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54편 갈등하는 마음

Buddhastudy 2011. 10. 7. 22:16

  방송 보기: 정토TV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동전을 딱 던져가지고 동전이 한쪽으로 정해, 가면 되고, 손바닥에 침을 붙여 딱 때려가지고 튀는데로 정해놓고, 가면 된다. 쉽긴 이런게 제일 쉬워요. 이런 거는 생각할 필요가 없이, 그냥 하는게 제일 나아요. 그럼 여기 갈까? 저기 갈까? 할 때는 이것은 욕심이오. 그럼 침을 딱 때려가지고, 동전을 딱 던져서 그냥 가버려라. 이 말은 욕심을 버려라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두 개를 다 갖고 싶은데서 일어나는 거다, 이 말이오. 두 개를 다 갖고 싶은 것에서 일어나는 거다. 그 망설인다는 것은 두 개를 다 갖고 싶어 해요. 그런데 현실이 두 개를 다 가질 수 없는 조건이 되 있어. 그러니까 현실에 깨어 있어야 되요. 그럴 때는 선택을 해야 된다. 선택을 할 때, 또 망설여지죠. 어느게 더 나을까? 그게 욕심이란 말이오. 어느게 더 나을까? 좋게 말하면 어느게 더 나을까? 하는 효율을 따지는 것 같지만은, 그 어느게 더 나을까? 하는 속에는 두 개를 다 갖고 싶은 마음이 밑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런 것은 한 시간을 생각해도 결론이 안 납니다. 왜냐하면 학회가 별로 중요한게 아니고, 법문이 훨씬 중요하다고, 비중이 법문이 높아 졌으면 이거는 고민거리가 안 되고, 법문이 아무리 좋은 법문이라 하더라도, 학회에 자기가 발표자로서 선정이 되 있어도 별로 고민거리가 아니고. 그러니까 이게 양쪽 다 가면 좋고, 양쪽 다 빠져도 될 상황이에요. 뭐 법문 안 들으러 왔다고 스님이 뭐라 그럴 일도 아니고, 학회에 가면 좋지만 안 간다 해서, 거기서 뭐 당장 경제적으로 손실을 보거나, 개망신을 싸거나 그런 일은 아니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망설임이라는게 생기는 거다. 이럴까? 저럴까? 이럴까? 저럴까? 이렇게 망설임이 생기는 거다. 망설임이 생긴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의 비중이 어떻다? 비슷하다. 비슷하기 때문에 어느 걸 선택해도 어때요? 큰 문제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이 동전을 딱 던져 가지고 그냥 가버리면 되. 이게 동전을 던진다 하니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은, 그 말은 그건 아무거나 선택을 해 버려라, 이런 얘기요. 망설이지 말고.

결혼을 할까? 말까? 이 남자하고 할까? 저 남자하고 할까? 이럴 때도 마찬가지요. 이럴 때도 동전 딱 던져 가지고, 동전 나오는 데로 가면 되요. 그거 신중을 기한다고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게 욕심을 못 넘는다는 얘기요. 동전을 던져, 딱 던겨 가버린다는 얘기는 탁~ 놔버린다는 거요. 그래서 결정을 못하면 스님이 결정해 주기를 원하죠. 나는 ‘기도 하세요’ 이래. 기도문을 주고 한 100일만 기도해 봐라. 100만 기도해 봐라 하는 것은? 욕심을 버려라 이런 얘기요. 욕심을 버리면 완연하게 길이 열린다.

자기가 욕심이 탁~ 버려져서 지혜롭게, 스스로 완연하게 판단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남자 중에 100일 기도 중간에 한 남자가 결혼을 해 버렸어요. 그러면 선택은 저절로 되요? 안 되요? 선택은 저절로 되요. 선택이 이렇게, 내가 고민을 안 해도 100일 기도 하는 동안에 선택이 저절로 되게 돼 있어. 그래서 그런 거 별로 신경쓸 거 없는 거요, 사실은. 이거는 노하운데 오래 좀 살아봐요. 자기 인생을 선택할 때도 아주 가볍게 선택하는 거고.

