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참나가 초래하는 기묘한 환각 현상들!

Buddhastudy 2024. 3. 20. 19:41

 

 

왜 사람들은 열반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요?

자신의 이성을 버리면서까지

미치도록 추구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그건 나가 존재하는 최상의 상태가 열반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소멸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는 열반이 있다면

어느 누가 이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열반에 이르는 길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분별만 없애면 되니까요.

 

물론 분별이 쉽게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오직 모를 뿐이나 멍때리기를 통해서

꾸준히 참나를 찾으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참나 상태가 되면 분별이 잦아들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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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수행자들이 말하는 참나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 맞을까요?

 

참나 상태가 되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해지긴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이고

또다시 생각이 일어나서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참나 상태를 얼마나 오래도록 유지하느냐에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늘 참나로 깨어있으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참나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분별을 멈춘 상태는 얘기가 다릅니다.

 

우리의 뇌는 생존을 위해 죽을 때까지

붕괴를 일으키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일시적으로 분별을 멈출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일상에서 지속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만일 참나 상태가 단기적인 효과에 불과하다면

실망이 크겠지요.

그래서 참나 수행자들은

이때부터 세뇌에 전념하게 됩니다.

마치 기독교에서 믿습니다를 수시로 반복하는 것처럼

참나상태, 알아차림, 깨어있음, 현존 같은 단어들을

뇌리에 달고 살게 되지요.

 

조금이라도 괴로움이 일어나면

참나 상태를 떠올리며 잊으려고 애씁니다.

결국 분별을 없앤 것이 아니라

분별로서 참나를 꾸며내서 그 속에 안주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성령을 영접하는 것처럼

참나를 신봉하게 된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괴로움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요.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마약을 떠올려 봅시다.

마약 청정국인 우리나라에도

요즘 들어 부쩍 마약이 화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마약이 번져가고 있는 상황이지요.

 

왜 사람들은 마약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요?

그건 마약을 복용하면

괴로움이 사라지고 즐거운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싼 돈에 커다란 위험 부담까지 짊어지고

마약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약의 결과가 어떤가요?

마약을 통해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나요?

혹부리 영감처럼 괴로움 하나를 떼려다가

더 많은 괴로움을 달게 될 것이 뻔합니다.

 

심신이 망가지다가 결국 폐인이 되고 말겠지요.

참나를 마약에 대비하는 건 다소 비약적일 수 있지만

유사한 점도 꽤 있습니다.

참나로 얻는 마음의 평온은 마약처럼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그 평온을 늘리려고

참나 체면을 걸게 되고

이때부터 부작용이 커지게 됩니다.

 

참나 영접이라는 일종의 신앙처럼 자리하게 되고

이와 비례해서 에고가 눈덩이처럼 부풀어납니다.

 

사실 나는 참나 상태로 존재한다는 의식은

어마어마한 에고를 불러옵니다.

에고에는 많은 종류가 있지만

부처님을 흉내내는 에고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나 수행자들을 보면

입으로는 에고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남달리 큰 에고를 지니게 됩니다.

 

가장 큰 에고는

에고가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에고인 법이니까요.

 

기독교인들의 자존심은

[나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선민의식입니다.

[나는 참나를 찾아 깨우침을 얻었다]는 참나주의자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 어떤 형태로든 있게 되면

차원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 해탈의 이든, 열반의 이든 결과는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라는 것 자체가

차원이 만들어 낸 가상의 설정값이니까요.

 

그래서 이것을 깨부수려고

세존께서 무아를 들고나온 것입니다.

무아란, 차원의 설정값을 포맷시키기 위한

고심의 한 수인 것이지요.

 

당신은 아직도

참나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믿고 계시나요?

부처님이 힌두교의 참나를 타파하고

불교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