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이 영상 하나로 모든 깨달음을 통합합니다!

Buddhastudy 2024. 3. 21. 19:31

 

 

어떤 명제에 대해서 논하려면

반드시 그 명제에 대한 정의부터 선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개념을 가지고는

추론이나 분석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깨달음이 정의되지 않는다면

이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행자들이 생각하는 깨달음이란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한 번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의 세계로 몰입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어떤 수행자가 있습니다.

그는 늘 번뇌망상으로 인해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 가운데는

생로병사도 있고, 진리에 대한 갈증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뒤섞여서 괴로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 괴로움이라는 것은

생각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생각 중에서도 특히 분별에 뿌리를 두고 있고요.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분별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면 괴로움이 사라지게 되니까요.

 

그런데 분별을 어떻게 가라앉힐 수 있을까요?

분별은 생각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분별이 곧 생각이고 생각이 곧 분별인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생각을 하지 않아야만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지만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돌멩이나 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물리학적으로 따지면 돌멩이도 생각하기는 합니다.

현재의 상태를 지속하도록

설정된 정보 자체가 일종의 생각이니까요.

 

어쨌든 수행자가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생각이 없는 무심의 상태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생명체로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다시 고아내는 방법이 생각을 두 층으로 가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분별심이고

-두 번째는 청정심입니다.

 

전자는 타파해야할 가아로 놓고

후자에는 본성, 진아, 불성, 참나, 순수의식 등의

그럴싸한 호칭을 붙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흑백으로 가르고

어두운 쪽인 가아를 없애면

본질만 남으면서 괴로움이 소멸하게 됩니다.

 

이론이 정립되었으면

실행만 남았습니다.

 

이제 수행자들은 이론대로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행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가아의 분별심을 거둬낼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뭔가 알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알려는 마음 자체가 분별이고

그래서 오직 모를 뿐의 의식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생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없애려고 하면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므로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세 번째는 생각에 해석이 붙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에 자신만의 해석이 덧씌워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면

분별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의식을 유지하게 됩니다.

 

-네 번째는 참선을 통해

생각 전체를 뿌리째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무아지경에 수시로 드나들다 보면

분별심이 사라져 청정한 의식만 남게 되는 원리입니다.

 

-다섯 번째는 분별심이 새끼를 치지 못하도록

하나의 분별에만 단단히 묶어놓는 것입니다.

가령 뜰 앞에 잣나무와 같은 공안을 만들어

분별이 여기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옥죄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분별의 알고리즘이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다가

어느 순간 청정한 마음 상태가 됩니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분별심을 타파하여 청정한 순수의식에 이르면

괴로움이 소멸합니다.

분열이 작동하지 않으니 해탈이고

괴로움이 없으니 열반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처럼 해탈과 열반이 조합된 심리 상태를 통칭하여

[깨달음]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정말로 해탈과 열반의 조합이 깨달음이 맞을까요?

언어란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정의하면

그것이 깨달음이 맞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존은

깨달음을 그렇게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브라만교의 수행을 통해 해탈과 열반에 이르렀고

그것이 망상적 도취 현상임을 확인했습니다.

마치 진통제를 맞아

잠시 고통을 잊고 있는 환각상태로 본 것이죠.

그리고 괴로움을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존재에 대한 실상

다시 말해 실존에 대한 명증이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자각]이고

이름하여 [무상정등각]입니다.

 

세조는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실상과

나란 누구인가에 대한 자각을 깨달음으로 보았고

그럼으로써 반야의 불교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세존의 깨달음이란

실존의 문제

다시 말해 제1 원인을 진리적으로 깨우쳐야만 성립하게 됩니다.

1 원인을 모르면

우리가 아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뇌과학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우리의 체험이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가상의 것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뇌에서 만들어 낸 환영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런 체험에 빠져서

거기서 답을 얻으려는 행위는 아직도 횡행하고 있습니다.

 

체험이냐, 이성이냐?

기존 브라만교의 체험적 수행을

이성적 수행으로 바꾼 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철저한 반야의 종교이며

그 궁극이 무상정등각으로 귀결하게 됩니다.

 

당신은 아직도 체험해야 깨닫는다고 믿고 계시나요?

생각이 끊어진 평온한 마음 상태를 추구하고 계시나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적 자각이 없는 참나의 체험은

일시적 환영이 되어

허망하게 종식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