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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 제13회 나는 누구인가 (42:14)

Buddhastudy 2011. 9. 25.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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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나는 불성이다. 불성. 일체중생 실유불성. 일체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 이런 말 하시죠. 불성은 즉시여래다. 불성은 바로 부처님이에요. 그래서 중생에게 다 부처님이 있다는 거에요. 그럼 불성은 뭐냐? 이건 불생불멸 이거보다도 더 깊이 들어가서, 생노병사 여기에서 불생불멸로, 불생불멸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상주에요. 상주. 항상 머문다. 이게 불성이에요. 상주. (항상 상, 머물 주,) 우리가 예불할 때도 상주 부처님께 예불을 올립니다.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불성은 상주에요. 뭐가 상주인가? 그 실상의 세계가 상주거든요.

 

현상이라는건 유생유멸, 나는 것도 있고 죽는 것도 있는, 이건 현상인데. 거기에 실상이 있어요. 불생불멸, 실상이 있다고요. 불성은 상주인거에요. 그럼 나는 불성이다. 불성은 상주다. 상주는 무엇이냐? 常樂我淨상락아정이다. 상락아정. 항상하고 즐겁고, 참나, 진아이고, 늘 깨끗하다, 하는거죠. 이게 나입니다. 상락아정이에요. 우리, 참나라는게. 그러면 상락아정 참나를 설명한 기본경전이 열반경입니다. 열반경이 소승열반경도 있고, 대승열반경도 있는데 대승열반경 중에는 40권 열반경이 있고 36권 열반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나라에서는 36경 열반경을 많이 읽어요. 36권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그 열반경에 아자는, ‘라는 것은 즉시 여래장이다. 俄者卽是如來藏義아자즉시여래장의 여래장의 뜻이다. 나라는 것은 여래장이다. 여래다 이 말이에요. 一切衆生悉有佛性일체중생실유불성이니.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으니. 즉시아의다. 바로 이것이 나라는 뜻이다. 나는 불성이다 이 말이죠. 불성은 뭐냐? 상락아정이다. 이게 참나에요.

 

卽是我義 從本已來 常爲無量 종본이래로, 처음부터, 무량煩惱所부로. 한 업는 번뇌가 이걸 덮었어. 그래서 是故衆生시고로 중생이 不能得見불능득견이니라. 이렇게 때문에 중생이 보지를 못한다. 이게 날씨로 말하면 해가 뜨면서 동시에 구름낀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도 있고, 있듯이. 또 낮이 있으면 밤도 있듯이 이 불성에 처음서부터 번뇌가 있었다 이 소리에요. 아주 재미있는 소리요. 그래서 그 번뇌 때문에 못보는거죠. 저녁이 돼서 해를 못보는 것처럼 번뇌 때문에 못 본다. 이런 말씀이죠.

 

또 바다가 있으면 의례히 파도가 있듯이 파도 때문에 바다를 못보는 거와 같다. 이 말이죠. 그런데 번뇌가 아무리 있어도 그 불성에는 아무상관이 없다 이 소리에요. 파도가 아무리쳐도 바다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겁니다. 아무리 밤이 돌아와도 그 태양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소리에요. 이렇게 불성을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열반경에 계속 그런 말씀이 있는데 如來所說眞我는 여래가 참나라고 하는 것은 名曰佛性이다. 불성을 말하는 것이다. 淸淨佛性불성은 청정해서 常住不變이라. 항상 깨끗해서 늘 머물러가지고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도 설명하고요, 佛性者卽是如來. 불성은 곧 여래다. 여래는 항상 머무르는 법이고, 변하고 바뀌지 않는 법이다. 諸佛世尊 有二種法제불세존에게 이종법이 있다. 두 가지 종류의 법이 있다. 첫째는 세법. 세간법이고, 둘째는 제일의 법이다. 불교에서는 제일의라는 말을 써요. 제일의, 진제속제 제일의제, 진속이 있는데 진속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을 제일의라고 하거든요. 그냥 제일이에요. 제일의 법이 있다.

