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14편 나누기의 의미

Buddhastudy 2011. 8. 11. 17:46

  방송 보기: 정토TV

지난 며칠 전에 저희들 몇 명이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나누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나누기를 할때 나누기가 싫어서 그 장소를 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제 나름대로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거든요. 보통 성당이나 교회나 다른 절에서는 이런 나누기를 전혀 몰랐는데 여기 오니까 그런것을 하게 됐구요. 그래서 다른데서 하지 않는 나누기를 독특하게 정회에서 할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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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라든지 교회라든지 이런데서 대부분 행하는 것이 그런 종교가 발생했던 출발점. 다른 말로 하면 교주라고 할 수 있겠죠. 불교 같으면 부처님이고, 기독교 같으면 예수님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럼 그 출발할 때는 그 출발점에 서있었던 분은 어떤 세상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자기의 이익, 자기의 주장, 이런 거를 추구하신 분은 아닐 거란 말이오. 그런 걸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을 리가 만무하잖아.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많이 따라서 이제 하나의 집단이 되었단 말이오.

그런데 지금, 이 집단에 소속돼 있는 사람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그 출발점 선상에 서 있던 그 분의 삶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 삶을 동경하고, 그 삶을 본받아 가려하고, 흠모하고, 이런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현재 여기에 소속돼 있는 사람들은 그 분의 삶이나 그 분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인 어떻게 돈이나 공짜로 좀 던져줬으면, 어떻게 지위나 좀 높아졌으면, 인기나 좀 끌었으면, 이런 헛된 거를 헛된 생각하고 이걸 노력해서 얻을 생각을 해도. 노력을 해서 얻어도 헛되다고 가르쳤는데. 그걸 노력도 안하고 공짜로 어떻게 손쉽게 좀 얻을 길이 없나 해서 다 모여든 거 아니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나는 그렇게 봐. 99.99%가 그렇다.

그리고 거기에 소위 성직자로 말하는 스님이나 신부나 목사가 사람들이 그렇게 왔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마치 쥐가 쥐약을 먹듯이 헛된 생각이다. 이렇게 해서 깨우쳐 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우리 교회에 오면, 우리 절에 오면 그런 헛된 것이 이루어진다고. 나를 따르면 그런 것이 이루어진다고. 나는 바로 부처님과 하나님의 직속 꼬봉이라고. 자기를 허위선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않느냐? 또 그 집단에 있는 어떤 지위를 이용해서 또는 그 집단에 있는 어떤 재물을 집착을 해서 싸우고. 대부분이지 않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그런 성직자들이 문제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왜? 이 대중이 그런 거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그런 사기가 가능한 거 아니냐? 대중이 그런 걸 원하지 않으면 그런 사기가 어떻게 먹혀들겠어. 내가 검사하고 판사하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내가 사법연수생이다 하는 사람한테 돈도 갖다 바치고 몸도 바치는 여자가 생기지. 나는 검사 판사는 정말 꼴도 보기 싫다. 이런 사람이 ‘내가 사법연수생이다’ 하면 속겠어? 안 속겠어? 안 속을 거 아니야. 사기를 당할 때는 다 사기를 당할 만한 뭐가 있다? 요인이 있다 이 말이오.

나도 사기를 몇 번 당해 봤는데. 사기를 당할 땐 다 당해놓고 보면 다 나한테 원인이 있어요. 나는 뭣 때문에 당했냐? 나는 이 수련장에 약간 내가 집착해. 내가 봐도. 어디 가서 경치만 좋으면 ‘야~ 저기 수련장 했으면 좋겠다.’ 미국가도 ‘야~ 저기 수련장 했으면 좋겠다.’ 인도 가서도 ‘야~ 저기 수련자아 했으면 좋겠다.‘ 나는 절 지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보다는 그 수련장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연히 돌아보면 내가 중학교 때 절에 참 열심히 다니고 불교학생 운동을 했는데. 이 수련을 하러 절에 가면 스님들이 아이들이 왜 절에 오느냐? 수련회 하다가 애들이 떠들잖아. 쫓아 내버려. 거기서 참 많이 울었어. 요즘 애들 같으면 스님이 뭐라 그러면 절에 안 가버리면 끝이지만. 그런데 나는 뭣 때문에 악착같이 오지 마라는데 그렇게 또 가고. 혼자만 가면 되는데 패를 모아서 갔는지. 아무튼 인연이 그래.

그래서 애들이 가서 마음껏 좀 떠들고, 애들 하고 싶은 대로 좀 하고, 수련도 좀하고, 애들이 떠들지 마라, 조용해라, 가라, 야단맞고 이래 안하는 그런 장소가 없을까? 그런 어릴 때 내 그 좀 포부라면 포부고 ??? 그런 게 좀 있었나 봐.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이렇게 경치가 좋고 터가 넓으면 ‘야~ 거 수련회 하면 되겠다.’ 그런데 두 번인가 수련장 좋겠다고. 스님 절 지어 드릴까요? 뭐할까요? 관심이 없으니까 그거 갖고 안 되는데. 수련장 좋은데 있는데 드리겠다고. 두 번이나 속았어.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이랬다기 보다. 진짜 주는 줄 알고 그랬다가 나중에 아니라는 거요. 세상에 공짜로 주는 사람이 있겠어? 그지? 준다해서 진짜 주는 줄 알고. 그런 것처럼 속을 때는 자기의 내면에 그런 게 있단 말이오.

