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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툰] '태초의 진공'으로부터 138억 년 후, 과학 버전의 창세기

Buddhastudy 2024. 3. 5. 19:41

 

 

태초에 진공이 있었습니다.

진공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을 의미하지만

물리적 시스템으로서 진공은 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미시적 요동으로 넘쳐나는

특정한 물질적 체계입니다.

 

물질과 반물질, 입자와 반입자, 양과 음의 에너지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양자적 요동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평균값 제로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룹니다.

 

어느 순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극단적인 질서가 깨집니다.

완벽한 균형으로 요동치던 거품이 발작적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시공간이 급격히 팽창하고

물질과 에너지 생성이 촉발합니다.

물질적 우주는 이러한 극심한 요동에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순전히 무작위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질서가 깨진 순간

우주 탄생의 첫째 날이 열립니다.

 

--첫째 날, 급팽창

태초의 급팽창 속도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주 짧은 순간에 빛의 속도보다 훨씬 빨리 공간이 팽창합니다.

공간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에 제한을 받지도 않습니다.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신생 우주에는

속도 제한이 없습니다.

갓 태어난 우주는 밀도와 온도가 극도로 높습니다.

우아하고 완벽한 대칭이 지배하고 있으며

네 가지 기본 힘이 분리되지 않은 채 통합되어 있습니다.

 

통합된 힘은 우주의 팽창 속도가

다소 줄어들면서 차례로 분리됩니다.

중력이 먼저 분리되고 다음으로 강력이 분리됩니다.

 

급팽창 덕분에 우주는 모든 지점에서 완벽히 균일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뭉치거나 불균일한 지점이 생길 틈도 없이

빠르게 팽창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첫째 날이 끝났습니다.

우주가 탄생하고 불과 1/10^32분의 1초가 지났을 뿐입니다.

 

 

--둘째 날, 신의 입자

팽창 속도가 한풀 꺾였다 해도 우주는 여전히 뜨겁습니다.

팽창하는 뜨거운 우주 속에서

양자 요동으로부터 탈출한 입자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닙니다.

모든 입자들은 아직 질량이 없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차이는 온도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우주가 커짐에 따라 온도도 점점 떨어집니다.

온도가 특정 임계값 이하로 떨어지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힉스 입자가 연결됩니다.

 

힉스 입자는 다른 모든 기본 입자와 달리

스핀 값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공의 속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힉스장은 먼저 약한 상호 작용과 전자기 상호작용을 완전히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힉스장을 통과하는 많은 기본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그 상호작용의 크기에 따라 질량을 부여합니다.

 

난생 처음으로 질량을 갖게 된 입자들은

더 이상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지 못합니다.

마치 빠르게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끈적한 액체를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무거워진 입자들은

운동 에너지를 완전히 잃고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반면 적당히 가벼운 입자들은

살아남아서 미래의 물질들을 만들 재료가 됩니다.

 

힉스 입자는 다른 자들에게 질량을 선사한 뒤 장렬히 전사합니다.

극단의 환경에서만 형성될 수 있는 힉스장이

식어가는 우주를 견디지 못해

진공 속으로 숨어 버린 것입니다.

 

사라진 힉스 입자는 무려 138억년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구에서 고에너지 충돌로

원시 우주의 상태를 재현해 내자

아주 잠깐이지만 힉스 입자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 둘째 날이 끝났습니다.

우주가 탄생하고 아직 1/10^11분의 1초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정말 빠릅니다.

 

 

--셋째 날,

어제의 스타가 힉스였다면

오늘의 스타는 글루온입니다.

접착제 역할을 하는 글루온이

아주 가벼운 쿼크에 달라붙어

쿼크 3개짜리 결합 상태를 만듭니다.

 

이 결합은 전하가 +2/3인 업쿼크 2개와

전하가 1/3인 다운쿼크 1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결합은 너무나 견고해서

영원히 깨지지 않을 불멸의 존재가 됩니다.

바로 양성자의 탄생입니다.

 

글루온은 이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불멸의 결합을 만들어 냅니다.

이번에는 다운쿼크 2개와 업쿼크 1개짜리 결합입니다.

기발한 조합 덕분에 정기적으로 완전히 중성인 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양성자의 중성 버전인 중성자의 탄생입니다.

 

물질과 반물질의 대칭이 지배하던 우주에서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생성될 때마다

똑같은 양의 반양성자와 반중성자가 생성됩니다.

 

각각의 쌍이 충돌하면

그 즉시 소멸하면서 광자를 생성합니다.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이

어디선가 작은 비대칭이 생겨납니다.

아주 미미하지만

양성자와 중성자가 반양성자 반중성자 다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덕분에 우주는 점점 물질이 우세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미세한 비대칭이 없었다면

우주는 지금쯤 물질이 하나도 없는 거대한 진공 상태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셋째 날은 조금 깁니다.

빅뱅 이후 1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하루가 안 끝났습니다.

그 사이 우주의 밀도와 온도는

별의 중심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말은 지금 별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일이

원시 우주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 일은 바로 핵융합입니다.

 

온도와 밀도의 조건이 갖춰지자

양성자와 양성자가 융합하면서

중수소핵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중수소핵이 융합하면서 헬륨핵이 탄생합니다.

그 외에 리튬과 베릴륨 핵도 생겨납니다.

