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 일본강점기에 만행을 저지른 일본은 왜 과보를 안 받나요? (2023.10.15.)

Buddhastudy 2023. 12. 20. 19:07

 

 

저는 이곳 천안 독립기념관을 처음 와 보는데

방문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일본의 만행이 굉장히 잔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당시 독립 운동가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갔습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고요.

기록을 다 못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일본이 그렇게 만행을 많이 저지르고도 지금 잘 살고 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유학도 하고

또 우리나라의 인재들이 일본에 정착해서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만행을 많이 저질렀는데

과연 과보를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질문자는 인연과보와 인과응보

두 단어를 혼동하고 있어요.

 

인과응보는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고,

좋은 짓을 하면 상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길을 가는데 바람이 불어 간판이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다고 합시다.

이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오늘 머리를 다쳤나하고 생각하는 것이

인과응보적 관점이에요.

 

그러나 인연과보란

어떤 원인으로 간판이 떨어져서 내 머리를 다치게 했는가 하고

그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사고를 벌이나 복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고로 보고

그 원인이 무엇이냐에 중점을 두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종교와 어떤 사회의 도덕관이

인과응보적 관점에 있습니다.

가령 나쁜 짓을 했는데도 벌을 안 받으면

다음 생에라도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언젠가 하느님이 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야

분한 마음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해도 잘 사는데, 그럼 나도 못 된 짓을 할까하고

잘못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는 믿음에 해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이지요.

 

이와 달리 인연과보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물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물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내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물고기를 많이 잡았구나하고 생각하고

물고기가 안 잡혔을 때

내가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안 잡혔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물고기가 많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 그물을 던져도 물고기가 잡힐 것이고

물고기가 없는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 그물을 던져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잡히는 것은 그 사람이 착한지 악한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물고기가 있는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면 물고기가 잡히는 것입니다.

 

일본이 잘 사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해를 깨친 것과는 깊은 관련이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물건을 잘 만들어서 잘 살게 된 것이지

도덕성이 높거나 특별한 종교를 믿어서 잘 사는 게 아니에요.

 

일본의 국민성은 기계를 만들든, 도로를 닦든, 그 무엇을 해도

꼼꼼하고 착실합니다.

그렇게 성실히 일하더라도 집에 가서는 다른 태도를 보일 수가 있는 거예요.

 

회사에서는 기계도 잘 만지고 자동차 수리도 잘하는 유능한 기술자가

술 먹고 집에 와서는

자기 부인을 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성격은 좋은데 기술이 없다면

돈은 벌지 못하겠지요.

 

자꾸 인과응보와 인연과보를 혼동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질문자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일본이 윤리적, 도덕적, 법률적으로 잘못한 것은

그들이 부유하든 않든 상관없이

그에 따른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일본의 만행을 두고

지진이 나서 가라앉아 버렸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과응보적 사고방식입니다.

 

과보란

물고기가 많은 곳에 가서 큰 그물을 던지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을 말해요.

질문자는 과보를 자꾸 응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만행에 대한 과보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믿음입니다.

미국 백인이 신대륙에 정착할 때 원주민인 인디언을 많이 죽였잖습니까?

인디언들이 살아남았으면 우리처럼

옛날에 너희가 우리한테 얼마나 못된 짓을 했냐?’ 하고 따질 텐데

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항의할 사람이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도 미국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살잖아요.

 

질문자의 생각대로라면 그들은 벼락 맞아 죽어야 합니다.

스페인 사람들도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그때 원주민들의 인구가 5천 만이었는데 지금은 5백 만이에요.

거의 씨가 마를 정도로 죽인 겁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다가 고통을 준 것도 어마어마했습니다.

배에 싣고 오다가 삼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그냥 생선을 잡아 통에 담아서 오듯이 그렇게 데려 온 겁니다.

그래도 미국이 지금 잘 살고 있잖아요.

 

인과응보적 관점에서 볼 때 못된 짓을 한 사람은 전부 벌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세상은 인과응보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금 선진국에서 탄소를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시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종이 못된 짓을 했으니까

인간이라는 종 중에 누군가가 죽는 거예요.

 

먹는 것은 입이 하는데 아픈 것은 배입니다.

배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독약인지 보지 못하고 먹었다면

그걸 보지 못한 눈이 탈이 나야 하고

입이 독약을 먹었으면 혀가 탈이 나야 하는데

배가 탈이 나서 죽게 되잖아요.

 

이것은 모든 존재가 연기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긴 시간의 틀에서 보면

인과응보도 맞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한정된 틀에서 보면 그렇지 않아요.

 

이 사람이 했으면 이 사람이 벌을 받고

저 나라가 했으면 저 나라가 벌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과응보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착각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남편 중에 집에 와서 짜증 내고 성질내고

가끔 폭행도 하지만 회사에 가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인간은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야 하는데 안 죽어요.

혹시라도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다면

그것은 그가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운전을 잘못해서 죽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도덕적으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잘해주면

이 사람도 반드시 나에게 잘해준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은 확률론입니다.

 

내가 이 분에게 욕하는 것보다는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나에게 좋은 말로 돌아올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을 뿐입니다.

 

욕을 하는 것보다 칭찬해 주는 것이

나에게 좋다고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베풀었는데

베푼 사람들 중에는 나에게 손실을 끼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 베풀면 손해가 난다하거나

베풀면 반드시 나한테 은혜를 갚는다하고 생각하면 안 돼요.

 

내가 그 사람한테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는

베푸는 쪽이 나에게

손해를 끼칠 확률이 적어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확률을 높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지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이렇게 된다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미시세계는 다 확률론입니다.

옛날에는 비가 온다’, ‘비가 안 온다라고 말했는데

요즘은 비가 올 확률이 조금 높다’,

비가 올 확률이 조금 낮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