여러분들이 다 점보러 가는 이유도 다 뭔가 허황된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다 속기도 하고 그런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속았다 할 때는 속았다 이리 생각하지 말고 아~ 내 속에 그걸 계기로 해서 아~ 내 속에 있던 헛된 생각을 자기가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그건 바로 뭐다? 좋은 수행이 되지. 수행을 하려면은 그 정도 값은 치러야 되니까 무슨 값으로 생각해야 된다? 학비라 생각하면 된다. 아 학비가 요건 좀 비싸게 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좋단 말이오.

지금 다시 돌아와서 이렇기 때문에 이거는 신앙이나 어떤 종교가 어떻게 되냐 하면은 교주와 여러분. 그렇지 않으면 스님과 여러분. 목사 여러분. 오직 일대일로 결합해. 옆에 있는 사람은 내가 복빌러 왔는데 옆에 있는 사람과는 나와의 관계는 중요한 문제요 아니요?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오히려 이거는 복비는데 경쟁의 상대가 되지. 그래서 기도도 같이하는 거 보다 혼자가서 좀 하고 싶어. 그래 지 혼자만 탁 받지. 같이하면 나눠가져야 되잖아.

그런 생각을 여러분들이 하든 안하든 이 식이 그렇게 잠재 되 흐른단 말이오. 그래서 이것이 다 전부 하나하나 별개란 말이오. 절에 아무리 몇 백 년을 다녀도 다 개별적으로 자기 복빌려 다닌단 말이오. 그래서 특히 불교같은데서는 그러니까 신도조직이라 그러면, 조직이라는 것도 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조직해서 보시받고 이런 목적이지. 신도와 신도사이에 교류라든지.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눈다든지. 이런 게 거의 없는 상태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그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보면 부처님 당시에는 상가라고 해서 스님들이 늘 함께 모여서 살았죠.

그리고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질문하기를 오늘날 ‘부처님,’ ‘왜?’ ‘좋은 벗은 이렇게 좋은 도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수행의 절반은 되겠습니다.’ 이랬더니 부처님께서 ‘아난다야 아니다. 좋은 도반은 수행의 전부다.’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단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들 끼리 마음을 서로 알고,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린 다 결혼해서 사니 부부간의 갈등, 자식 놓고 사니 자식문제의 고민, 돈을 벌어야 되니까 돈 문제의 고민, 부모모시고 사니까 부모와의 갈등. 사회 속에서 사니까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있잖아.

그런데 우린 오두다 이런 어떤 고뇌를 자기만이 안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단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둘러앉아가지고 이렇게 자기 마음을 나눠보니 아~ 내가 내 혼자 갖고 있는 고민인줄 알았더니 저 분도 그런 문제를 갖고 있구나. 그러면 이 문제를 혼자서 풀려고 그랬는데 못 풀었으니까 같은 문제라면 같이 머리를 맞대고 풀면 어떻겠어요? 훨씬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또 저분은 전에는 내가 보니까 어때요? 지나 내나 꼬라지가 비슷하더니 요새 사람이 뭔가 좀 나아진 거 같애. 얘기를 가만 들어보니 뭔가 생각을 바꾸니까 좀 좋아졌다.

그걸 보면서 어때요? 스님이 이래라 할 때는 에이 스님이나 되지. 스님도 우리남편하고 한 번 살아봐요. 그렇게 되는가? 요런 생각이 들었는데. 내 보다 더 못한거 같은 저 여자도 되니까 어때요? 나도 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이 되니까. 이게 배우는 게 훨씬 더 크다는 거요. 또 우리가 절에 나와서 집에서 살면서 절에 오기 전에 집에서 살면서 그 인생살이의 짐이 무거워가지고 그거 덜러 어디에 나왔다? 절에 나왔어. 그런데 절에서 이렇게 활동하다 보니까 절에 또 무거운 짐이 하나 생겨 어깨에 딱 붙었단 말이오.

바보 같은 사람이오? 아니오? 바보 같은 사람이지. 왜? 지짐도 무거워 절에 와놓고, 절에 또 무거운 짐 하나 지고 또 허덕댄다 이거요. 그 무거운 짐이라는 게 뭐요? 여기서 누가 좋으니, 누가 나쁘니, 누가 잘했니, 누가 못했니 하는 딱히 집에서 그런 분별로 인해서 부모 간에 자식 간에 고부간에 형제간에 생긴 무거운 짐을 여기서 뭔가 해탈하고 깨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기쁘게 살려고 왔는데. 또 그 길을 찾아서 도반끼리 어때요? 함께 나누고, 또 그런 기쁨을 이웃에 우리가 그동안에 내가 미처 못 봤던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나누므로 내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데.