 

이처럼 왕성하게 진행되던 핵융합 공정이 3분 만에 멈춰 버립니다.

3분이 지나면 온도와 밀도가 더 이상 핵반응을 지속할 정도로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만약 이 핵융합 공정이 10분만 지속되었다면

양성자는 거의 다 소진되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수소도 그 수소를 원료로 하는 별도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행히 셋째 날은 딱 3분에서 끝났습니다.

 

 

--넷째 날, 빛이 있으라

넷째 날부터는 하루가 천년이 아니라 수십만 년으로 길어집니다.

오랫동안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식어가는 것 외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입자와 핵, 광자와 전자가

수십만 년 동안 어둡고 불투명한 플라즈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늘 그렇듯 자연계의 변화는 온도에서 비롯됩니다.

빅뱅 후 38만 년이 지나자

우주의 온도가 3000도까지 떨어졌습니다.

그에 따라 전자의 속도가 느려지고

느려진 전자는 전자기력에 이끌려 원자핵과 결합합니다.

이로써 최초의 원자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플라즈마는 엄청난 양의

수소와 헬륨 가스 덩어리로 해체됩니다.

 

더욱 놀라운 변화는 빛입니다.

그동안 광자는 고속 날뛰는 입자들에 가로 막혀

제대로 직진 한번 못했습니다.

 

그러나 입자들이 원자로 뭉치자 온 사방에 길이 트였습니다.

광자는 미친듯이 직진하기 시작합니다.

광자의 대탈출, 불투명했던 우주가 갑자기 눈부시게 빛납니다.

 

빛이 있으라

태초가 아닌 넷째 날이 되어서야 이루어집니다.

우주가 탄생하고 38만 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다섯째 날,

분명 빛이 있으라 했는데 계속 있지는 않네요.

힘차게 뻗어나가던 빛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빛의 파장도 늘어나

빛이 가시광선의 범위를 넘어

적외선 복사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우주에는 온기만 남고 밝기가 사라졌습니다.

우주는 또다시 완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꺼져버린 불씨는 누가 되살릴 수 있을까요?

 

그 주인공은 바로 중력입니다.

중력은 그동안 다소 주변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부터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급팽창 덕분에 우주의 밀도는

모든 영역에서 균일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주 미세한 차이는 존재합니다.

어떤 곳은 물질의 밀도가 조금 높고, 어떤 곳은 낮습니다.

 

중력은 밀도가 높은 곳부터 서서히 공략합니다.

물질이 물질을 끌어당기고

점점 큰 덩어리로 뭉칩니다.

우주 여기저기에 태양보다

적어도 100배 이상 무거운 수소가스 구체가 생겨납니다.

수소를 모으는 이 과정은 수천만 년이 걸립니다.

 

거대한 구체의 중심부는

자체 중력으로 인해 뜨거운 플라즈마 상태가 됩니다.

플라스마의 온도는 수천만 도에 달합니다.

이는 셋째 날 우주의 조건과 똑같습니다.

 

또다시 조건이 갖춰지자

수소 핵융합 반응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양의 열이 발생하고

이 열은 광자와 중성미자의 형태로 방출됩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별빛이 번쩍입니다.

 

빅뱅 이후 2억년, 우주에 다시 빛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다른 별들이 합류해 온 우주를 비춥니다.

다섯째 날이 저물었을 때 밤하늘은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여섯째 날, 질서

1세대 별들은 크기가 큰 대신 수명이 짧습니다.

수명을 다한 별들은 초신성으로 폭발하면서

다음 세대별들을 위한 재료가 됩니다.

 

아기별들은 조상 별들보다 크기가 작지만

대신 수명이 깁니다.

신세대별들은 오래오래 살면서 행성 가족을 거립니다.

 

다시 시간이 지나자

별들이 무리를 이루어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합니다.

은하가 생기고 질서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질서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긴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우주는 혼돈의 연속이며 파국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질서로 위장한 혼돈의 중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위대한 속임수 덕분에

우리는 안심하고 생명을 번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주 탄생의 첫째 날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주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섯째 날이 끝나고 현대 우주론의 창세기가 끝났습니다.

138억 년이 지났습니다.

 

--

, 이번 영상은

우주의 기원을 다룬 책 <제네시스>를 참고해서 만들었습니다.

<제네시스>의 저자 귀도 토넬리는

힉스 입자 발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탈리아의 입자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비사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이자

유럽 입자물리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입니다.

 

원시 우주의 상태를 제한하는 일을 지켜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창조의 순간을 늘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귀도 토넬리는 책 <제네시스>를 통해

현대 우주론을 창세기에 비유해 제치 있게 설명합니다.

곳곳에서 우주론의 치열한 탄생 과정도 들려주고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와 같은 궁금한 질문에도 답을 하려 합니다.

 

그중 태초의 진공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모든 것이 양과 음의 에너지

평균 제로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가설은

지금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양의 물질 에너지와 음의 중력장 합이 정확히 제로인 점에 근거를 둡니다.

그러한 특성을 가진 우주는

실험적으로 봤을 때 단순한 양자 요동에 의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에너지 제로의 우주가

전통적인 빅뱅 이론의 중요한 변형이 될 수 있으며

태초의 특이점 미스터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학과 신화, 창세기와 최신 현대 우주론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책으로 잘 정리된 느낌입니다.

전체 물리학과 기원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멋진 소장품이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북툰이었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