그러기 때문에 상담할 때 아주 쉬워요. 굉장한 걸 가지고 와서 상담을 해도 딱~ 들어보면 이 사람하고 결혼할까? 말까? 이럴 때 이 사람하고 결혼하는게 90% 비중이 높은 사람은 나한테 물으러 오나? 안 오나? 안와. 이 사람하고 결혼 안하는게 좋다고 90% 결론 난 사람도 물으러 안와. 할까? 말까? 이거 할까? 저거 할까? 거의 반반이기 때문에. 물으러 오는 거요. 그런데 내가 이 사람하고 해라. 하고 누르면 ‘이 사람은 돈이 없는데요.’ ‘저 사람하고 해라.’ 하면 '그 사람은 성질이 나쁜데요. 키가 작은데요.’ 나오든지 그러죠.

이쪽으로 한번 눌러보고, 그럼 이렇게 하지. 이쪽을 딱 눌러서 아 부정적으로 나오면, 그럼 이쪽으로 하면 어때요? 아~ 그쪽은 그대로 문제요. 그런데 이렇게 딱 눌릴 때 ‘그게 낫겠죠?’ 이렇게 나와. 그러면 실제로는 이거는 내가 선택해 준 게 아니고, 거기에 자기가 사실 한 6, 70% 비중이 있었는데 약간의 위험 부담이 있었어요. 그래서 물으러 왔기 때문에 딱 해주면, 그냥 받아 들여 버려. 그러니까 위험부담을 좀 분산하자는 얘기거든요. 스님도 책임을 좀 져라. 책임을 져주면 되요. 나중에 원망을 좀 들어주면 되.

그 다음에 이렇게 하면 저렇게 얘기하고, 저렇게 하면 이렇게 얘기하고. 다섯 번을 물어도 다섯 번 결론이 안나요. 그러면 이거는 50대 50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결론이 안나있기 때문에 스님이 아무리 조언을 해도 즉시 결론이 안 납니다. 스님이 이렇게 딱 얘기하면 스님 말을 탁 받아들이고, 탁 결론이 날 때, 내가 잘 선택해주기 때문에 결론이 나는게 아니오. 본인도 거기 무의식적 비중이 높아있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이는 거요.

그러니 여러분들 이게 내가 결정해 주는게 아니에요. 결정은 자기가 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걸 듣고, 내가 이걸 어이 결정해 줘야 되나? 고민하는 상담자를 많이 보는데, 그건 경계에 끄달린 거요. 왜 그 사람 복잡한데 내가 뭐하러 거기 끼어들어? 와 머리를 뭐하러 거기 쓰노? 그냥 얘기할 때, 나는 부처님하고 그냥 노는 거요. 다 듣고, 다 자기 얘기하고, ‘아이고, 오늘 스님하고 얘기하니 시원하다’, 하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어. 결론을 내 줄 필요가 없어.

그래서 상담은 사실은 굉장히 쉬운 거요. 상담이 왜 어렵냐하면 여러분들은 내가 뭔가 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게 문제인거요. 그래서 힘든 거요. 남의 인생에서 해줄게 아무것도 없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건 들어주는 거요, 그냥. 귀담아 들어 주는 거요. 아~ 그러냐?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들어주면 끝나는게 50%고. 그 다음에 위험부담을 조금 같이 좀 책임지자하고 찾아온 사람 ‘그래,’ 책임 좀 져주면 되는 거요. 그 다음에 이러면 저게 문제고, 저러면 이게 문제고. 그런 사람은 동전하나 줘서 결정하세요. 그러면 되.

그런 사람은 그게 밖에 있는게 문제가 아니라, 자꾸 질문을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는 그게 누구문제라는 거를 알게 하기 위해서, 자기 문제라는 거요. 상대편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내 문제라는 거를 알아차리게만 해 주면 되. 그러니 자기 문제니까 중요한과제가 뭐다? 수행을 하는 거요. 이 마음을 닦는게 중요한 거요. 그러면 뭐 어려운 일이 있어? 그러니까 갈등이 탁 일어나면, 아이고 내가 두 개 다 먹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봐도 되요. 아시겠어요?

저도 그런 생각이 딱 일어나면 그래. 그땐 하나를 딱 정해버리고, 다른 하나를 놔 버려야 되. 나도 지금 머리에 편두통이 아주 심해요. 눈살이 어때요? 지금 눈을 제대로 못 뜨잖아. 자꾸 이렇게 팍팍 찌르니까요. 눈이 나도 모르게 감긴단 말이오. 그러면 법문시간이 다 되가는데 편두통이 심하니까 어때요? 하지말까?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오. 그만 둘까?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오. 그럴 때 그만 둘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는 아직도 법문 할만 할만하다는거요? 못할 만큼 아프다는 거요? 그렇죠. 되게 아프면 그만 둘까? 안둘까? 이런 건 고민도 안 돼. 그냥 못하는 거지. 아시겠어요? 병원에 가버리는 거지. 그런데 벌써 그만 둘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는 아직도 견딜만 하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딱 생각을 바꿔가지고 그냥 와서 해버리죠. 그럼 그런 번뇌가 왜 일어나느냐? 통증이 심하니까 순간적으로 ‘아이고, 도저히 안되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요.