 

그런데 世法可滅 제일의법 세법은 가멸이요. 여래에게 있는 세간 법은 없어져요. 생노병사와 같이, 세법은 가멸이나. 제일의 법은 則不壞滅불괴멸이라. 제일의 법은 괴멸하지 않아요. (무너질 괴, 없어질 멸) 괴멸을 안한다. 제일의 법은. 이게 불성입니다. 우리도 그런 괴멸하지 않는 그런 제일의 법을 다 가지고 있는 거에요. 번뇌에 덮여서 모를 뿐이다. 이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두 가지를 설명하는데 첫째는 無常無我無樂無淨무상무아무락무정이고, 상락아정. 무상하고 또 무아하고, 나도 없고, 죽으면 없어지니까. 무락, 락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고. 이 몸 늙고 썩고 할 때보면 이게 깨끗한게 아니에요. 이게. 그렇지않아요. 이게 부처님에게 있는 한 가지 법이고. 또 한 가지 법은 상락아정이다. 부처님에게는 무상, 무락, 무아, 마지막 뭐죠? 무정. 이게 있어요. 그리고 또 부처님에게는 상락아정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이 무상무아무락무정은 괴멸을 하지만은, 상락아정은 정모괴멸이라. 괴멸하지 않는 상주법, 괴멸하지 않는 상주법, 이게 불성인데. 이 불성을 다 가지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생멸이다. 나는 오온이다. 나는 불성이다. 생일날 태어나서 제삿날 죽는 거, 이 생노병사만 우리가 알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가 더 깊게 살면, 불생불멸을 살 수가 있고, 상락아정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법락을 느낀다, 이래요. 법락. 법의 즐거움을 느낀다. 이 세락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태어나고 만나고 먹고 쉬고, 이게 세락인데요. 태어나는 것만 좋아했지, 중생이 이 죽는 것이 온다는 걸 싫어해요. 몰라요. 만나는 것만 좋아했지 헤어진다는 걸 생각안해요.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세락은 이렇기 때문에 고와 락이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에 윤회라 그러거든요.

 

고통이 오면 또 즐거움이 오고, 즐거움이 오면 고통이 오고. 이게 윤회에요. 이게 세락입니다. 그런데 이 법락은 불생불멸의 즐거움, 상락아정의 즐거움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믿고 닦는게 불자입니다. 불생불멸을 믿지 않고, 상락아정을 믿지 아니하면 도를 닦을 수가 없어요. 공덕을 닦을 수가 없거든요.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고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그러면 이게 불성이라는게 도대체 뭐냐?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천수경에 보면 願我早同法性身원아조동법성신. 이런 말씀이 있죠. 그럼 법성이 있는데, 법성하고 불성하고는 어떻게 다르냐? 이걸 물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셨어요?

 

법성원융무이상, 원아조동법성신. 법성이라는 말 많잖아요. 법의 본성, 부처의 씨앗, 부처의 본성, 불성. 그러면 법성과 불성에 어떤 차이가 있나? 이게 같은 건가? 다른 건가? 같다고 해도 그게 친절한 얘기는 아니고요. 다르다고 해도 또 친절한 얘기가 아니거든요. 왜 그러냐? 진성이라는게 있어요.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이말 있거든요? 법성게에. 진성, 참성품, 이 진성이 있는데 이 진성은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만법에 근원이에요. 진성이. 그래서 만법의 근원이라고 할 때 법성이라고 그래요. 용도, 그 설명하는 범위가 틀려요.

 

만법의 근원이라고 표현할 때는 불성이라고 안하고 법성이라고 그래요. 또 불성이라고 그러면 제불만덕의 근원이에요. 부처님이 그냥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하면 그냥 불성을 다 중생처럼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부처님이라고는 안 해요. 지혜와 자비와 온갖 덕행, 제불만행을 갖추었다 이 말이죠 . 그래서 그걸 부처님이라 그러는 거에요. 그러면 진성은 참 본성은 부처님의 만덕의 근원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만덕의 근원이라고 표현할 때는 불성이라고 그러지 법성이라고 안 해요.

 

그러니까 진성으로 볼 때는 진성과 법성이 같은 거에요. 그런데 표현하는 범위와 개념으로 볼 때는 만법의 근원이라고 표현할 때는 뭐라고 한다고 그랬죠? 법성, 부처님 만덕의 근원이라고 할 때는 불성, 이런 걸 교학이라 그래요. 이런 거를 구분하는게 교학입니다. 그냥 덮어놓고 같다. 그러면 설명이 안 되고, 같으면 왜 같으냐? 이 진성으로 볼 때는 똑같기 때문에. 진성으로 볼 때는 법성과 불성이 똑같기 때문에 같은 거고. 다르다. 왜 다르냐? 만법의 근원이라고 할 때는 법성이고, 부처님 만덕의 근원이라고 할 때는 불성이라고 해야 맞다 이런 거에요.