그 활동을 하면서 좋은 일이라도 또 잘해니 잘못했니. 오니 안오니. 이러다가 보니까 여기서 패가 형성이 되고, 여기서 뭐가 된다하는. 이게 또 뭐가 된다? 새로운 무거운 짐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나눔으로 해서 아~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했는데 그게 저 사람한테는 이렇게 느껴졌구나. 아~ 내가 보는 나하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나하고가 다르구나.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것과 상대편이 느낌이 일치 안한다 이거야.

그걸 보면서 아~ 이 사람하고의 관계만 이런 게 아니라. 나하고 누구하고의 관계도 그럴 수 있겠다? 남편하고도 그럴 수 있겠구나. 나하고 애들하고도 그럴 수 있겠구나. 그래서 여기 나누기를 하나가 아~ 남편하고 얘기해 봐야 되겠다. 그런데 불쑥 앉아서 바쁜사람 붙들고 얘기하다 보면 귀찮다 그럴 거 아니오. 그래서 시장가서 술상도 딱 받아가지고 분위를 딱 만들어 놓고 얘기를 해 보죠. 내가 요즘 이러이러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당신 어떻게 느껴? 뭐가?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한 번 얘기해 봐, 혹시 내가 잘못됐나? 고치려고 그래.

이렇게 얘기하니까 여기 나누기가 집으로, 여기 나누기 좋다고 남편한테 가서 여보 저녁에 나누기 해 보라 그래. 이러면 안 되지. 그것도 또 지 식대로 강요하는 거란 말이오. 이렇게 하므로 해서 우리의 이 수행을 우리 스스로 자기가 주인이 돼서 깨쳐나가는 어떤 걸 만들자. 특히 이 절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가 잘해보겠다고 모인사람들, 좋은 일 해보겠다고 모였지만 거기서도 또 주장이 있고, 욕심이 있다 보면 그게 또 갈등의 원인이 되니까. 그리고 우리가 나누면서도 아~ 내가 한 생각, 상대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우린 살다 보면 남의 생각을 거의 안하거든요.

들어 보면 아~ 그렇구나. 저건 저래 느끼구나.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는, 그런데서 나누기를 하는 거요. ??? 일을 하다보면 우리는 세속에 사는 것처럼 성과 위주로 살기가 쉬워요. 돈을 얼마나 모았느냐? 사람이 얼마나 모였냐? 뭐 이런 식으로 모든 특정기능이 막대그래프 그리듯이 하기가 쉽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수행하러 여기 모였다는 걸 먼저 자각을 해야 되.

그리고 일을 하고 난 뒤에 그 일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을 서로 이렇게 나눠보므로 해서 어떤 것을 우리가 개선해야 될 점이 있나? 또 어떤 거는 좋은 점이 있나? 이런 거를 우리가 찾아 낼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늘 스님법문을 일방적으로 듣고 스님과의 일대일의 관계. 이것만 갖고 절에 나오게 된다. 그럼 스님이 안 오거나 스님이 죽어버리거나 하면 그거기서 끝나는 거지.

그러니까 수행이 자기가 중심이 되야 된다. 자기가 중심이 되 자기 잘났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스님이 오든지 안오든지, 죽든지 말든지 굳이 내 인생에 크게 ??면 안 된다 이런 얘기요. 우리는 늘 그래서 일체가 다 스승이라 그러고,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면 모든 것에서, 잘못한 것 속에서도 새로운 걸 배울 수 있다. 잘못한 것 속에서도. 아 이렇게 하면 잘못되는구나. 그것도 큰 깨달음이죠. 그래서 우리가 나누기를 하는 거구요.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는 포탈과 자자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보름마다 포살, 스스로 자신의 계율에 따른 허물을 참회하는 게 포살이고, 그 다음에 일 년에 안거가 끝날 때, 공동생활이 끝날 때 반드시 자자를 합니다. 수행자들은 이 안거 때가 아닐 때는 흩어져 살기 때문에 남하고 같이 안사니까 그 사람의 허물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죠? 같이 살 때는 볼 수 있기 때문에 허물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 그거를 상대에게 깨우쳐주는 시간이란 말이오. 자기가 자기를 보지 못할 때 도반이 아~ 자네 이러이런 문제접이 있다. 이렇게 그를 위해서 말해주는 시간이란 말이오.

이게 우리가 수행 안 된 사람들이 자자를 안 하죠. 자자를 하게 되면 시비분별심하고 이게 헷갈린단 말이오. 그래서 자자를 잘못하게 되면 싸우게 된단 말이오. 니가 뭘 잘 했노? 이렇게 나오기가 쉽기 때문에. 그래서 포살 자자를 통해서 서로 같단 말입니다. 그런 좋은 점이 있죠.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전통이 승단 내에서도 승려사회 내에서 제대로 이루지지 않고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예가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그런 나누기는 일종의 포살의 좀 부드러운 형식이다. 계율에 근거해서 하기보다는 좀 더 폭넓게 일상사를 두고 함께 나누는 그런 시간으로 마련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