 

중생이 살아가는 삶

우여곡절이 많겠지만 결국엔 병들어 죽고 마는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고해를 일찌감치 절감하는 사람들은

영생과 열반에 초점을 맞춘다.

대부분은 종교적 믿음을 통해 쉽게 얻으려 하지만

철학적 식견을 갖춘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성취하려 한다.

후자의 사람들을 가리켜 수행자라 한다.

 

 

어떤 수행이 되었든 대칭을 깨고 자유로워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그런데 중생을 전제로 한 출발은 그 자체로 매우 대칭적이다.

중생과 붓다로 가르고 시작하지 않는가.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진솔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는 좋다.

하지만 수행에 임해서는 중생과 붓다의 이분법적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중생-> 붓다]의 구조보다는 [3차원 붓다-> 5차원 붓다]가 낫다.

 

그런데 여기서 붓다라는 말 자체에도 대칭성이 배어 있다.

깨달은 자라고 하면 깨닫지 못한 자가 함께 따라오니 말이다.

그래서 붓다라는 말보다는 그냥 실존으로 놓는 편이 낫다.

 

수행이란

[실존인 당신이 실존의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정리하면 된다.

 

혹자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높이면 하심이 되질 않아

오히려 수행에 지장이 될 수 있다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하심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되는 것이 대칭을 깨는 일이다.

중생으로 전제를 깔면 고해에서 탈출해 영생과 열반을 쟁취하려는 대칭의 족쇄가 강하게 작동한다.

아무리 수행해도 이런 거대한 대칭의 틀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조성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를 [3차원에 여행 온 실존] 정도로 놓는 것이 좋다.

5차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깜빡 잊어서 잠시 헤매는 중이다.

원래 실존이기에 조금만 정진하면 그 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불교는 과학이 발달할수록 토대가 강화된다.

나를 실존으로 놓아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현대물리학은 정확히 일러주고 있다.

 

우주의 가장 근간이 되는 물리법칙은 무엇일까?

뉴턴의 중력의 법칙일까?

아니면 아인슈타인의 특수/일반상대성이론일까?

그것도 아니면 소립자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불확정성의 원리일까?

 

현재까지 나온 모든 물리 이론들은 모자이크의 조각 같은 것이다.

하나의 이론으로 물리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조건에 따라 이론의 적용을 달리하기도 하고

몇 개를 합쳐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미진함 때문에 과학자들은 좀 더 단순한 모델로 우주를 설명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꿈의 통일장이론이다.

 

물론 오늘날 진행되는 통일장이론은

소립자의 세계에서 표준모형을 구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거시세계까지 포함하는 우주 전체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보다 쉽고 명료한 이론이 필요하다.

그 해답은 놀랍게도 싯다르타의 탄생 설화인 천상천하유아독존에 있다.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일곱 걸음을 걷고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온 우주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후대의 사람들이 꾸며낸 얘기지만

여기엔 우주의 모든 물리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놀라운 공식이 숨어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말하면 [관찰자 절대 보존의 법칙]이다.

 

우주 삼라만상은 관찰자 단 한 명만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양자역학을 선두로 한 현대물리학의 총체적 결론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깨달음이 없기에 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당신이 버스에 탔다.

그러면 온 우주는 당신의 시간을 기준으로 두고

버스 밖의 모든 것들의 시간을 빠르게 가도록 왜곡시킨다.

당신이 등산을 해서 봉우리에 올랐다.

역시 당신을 위해 온 우주는 시간을 느리게 가도록 왜곡시킨다.

당신이 움직이는 시시각각 당신만을 위해 우주는 시간을 조정한다.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서 차 한잔을 마셔 보자.

당신이 5초 정도 걸려 찻잔에 손을 댔다.

그리고 블랙홀 밖의 세상을 보았다.

5초가 지났을 뿐인데 밖의 세상은 5만 년이나 지나 버렸다.

당신이 다시 10초 정도 걸려 찻물을 입속에 흘렸는데

밖의 세상은 무려 10만 년이나 흘러 버렸다.

당신을 위해 외부의 시간을 왜곡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블랙홀 밖에 A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당신을 보았다.

A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15만 년 동안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는 셈이 된다.

블랙홀 밖의 A를 위해 당신의 시간을 왜곡시킨 것이다.

즉 관찰자를 위해 피관찰자의 시간을 상호 왜곡시키는 것

이것이 상대성이론이다.

 

 

비단 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공간 또한 당신만을 위한 장을 언제나 준비한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태양 주변을 지나는 빛은 휘어진다.

태양의 높은 질량에 의해 공간이 구부러진 데 따른 현상이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그 빛에 타고 있다면 빛은 절대로 휘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위치한 공간은 일모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이고

대신 태양 주변의 공간을 심하게 일그러트린다.

 

웜홀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로켓을 타고 웜홀로 들어간다면 평소와 다름 없는 공간을 통과하게 된다.

하지만 로켓 밖의 풍광은 다르다.

당신을 위해 우주 전체의 시공간을 괴상망측할 정도로 접어 왜곡시키게 된다.

물론 외부의 관찰자 A가 보면 웜홀을 통과하는 당신의 시공간이 뒤틀릴 것이다.

 

양자도약과 같은 순간이동을 하면 어떨까?

당신이 지구에서 순식간에 안드로메다로 이동해도 당신의 시공간은 왜곡되지 않는다.

오로지 지구에서 안드로메다에 이르는 시공간이 찰나의 점멸을 하며 당신의 순간 이동을 떠받친다.

 

소립자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관찰하지 않으면 상태중첩의 상태로 대기한다.

그 유명한 생사가 공존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그런 사례이다.

당신이 관찰해야만 가운데 어느 하나로 선택한다.

?

바로 당신이 관찰하기에 보기 좋으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뉴턴으로 대표되는 기계론적 우주론은 시공을 포함하여 만물에 똑같이 적용되는 모델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오면서 깨졌다.

물리법칙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기 다르게 적용된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시공이 맞춰진 모델이다.

 

 

당신은 그저 별 볼 일 없는 중생일 뿐인데, 왜 온 우주가 당신의 일거일동에 반응할까?

바로 당신 자체가 우주이며 실존이기 때문이다.

삼라만상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숨결 하나에도 우주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조물주인 당신은 시간과 공간을 관찰 도구로 삼고

상태 결정을 통해 대상의 일부를 실감 나게 감상하게 된다.

이것이 [관찰자 절대 보존의 법칙]이다.

관찰자 단 한 명만을 위해 우주는 존재한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관찰자의 수만큼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가령 인류가 70억 명이면 그에 딱 맞춰진 70억 개의 우주가 있지 않겠냐는 의문이다.

더 확대하면 생명체의 수만큼 우주가 조각조각 나뉠 것이다.

 

그런데 우주는 단 한 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당신 홀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심하게 모순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냐고 따질 수 있겠다.

 

물론 상대계에서 보면 관찰자의 수만큼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분별이 만든 허상이다.

실존에서 보면 단 하나의 우주만 존재한다.

바로 당신의 우주이다.

 

그래서 당신의 눈에 다른 사람의 우주가 보이면

당신은 분별로써 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모순된 것 같지만 가장 완벽한 깨달음의 오도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