 

그리고 또 이 진성은 선과 불선의 근본이다. 이럴 때는 如來藏藏識여래장장식이라 그래요. 이게 중생이 말이오. 선도 짓고 악도 짓고 그렇잖아요. 그래서 진성은 선불선의 근원이 되요. 그래서 이 진성이라는게 순전히 선법만 만들어 내는 거 아니에요. 불수자성수연성이라. 인연에 따라서 진성이 자성을 지키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악하라고 들면 별별악을 다하게 되는게 진성이에요. 불수자성수연성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볼 때, 악하다 이거 말이 안되고요, 선하다 이거 말이 안되요.

 

왜 선과 악이 나타나느냐? 수연성하기 때문에, 인연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인연을 잘못 지었다. 이건 말이 되지만, 악하다 이건 말이 안 되요. 진성은 그게 악한게 아니거든요. 악하다라고 하면 자성이 있는 거거든요. 진성은 또 선한게 아니거든요. 선하다 그러면 자성이 있는 거에요. 불수자성이 아니라. 자성을 지키는 거거든요. 이게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불교 공부하는 사람이 일체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라고 하면, 거기에 딱 걸리는게, 불성을 가진 중생이 왜 저렇게 못된 짓을 할까? 이거에서 딱 걸립니다. 그저 불교 믿는 사람이 왜 인간이 저모양일까? 이런 거에요.

 

그런데 진성에는요 진성은 불수자성이에요. 불수자성이라는 말은 선성만 지키는 것만 것도 아니고, 악성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선악이 없이 수연성 해버려요. 인연 따라서 일어나버려요. 이래요. 이러니까 그 법당에 와서는 절 잘해도, 싸움판에 가서는 싸움 잘하는 거에요. 이게 불수자성수연성이에요. 그것이. 사돈집에 가서는 얌전해도, 친구만나면 안 얌전해요. 이게 불수자성수연성이에요.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좋은 인연을 자꾸 만들어 가는 걸 수행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좋은 인연을 자꾸 만들어 가면 그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제불만덕이 갖추어져요.

 

그래서 여래장장식이라 그러면 선과 불선의 근원이에요. 그때는 여래장이라 그래요. 장식이라 그러고. 또 심직법문이라는게 있는데요. 마음 땅 이라고 하고. 이것은 보살만행의 근원이다 그럴 때는 마음 땅이라 그래요. (마음심 땅 지). 이렇게 부르는 용어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런 거를 설명하는걸 보고 교학이라 이렇게 설명을 해요. 차원이 다르잖아요. 덮어놓고 같다는거하고, 덮어놓고 다르다는거 하고, 그렇습니다. 이게.

 

~ 그러면 이게 또 도대체 이런 얘기를 뭐하자고 하는 건가? 이게 전부 손가락인데요. 손가락인데 이런 얘기만 배우자는게 불교가 아닙니다. 정말로 그 세계에 가는거, 손가락을 봤으면 달을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중생은 손가락만 보고 달을 못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능가경에서 무슨 말씀을 했느냐 하면 女愚見指月여우견지월에 어리석은 사람은 달 가르키는걸 볼 때, 觀指不觀月관지불관월.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않는다. 관지불관월을 해요. 관지, 손가락은 보는데 달은 안봐요.

 