그런데 마음이 중요하다는게 뭐냐? 아무리 여러분들 피곤하고 아프다 해도 옆에서 폭탄이 떨어지면 ‘아이고, 나 아파 도저히 못가겠다.’ 이럽니까? 언제 어팠드냐 합니까? 마음이라는 건 어느 정도는 다 잡을 수가 있잖아. 그죠? 그러니까 그 상황이 다잡을 수 있는 거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하고 상담약속을 했거나, 그냥 일대일로 약속을 했다, 이랬으면 망설임이 조금 더 크겠죠. 왜? 그쪽을 취소해도 되니까. 그럴 때는 ‘아이고, 약속을 해놓고 지키긴 지켜야 되는데 몸은 아프고’ 이렇게 번뇌가 일어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대중을 많이 약속을 해 놨을 때는 어때요? 좀 아파도 그런 생각을 안한다 이 말이오. 해야 된다. 결론이 나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다 그거 따라가지고, 상황 따라서 번뇌가 일어나는 거요. 아마 개인적인 약속을 내가 해 놨으면 오늘 좀 머리가 왔다갔다 했을 거요. 요럴가? 저럴까? 전화해서 오지마라 그럴까? 어쩔까? 이렇게 번뇌를 일으킨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런걸 아셔서, 이게 딱 갈등이 일어나면 ‘아, 내가 이런 상태에 놓여있구나.’ 그래서 일상적으로는 가법게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놔야 된다. 학술모임이야 맨날하는데 스님 법문을 들어야지 이렇게 딱 정리하든지.

이제까지 스님법문 안 듣고도 살았는데, 한 번 안 듣는다고 뭐 일이 생기겠냐? 이러고 딱 정리하고, 학술모임에 가든지. 이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 중생은 어떤거냐 하면, 이게 망설이고, 여기 와서도 ‘아~ 학술모임에 갈 걸’ 하는 생각이 들거나, 학술모임에 가선 또 어때요? 아이고 뭐 별거 아닌데, 여기 법문이나 들으러 갈 걸. 이렇게 후회가 되는 거요. 이 법문이 신통치 않으면 온게 후회가 되고, 거기 가 봐도 딱 가보면 이 세상에 없어서 안 될 일이 어딨어요. ‘아이고, 이 정도 일줄 알았으면, 법문이나 들으러 갈걸’ 이렇게 일어나는 거요. 그래서 두 개를 다 움켜쥐려고 하면 어느 걸 선택을 해도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놔버려야 되요. 왔었을 때는 여기서 법회가 없더라도 후회를 하면 안 돼.

선택을 가볍게 해라 이 말이오. 가볍게 해라하는 말하고, 함부로 해라라는 말하곤 틀리는 거요. 가볍게 해라. 인생이 그렇게 입 다물고, 각오 하고 할 만한 일이 있을까? 없어요. 여러분들은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 많아요? 인생에 그런 일 없어요. 침 튀겨 결정하는게 제일 좋아. 내가 굉장히 일을 신중하기 때문에. 옛날에 특히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할 때 는 머리가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걸 주위에서 다 알잖아, 그죠? 내가 머리를 깍아 놓으니까, 내가 머리를 기르고 하다고 안 돼가지고, 엄청나게 머리를 생각해 서 깎았구나 이렇게 다 생각을 해. 그래서 오해가 많아요.

그런데 내가 머리를 깍을 때는 이발소 가서 머리깍는 것 보다 더 쉽게 깍았어요. 그러니까 인생에 이게 정말 중요한거 아니냐? 하등 중요한거 아니에요. 뭐 옷을 이래 걸치고 스님이라고 불리고 사나, 내가 안그렇다고 사나, 여러분들은 스님이 되고 안되고, 인생이 180도 틀리는 인생을 생각하니 그러지. 저로서는 그것은 내 인생에 아무런 왔다갔다 할 일이 없어요. 지금 내 머리 길렀다 해도 이 길을 갈거고, 결혼을 했다 해도 이 길을 갈거고, 여기에서 한발도 다른 길로 갈 생각이 없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외모는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스님과의 문답을 통해서 딱 인도 간다고 인사하러 갔더니, ‘너 나가서 활동한지 몇 년이나 됐지?’ ‘20년째네요. 올해.’ ‘그때 20년 복 지으라고 얘기 안했나?’ ‘아~ 예, 스님. 그때 그런 말씀하신 거 같네요.’ ‘밖에서 그만 활동하고 안에 와서 활동을 해라.’ 그러니까 분별심이 딱 생기죠. 밖에서도 활동 잘 하고 있습니다. ‘굳이 안에 와서 활동할게 뭐가 있습니까? 이게.’ 여러분들도 ‘출가해라’ 이러면 뭐라 그래요? ‘전 출가 했습니다.’ 이런 사람 있어. ‘마음으로 다 출가 했습니다.’ 그러니까 밖에서 그만 활동하고, 안에서 활동을 해라. 안에 들어와라. 이 말은 머리를 다시 깍아라. 이 말 아니오. 그죠?

그러니까 내가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 말이오. 그런데 보통사람 같으면 ‘그게 효과적입니까? 아닙니까?’ 이래 얘기하는데, 스승과의 대화니까, 도전적이죠. 서로가. 내 물었어. ‘도의 안팎이 있습니까?’ 자꾸 안에 와서 활동하라니까. ‘도에 무슨 안팎이 있습니까?’ 이랬어. 도에도 안팎이 있습니까? 이 말이오. 그러니까 스님이 ‘없지.’ 이래. 그럼 누가 이겼다? 내가 이겼지. 그지? 딱 이 한마디에 내가 스님의 입을 막았다. 더 이상 얘기 못하게. ‘그런데 왜 자꾸 안에 들어와서 활동 하라 그럽니까?’ 이러면 뭐라 그러겠어? 스님이. 도에는 안팎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스님 하시는 말씀이 ‘야, 이놈아, 니가 밖을 고집하니 안이 생기지 않느냐?’ 이러는 거요. 그런데 그때 내가 나를 탁 본거요. 도에 안팎이 없다라는 논리를 가지고, 뭘 내가 고집하고 있다? 밖을 고집하고 있는 거요. 시집 갈거냐? 안 갈거냐? ‘아이고 스님, 뭐 시집가도 후회고 안가도 후회라면요.’ ‘그래.’ ‘그러니까 함 가보죠, 뭐.’ 보통 이러지. 그러니까 이 때 시집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는 그냥 말이고, 그걸 어디다 갔다 붙인다? 시집가고 싶은데다가 이유를 갖다 붙이는거요. 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 그러니까 안가죠. 뭐. 이래 말하는 사람 없어.

바로 내가 그렇게 안팎이 없다고 늘 내가 주장하고 그걸 가지고 무기로 삼고, 안팎이 도에 무슨 안팍이 있냐? 승속이 어디 따로 있느냐? 이런 주장을 할 때는 주로 누가 그런 주장을 해.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거요, 아시겠어요?. 스님이 승속이 따로 없다. 이런 주장 잘 안 해요. 스님이 승속이 따로 없다. 우리 같이 놀자. 이런 말 잘 안 해요. 거사가 ‘스님, 뭐 승속이 따로 있습니까?’ 이러지. 그지? 그러니 승속이 따로 없다. 안팎이 따로 없다는 그 말의 도를 빌려서 밖에 있는 것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딱 세우고 있는 거요. 그걸 딱 찌르니까 ‘]아! 금방 탁 놔버리지.

그럼 뭐가 되요? 깍죠 뭐. 이렇게 된거요. 그래서 깍은 거요. 돌파리인 거요. 거기에 무슨 인생을 어떻게 계산하고, 뭐 이런 건 계획할 여가가 없어. 그런 분상에서는 무슨 계산이라는게 없는 거요. 그럼 스님이 되고 안되는 것도 계산 없이 하는데, 여기 법문오고 학술회의 가는거까지 계산할게 뭐가 있어? 그냥 발길 가는 데로 오든지, 조금 그래도 안되거든 동전 하나 호주머니에서 꺼내가지고, 딱 던져서 밟히는 데로 가면 된다. 가볍게 생각을 해라. 가볍게. 어려울 때 일수록 가볍게 받아들이세요. 가볍게. 그런데 그게 함부로라고, 혹시 오해를 해서 받아들이시면 안 돼요. 내가 중되는 걸 함부로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요. 인생의 선택을 가볍게 할 수 있어야 되. 별거 아니라니까, 인생이라는 게.