상락아정 불성이 있다 이거는 손가락인데. 그럼 불성을 내가 찾을려고 자꾸 공덕을 닦아야 되는데. 이게 불성을 못보는 것도 불수자성수연성이라. 수연성으로 인연따라서 이게 못보는거지 이게 뭐 못볼수가 없는거거든요. 그래서 計着名字者계착명자자는 이름에만 자꾸 집착하는 이들은 不見我眞實불견아진실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다 경책을 해 놨어요. 경책을. 그래서 상락아정의 나를 믿고 상락아정의 나를 이루려고 다 공을 들이고, 이렇게 자꾸 닦아가는 걸 그걸 신심에 의한 수행이고, 신심에 의한 정진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도인이 나왔는데, 그 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게 아닙니다. 이 생노병사의 나에서 불생불멸과 상락아정의 나를 찾아가지고, 거기에 아무 구애 없이 무가애 무가애 무애자재한 삶을 사신 분을 도인이라 그래요. 생노병사에서 불생불멸과 상락아정을 무애자재하게 살았다 이거에요. 이게 무가애. 무가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이게 자재. 이런 삶을 말하는 겁니다. 그걸 도인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생노병사하는 이 몸뚱이 가지고, 상락아정의 이걸 찾고 죽으면, 그거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참 기가막힐 일 아닙니까? 그런데 고려말에 나옹스님이라고 하시는 아주 큰 스님이 계셨어요. 나옹스님. 그런데 이분이 스무 살 때 출가를 했는데요, 출가한 동기가 아주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의 친구가 죽었어요. 그 상심이 됐는데, 그 동네에 아주 어른들, 나이 많은 어른들한테 찾아다니면서, 그 죽은 사람이 어디로 갔습니까? 死何之사하지. 죽은 사람이 어디로 갔느냐? 다 몰라요. 나이 많다고 압니까? 그거 몰라요.

 

그래서 인생에 의문이 생겨서 출가를 했어요. 그래서 도를 닦아서 대 도인이 됐는데, 이제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에 물었어요. 묻기를 나옹스님한테 묻기를, 四大各거애사대각애 이 지수화풍 사대가 다 각각 흩어져서 돌아가실 때에 向什麽處去향십마처거. 어느 곳으로 갑니까? 당신이 지금 돌아가시는데 죽은 다음에 어디로 갑니까? 이렇게 물었잖아요. 그러니까 나옹스님이 양손을 요렇게 이걸 교권이라 그러는데요. 두 손으로 한주먹을 만드는 거에요. 두 손으로. 두 손으로 한주먹을 딱 만들어서 가슴에 딱~ 대고, 只在這裏지재저리니라. 다만 이 속에 있나니라. 이랬어요.

 

도인법문입니다. 이게. 지금 돌아가시는데 누가 물어요. ‘돌아가신 다음에 어디로 가십니까?’그러니까 두 손을 딱 모아서 가슴에 딱 대고, 지제저리니라. 다만 이 속에 있나니라. 이러니 도인이에요. 이런 분들은 다른게 아니라, 당신이 출가한 동기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이거에 의문이 생겨서 출가를 했거든요. 그런데 도를 통해서 똑같은 질문을 또 받은 거에요. ‘스님 지금 죽으면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까 딱~ 하니 두 손으로 한주먹을 딱 만들어서 가슴에 떡~ 대고 다만 여기에 있나니라.’ 이렇게 법문을 하셨어요.

 

이 생노병사 이 몸 가지고, 불생불멸 상락아정 다 볼 수가 있어요. 이걸 보면 죽는게 죽는게 아니고, 나는게 나는게 아닌상태에서, 죽고 사는 것을 아주 잘할 수가 있는 거에요. 늘 즐겁게 할 수가 있는 거에요. 아프다고 고함을 질러도 그 고함지르는건 생노병사거든요. 그 고함지르는 그 속에 상락아정이 있어요. 상락아정을 알고 아프다고 고함지르는 사람하고, 상락아정 모르고 고함지르는 사람하고 다른 거에요. 그건 나도 어릴 때 도인이 아프다고 그럴 때 내가 실망을 했거든. 그런데 분명히 부처님한테도 생노병사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거에요. 그 속에 상락아정이 있는걸 보는게 중요해요.

 

그러면 생노병사에서 상락아정 보는 이치가 뭐냐? 그런게 있어요.

夢踏靑山脚不勞몽답청산각불로. 꿈에 청산을 다녀도 다리 안 아프고

影入水中衣不濕영입수중의불습. 그림자 물 속 들어도 옷 안 젖는다.

비유인데요.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즐거움을 느낀다. 이걸 비유로 말하자면, 몽답청산에 각불로요, 꿈에 청산을 헤매고 돌아다녀도 다리는 안 아프고, 영입수중에 의불습이라 나의 그림자가 저 물속에 있지만 내 옷은 젖지 않는다. 오늘 법문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